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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경
ⓒ 인권위 김윤섭
지금도 한 해에 8억4000만 인류가 굶주림으로 허덕이고 있다. 1시간에 무려 4000명이 기아로 죽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남아도는 식량은 어디에 비축되어 있는 것일까?

그리고 오늘, 외국산 농산물을 값싸게 먹을 수 있고 그것이 가정의 경제와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일, 수입 농산물에 길들어 농촌은 망하고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수입농산물 값까지 오른다면 어떤 현상이 빚어질까? 2003년 2만5000원 하던 국제 쌀값이 올해엔 5만원을 넘어섰다. 내년에는 얼마나 오를지, 또 10년 뒤엔 얼마나 오를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10여 년 전 900만 농업인구가 300만으로 감소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초순, 전북 순창농민회 사무실로 들어서자 정책실장 이광희(40) 씨는 한국 농업정책으로 말문을 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농업정책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농산물 수입개방 압력이 시작되면서 정부도 관심을 갖게 됐지요. 그렇다고 해서 산업정책으로 농업정책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자국의 식량생산 기반을 무너뜨리며 선진국으로 도약한 나라가 없으니까요. 특히 우리나라는 통일을 염두에 둔 농업정책을 펴야 합니다."

한국 농민은 그동안 숱한 개방정책에 시달려왔다. 농민회 사무실에 비치된 철지난 회보들이 그걸 증명하고 있다.

'경칩이 지났습니다. 마음이 바쁘신가요? 고추모는 잘 자라고 있는지요? 복분자도 손질해야 하고,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 되었는데 어느새 성큼 봄이 다가왔습니다. 봄을 맞는 회원 분들께 희망과 기쁨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또다시 우리의 믿음은 배신당했습니다. 대한민국 땅에는 농민이 없습니다. 하지만 수천년 농업의 역사에서 우리 농민들은 땅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일제의 시퍼런 총칼에 만주로 내몰려서도 황무지를 손과 발로 갈아 옥토로 만들었고, 해방 후 일제에 빼앗겼던 땅을 다시 돈을 물고서도 사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2005년 6월, 다시 싸움의 파도가 밀려오고 있습니다. 수입쌀의 향배를 결정하는 쌀협상 국회비준 절차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숨조차 고르기 힘든 나날이었다. 1986년 제동을 건 우루과이 라운드를 시작으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GATT , 세계무역기구 WTO 에 이르기까지 농민들은 단 하루도 마음 편히 농사지을 수 없었다.

"한국에서 농사를 짓는 한 사람으로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어도 그게 쉽지 않습니다. 논밭은 그대로인데 신자유정책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물론 현존하는 것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분명한 목소리로 답을 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정부가 그동안 실시한 농업정책이 성공인지 실패인지, 그 점을 먼저 따져 보고 선별하는 것입니다. 1991년만 해도 900만이던 농업인구가 300만으로 감소했기 때문입니다. 이 숫자는 도시빈민 수보다 적은데 이것 하나만으로도 오늘의 농촌현실을 대변하는 것 아닐까요?"

"농업 소득이 없으니까 떠나는 겁니다"

이광희씨가 순창과 연을 맺은 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때였다. 1989년 '농활 농촌활동 ' 차 내려온 그는 농촌이 좋았고, 몸에 맞기도 했다. 이후 결혼한 그는 축의금 800만원을 쥐고 순창으로 다시 내려와 중고 경운기부터 한 대 샀다.

소작을 하며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농민후계자로 선정되어 자신의 논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품었던 농촌에 대한 꿈은 추수 끝난 들녘만큼이나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스무 살 중반에 뛰어들어 귀농 15년의 세월은 고스란히 부채가 돼 버린 것이다.

"부채가 많은 사람들을 보면 대개 젊은 농사꾼들인데 그래서 무얼 시작해 보려면 더럭 겁이 납니다. 한번 무너졌다 하면 일어서기 힘들거든요."

자작 20마지기와 소작 10마지기 해서 그가 한 해 농사를 지어 벌어들이는 돈은 1800만 원 선. 소작료와 영농비를 제하고 나면 1200만원이 남는다. 지출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농기계를 구입하느라 대출받은 원금에 이르면 이자 막기도 버겁다. 늘어가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이너스 통장뿐이다.

과묵해 보이는 그가 전혀 예상치 못한 장수군을 들먹거린다. 네 식구 살아가려면 적어도 70~80마지기 논농사를 지어야 생활이 가능하다는 오랜 경험을 바탕에 깔고서였다.

▲ 박재순씨의 아들
ⓒ 인권위 김윤섭
"농지를 사려고 해도 내놓은 곳이 없습니다. 젊은 농사꾼들한테는 농사지을 땅이 많아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지요. 이것도 한국 농정이 실패한 한 예라고 볼 수 있는데 장수군이 그 대안으로 등장했습니다. 장수군은 외지인이 들어와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농지를 마련해 주고 길까지 넓히고 있습니다."

물론 그곳에 살고 있는 농민들 편에 서서 보면 귀농자는 분명 특혜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는 농촌이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농촌이 살아남으려면 농촌을 농사만 짓는 곳으로 인식해서는 곤란하다. 정치·경제· 사회·문화가 다 이뤄져야 하고, 특히 자녀들의 교육문제가 원활해져야 비로소 농촌 근대화를 입에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왜 농촌을 떠나느냐고 묻는다면 답변은 간단합니다. 농업으로 인한 소득이 없으니까 떠나는 겁니다."

귀농자들이 떠나는 또다른 이유, 교육문제

이광희씨는 얼마 전 그 소득을 위해 축산에 손을 댔다. 30마지기 벼농사로는 쭉정이 부채로 쌓이는 생활을 더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해서 그는 지난해 가을 아내 명의로 1억원을 대출받아 축사 부지를 마련하는데 5000만원, 축사를 짓는데 2000만원, 소를 구입하는데 3000만원을 사용했다. 그의 말마따나 승부수를 띄운 셈이다.

축사를 찾아간 건 다음날 아침이었다. 1억원을 대출받아 기르고 있는 30여 마리의 소는 개량종으로 그는 사료를 먹이는 중이었다.

"한 달 사료비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유기축산을 생각하고 있는데 힘들더라도 내년에는 그쪽을 택할까 합니다. 그래야 사료비도 절감하고 소 키우는 사람들과 경쟁해서 살아남을 테니까요. 그때까지 소 값이 폭락하지 않길 바랄뿐입니다."

분명 그는 어제 만난 모습이 아니었다. 뭔가 절박한 눈빛이 역력해 보였다. 이야기 도중 내년 봄을 기약하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년 봄이면 11마리의 새끼소가 출산한다고 했다.

축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둥지를 튼 유등면 금판마을로 들어서자 그제야 발그레 동이 터오고 있었다. 극구 사양하던 이광희씨의 아내 조경숙(40)씨가 마음의 문을 연 건 아침상을 물리고 매실차를 나누면서였다. 전날 남편은 소득이 없는 까닭에 귀농자들이 농촌을 떠난다고 했으나 그는 자녀들의 교육문제를 먼저 꺼냈다.

"시골 아이들은 거의 방치되어 있습니다. 방과 후 같이 놀아줄 또래들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특활이나 특기적성 교육이 제한되어 있는 것도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또 순창에 살고 있는 공무원들도 그 책임이 있고요. 군청직원은 물론이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까지 광주나 순천에서 출퇴근을 하고 있으니 이곳에 무슨 애정이 있겠습니까."

아이들의 학년이 높아질수록 파란 하늘이 더 파랗게 보인다는 불혹의 조경숙씨. 그는 많은 점을 인정하고 있었다. 도시와 농촌의 학력차와 읍단위 아이들과 면단위 아이들의 학력차 등등. 또한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실제 현상으로, 농촌 아이들의 국·영·수 성적은 도시 아이들에 비해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그 이유로 도시에 집중된 사교육을 꼽았다.

"인정하자고 하면서도 속상해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시골 삶이란 이런 것인가 보구나 하고 살아야지요. 처음엔 그것이 풀인지, 벼인지, 피인지도 모르고 지냈던 시절에 비하면 많이 발전했다고 할까요. 아마 주위에 사람들이 없었다면 많이 힘들었을 것이고 지금쯤 서울에서 살지 않을까 싶네요."

서울 이야기가 나오자 엄마와 두 아이들의 시선이 소리 나지 않는 느낌표처럼 교차한다. 며칠 전 방학을 맞아 서울 할아버지댁을 다녀온 아이들은 놀이공원에 갔던 기억들을 되살리며 마냥 신이 나 있건만 순창으로 시집온 외국인 여성들을 상대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는 조경숙씨의 얼굴엔 해 저문 서녘이 남기고 떠난 그림자 하나가 고개를 내민다.

"결혼할 때 엄마가 그러더라고요. 너도 너 같은 딸 하나 낳아 길러 보라고. 그런데 그 딸을 낳아 2학년이 되었으니 어쩌지요?"

자신보다 남편이 더 식구들의 '기쁜 날'을 잘 챙긴다는 그는 이런 고백도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얼마 전이었다. 그는 자신이 꼭 챙겨야 할 날짜 하나를 놓치고 말았다. 분명 달력에 보름달만한 동그라미를 쳐놨건만 들에 나가 집으로 돌아온 순간 만사가 귀찮아졌다. 밥하는 것마저 귀찮던 그날은 남편과 합의해 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런데 그날이, 남편의 귀 빠진 날일 줄이야! 그 점은 얼마 전만 해도 4대가 한집에 살았다는 박재순(36)씨도 예외가 아니었다.

▲ 풍경2
ⓒ 인권위 김윤섭
가계부를 쓸수록 느는 건 부채

적성면에 살고 있는 박재순씨 집을 찾아가자 그는 시아버지와 고추밭에 농약을 치고 있었다.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매미소리를 들어가며 당산나무 그늘에 마주 앉은 건 20여 분이 지나서였다. 마침 비 개인 뒤라 푹푹 삭는 퇴비냄새가 코끝을 자극할 즈음 그는 얼음을 동동 띄운 미숫가루를 내왔다.

순창에서 태어나 군산대 생물학과를 졸업한 그는 농활이 뭔지도 모를 만큼 순진한(?) 대학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중 군청 앞에서 농민들의 쌀개방 반대집회를 목격하게 되었다. 바로 그날이었다. 농민들이 삭발하는 광경을 목도한 그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하늘이 노랗다는 말을 그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착한 농민들이 왜 삭발까지 해야 하는지…."

농민회 사무실에 간사를 맡아 달라고 연락이 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낯설기만 한 환경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팔과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는 한 남자였다.

"깁스를 하고도 농민회 일을 참 열심히 하더라고요.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던지요. 우리 한번 사귀어 보자고 프러포즈한 것도 저예요."

그러나 결혼은 간단치 않았다. 부모님의 반대는 물론이거니와 결혼을 하더라도 시할머니까지 모시고 살아야 할 형편이었다. 아마 그의 말처럼 세상을 좀 단순하게 살려는 마음이 없었다면 결혼은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논농사 60마지기에 자작농이라고 해야 고작 12마지기가 전부인 그는 그마저 땀 흘려 수확기를 맞을 때면 3분의 1은 고스란히 소작비로 건네진다. 가계부를 쓰다 만 것도 그 때문이었다. 월급쟁이처럼 매달 들어오는 수입도 아닌 터라 그는 가계부가 두께를 더해갈수록 느는 건 마이너스통장과 부채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엔 영농후계자니 정부보조비니 해서 희망도 가져 보았지만 가계부를 쓰면서 알게 되었어요. 농민한테 주어지는 보조비는 물론이거니와 농기계 하나 사는 것도 빚이 된다는 것을!"

그로 인해 쌓인 부채는 현재 8000만원. 농한기 때면 그는 가슴 저미는 일이지만 수입산 도라지 껍질을 벗기기도 했다. 4시간가량 벗기면 5000원이 손에 쥐어지는데 농한기 때는 그 벌이도 적은 액수가 아니다. 지금은 그 일마저 끊겨 몇몇 아낙들은 부안 양파밭으로, 경상도 골프장 잔디 손질하러 새벽같이 일어나 집을 나선다. 그래서 하루 일당으로 2만원도 벌어오고 3만원도 벌어온다.

"농사짓는 사람은 농사지어 생활이 해결돼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네요. 새벽 4시경 승합차가 마을로 들어서면 그 차를 타고 집을 나서는데 밤 11시가 되어야 돌아오거든요. 순창 농민들 중 절반 넘는 사람들이 농사 외 일을 하고 있으니 앞날이 많이 걱정됩니다."

"관에서 하라는 대로 해 농촌이 이 지경 됐다"

아이들 교육문제라고 해서 마음 편한 건 아니다. 남편은 시아버지 대를 이었지만 얼마 전부터 학원을 보내기 시작한 아이들한테는 자신이 없다. 한 가닥 희망만 가질 수 있다면 농사지으며 살아 보라고 권하고 싶지만 농번기 때면 눈 뜨기 바쁘게 일터로 나가는 터라 아이들에게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식구들의 겨울옷을 이제야 손질해 장롱에 넣어 두지 않았던가.

농번기 때는 죽어라 일하고 농한기 때면 열심히 병원을 다니며 부서진 몸을 고친다는 농촌의 현실. 얼마 전 시할머니를 여윈 박재순씨는 130여 명의 회원을 둔 순창 여성농민회의 근황을 귀띔하듯 들려 준다.

▲ 조경숙씨와 그의 딸
ⓒ 인권위 김윤섭
"2년 전 독립해 나왔는데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스스로 해결하려는 독립심을 배웠다고 할까요. 농한기 때면 박공예 교실도 열고 초빙교사를 초청해 환경 세미나도 개최하는데 이곳으로 시집 온 외국인 여성들과의 접촉이 가장 보람 있는 일 같아요. 그들이 바로 이 농촌에 남아 대를 이어갈 사람들이잖아요."

그러나 외국인 여성들에게 한국어와 출산을 돕는 여성농민회 일도 쉽지만은 않다. 이런저런 행사 때면 신경쇠약으로 고생하시는 시어머니 눈치를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바깥 출입 열 번 중 서너 차례는 시어머니로부터 날아오는 곱지 않은 시선을 느껴야 하는데 물론 농사일보다 직장을 가졌으면 하는 시어머니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만큼 농사만 짓고 살기에는 농촌의 현실이 각박한 탓도 있고, 7인 가족에게 들어가는 의료보험료만도 한 달이면 5만원이 나가기 때문이다.

"두어 차례 수확을 내 살아가는 게 농촌의 현실인데 세금은 매달 나오잖아요. 간간이 트랙터와 이앙기, 고추 건조기와 벼 건조기가 벌어들이는 수입도 있지만 두 아이 학원비(12만원)를 낼 때가 되면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 같아요. 전기세도 내야 하고, 전화요금도 내야 하고…."

된장에 풋고추 찍어 밥 한술 뜨고 가라는 말에 빨간 고추를 널어 놓은 마당으로 들어서자 그의 남편이 반긴다. 순간, 깁스를 했을 오래 전 모습과 함께 농사를 대물림한 그의 얼굴에서 조금 전 당산에서 자리를 털며 일어설 때 들려 준 박재순씨의 마지막 여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관에서 무얼 하라고 하면 곧이곧대로 따르는 고정관념이 농촌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농민들이 순진해서 그랬겠지만 그래서 되는 게 뭐지요?"

다행히도 그 해답은 순창 토박이 최형권(47)씨가 내려 주었다. 딱 1년 외지 경험을 하고 돌아와 36세에 늦장가를 든 그가 저녁식사를 나누던 중 이런 말을 했다.

"텔레비전만 켰다 하면 새로운 영농법을 이야기하는데 내가 보기엔 농사짓는 일이 영락없는 화투판 같아요. 돈을 딴 사람은 없고 개평 농약 만들어 판 사람, 농기구 만들어 판 사람, 농협대출 내준 사람 뜯어간 놈만 돈을 쥐고 있잖아요. 어디 그뿐인 줄 아세요. 예를 들자면 농촌은 뿌리고 도시는 꽃인데 그 꽃을 피울 뿌리를 한번 보세요. 뿌리가 썩어가고 있는데 과연 대한민국에 꽃이 피어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나는 한국에 살고 있는 농민을 '기타 국민'이라고 부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인권>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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