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길다 싶을 만큼인 5년을 만나고 다투고 다시 사랑하던 한 여자와의 연애 과정. 마침내 참으로 나를 힘들게 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서운함과 미안함, 실망감과 고마움과 부끄러움이 뒤죽박죽이 되는 것을 경험하였다.
세심한 배려와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따스함을 원했고, 한편으로는 나의 부족함과 정성 없음을 반성하던 나날에서 사랑은 참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깨닫게 해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한 나날이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서있는 곳으로부터 사라지고 싶었다. 당연히 책 읽는 재미도 영 없어져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미처 읽지 못하고 마구 쌓아놓은 책 더미 속에서 법정 스님의 <오두막 편지>를 꺼내 든 것은 꽃이 피어날 것이라는 예감과도 같았을까. 별 다른 생각 없이 손 가는 대로 집어 든 것 중에 하나였을 뿐인데.
그러나 어느 순간 현실로 되돌아와 보니 내 사랑을 힘들게 만든 당사자인 그녀가 어루만져 주었어야 할 내 마음을 글 한 편 한 편이 너무도 따스하고 부드럽게 대신 어루만져 주고 있음을 알았다.
그 순간부터 맛난 음식을 두고두고 아껴 먹듯이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오래오래 아껴가며 읽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많이 나더라도 여러 꼭지를 한꺼번에 읽지 않았다. 한 꼭지의 글을 읽고, 그것을 음미하는 순간은 어느 때보다 행복하였고, 그것은 사랑으로 인해 상처받은 마음에 바르는 연고와도 같았다.
그러고나서야 비로소 그녀를 사랑하는 나의 방법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저 내가 원하는 면을 충족시키려고만 했지, 정작 그녀의 마음을 몰랐던 것이다.
"소욕지족(少欲知足).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크고 많은 것에서보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있다. 크고 많은 것만을 원하면 그 욕망을 채울 길이 없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삶의 향기인 아름다움과 고마움이 스며 있다." - '가난을 건너는 법' 중에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강의> 등의 책으로 유명한 신영복 교수는 오래 전 월간 <말>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독서 습관을 이렇게 토로한 적이 있다. "한 시간 독서에 30분 명상."
<오두막 편지>도 그렇게 읽는 시간과 사유하는 시간의 비중을 같게 두면 아주 맛나게 먹을 수 있는 책이다. 책 한 권 다 읽기까지 쉬지 않고 명상에 잠길 수는 없다. 때로 눈길과 손길을 멈추고 마음이 흐르는 결을 살펴보고 바라볼 일이다.
"전통적인 우리네 옛 서화에서는 흔히 '여백의 미'를 들고 있다. 이 여백의 미는 비록 서화에서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끼리 어울리는 인간관계에도 해당될 것이다. 무엇이든지 넘치도록 가득가득 채워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여백의 미가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나 두루 헤아려보라. 좀 모자라고 아쉬운 이런 여백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숨통이 트일 수 있지 않겠는가." - '등잔에 기름을 채우고' 중에서
일일이 소개하지 않아도 될 만큼 법정 스님의 글은 이미 마니아 군을 이룰 만큼 널리 알려졌다. 법정 스님의 글만이 구사해낼 수 있을 법한 생의 맛과 자연을 대하는 품새, 담백하면서도 매끄러운 문체, 솔직하면서도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시선, 군더더기 없는 문장 그리고 조용한 사색의 세계로 마구 이끌고 가버리는 미묘한 선동성.
무엇보다도 그의 글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은 소유자가 무소유자를 바라보는 경외와 선망의 시선을 끌어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무소유적 지향의 삶을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은 독점이 아니라 나눔이며, 받음만이 아니라 줌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인해 아픈 이여. 가진 것 크게 없는 단출하고 담박한 오두막에서 보내는 편지를 받아 정성들여 읽어 볼 일이다. 그러면 마침내 당신 마음이 오두막을 닮아갈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 상처도 회복될 것이다. 꽃향기는 귀만이 아니라 때로 눈으로도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시향(視香)!
덧붙이는 글 | 오두막 편지, 법정(法頂) 지음, 이레 刊, 7,000원, 양장본, 238쪽, 199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