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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성 전 국정원 차장
김은성 전 국정원 차장 ⓒ 연합뉴스
안기부 불법도청 X-파일 사건을 수사중인 검찰이 7일 김은성 전 국정원 2차장(국내담당)에 대해 통신비밀보호법(통비법)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김씨는 지난 7월 검찰이 수사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국정원 수뇌부 인사이다.

이에 따라 X-파일 수사는 김영삼 정부 시절의 안기부 불법도청 '미림'팀 수사로 시작되었으나, 정작 검찰의 칼끝은 김대중 정부 시절의 국정원 간부들을 겨냥하는 형국이 되었다.

이런 상황 전개는 국정원이 지난 8월 5일 "김대중 정부에서도 일부 불법도청이 있었다"고 '고해성사'를 하고, 검찰이 최초로 국정원을 압수수색 할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된 수순이었다. 왜냐하면 김영삼 정부 시절 안기부 간부들의 통비법 위반 혐의에 대한 공소시효(당시 5년)는 이미 완성되었으나, 그 이후 통비법 개정으로 김대중 정부 시절 국정원 간부들의 공소시효(7년)는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직원들이 진술한 '통신첩보 보고서'는 'S 보고서' 지칭한 듯

그러나 검찰도 당초에는 국정원 직원들이 진술을 거부해 수사에 난항을 빚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최근에는 검찰이 전직 국정원 중간간부의 집에서 도청테이프를 1개 압수해 확실한 물증을 확보한 것처럼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당시 내부자료 유출 혐의를 받은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본인의 동의 아래 감청을 자청한 결과라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이 또한 도청증거로 채택될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그러던 차에 김승규 국정원장이 추석 연휴를 전후해 불법감청에 관여한 전 8국(과학보안국) 직원들을 불러 "불법행위를 사실대로 밝히면 사법처리가 되지 않도록 검찰에 협조를 구해놓았으니 자신들이 관여한 불법감청 사건을 한 가지씩만 써내라"고 회유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해서 국정원 감찰실은 20여장의 자술서를 받아 이를 검찰에 이첩했고, 검찰은 이 진술서를 토대로 직원들을 불러 고구마 줄기 캐듯이 처장-단장-국장까지 진술을 확보하고 마침내 6일 김은성 전 차장을 긴급체포한 것이다.

검찰 조사에서 국정원 직원들은 "감청은 주로 자체 제작한 유선중계 통신망 감청장비(R2)를 통해 이뤄졌으며 매일 10건 이상의 내국인간 휴대전화 통화를 감청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특히 이 가운데 중요한 통화 내용은 별도의 '통신첩보 보고서'로 만들어 팀장과 처장, 국장, 차장을 거쳐 국정원장에게까지 보고됐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직원들이 진술한 '통신첩보 보고서'는 국정원 내부에서 흔히 'S(Special) 보고서'로 통용되는 간부 전용 단말기에 뿌려지는 '통신첩보'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진술은 아직 검찰 조사를 통해 공식 확인된 것이 아니어서 논란의 소지가 있다.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모르는 김은성 폭탄의 파괴력은 "대통령의 올바른 판단을 위해 풍부한 정보를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도청을 했다"고 알려진 김씨의 진술이다.

김홍걸씨와 최규선씨를 보좌역으로 둔 권노갑 전 고문 등을 '집중마크'

김씨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그의 진술은 도청을 한 목적이 대통령에게 정보보고를 하기 위한 것이라는 뜻이나 다름없다. 이는 당시 도청으로 수집된 정보가 청와대 보고라인을 거쳐 대통령에게 전달됐을 것이라는 의미로 확대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김 차장 재임기간(00년 4월∼01년 11월)의 전직 국정원장들은 물론, 그 정보가 전달된 것으로 보이는 청와대를 포함한 정치권으로 수사가 확대될 수밖에 없다. 김대중 정부 시절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98. 3∼99. 5) ▲천용택(99. 5∼99. 12) ▲임동원(99. 12∼01. 3) ▲신건(01. 3∼03. 4)씨 중에서 후반 임동원·신건씨가 해당된다.

이와 관련 주목되는 대목은 검찰이 국정원의 감청 실무자들에게서 김대중 대통령의 3남 홍걸씨와 최규선씨에 대해 불법도청을 하도록 지시한 단서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진 부분이다.

김 전 차장은 김대중 대통령 집권 후반기에 통치권의 누수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대통령의 친인척과 이른바 동교동 실세들의 비위 혐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집중관리'했다. 따라서 김 전 차장이 도청을 통해 최규선씨와 가까운 김홍걸씨와 최씨를 보좌역으로 둔 권노갑 전 고문을 집중마크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최규선씨는 2000년 당시 알 왈리드 사우디왕자와 김홍걸씨를 끌어들여 벤처사업을 추진하려 했으나 김홍걸 의원과 김은성 차장의 견제로 무산된 과정을 나중에 공개된 녹취록과 자필 메모에서 이렇게 적시한 바 있다.

"김홍일 의원은 권노갑씨를 만나 '아저씨, 제발 최규선이 보고 홍걸이 회사(벤처 투자회사) 하지 말라고 말해주세요'라고 말했다. 이것은 권 고문이 나에게 전해준 말이다. 특히 김은성 국정원 2차장은 권 고문에게 나와 홍걸씨에 대한 온갖 거짓정보를 보고했다.

당시 갈등구조는 나, 권노갑, 김홍걸, 이희호 여사를 한 축으로 하고 김홍일, 김은성, 정성홍(전 국정원 경제과장)이 반대축이었다. 김은성은 2000년 7월 8일 두차례에 걸쳐 나를 양재동 자신의 안가로 불러, 온갖 협박을 했다. 이후 위의 회사설립 계획은 무산됐지만 나와 홍걸씨는 형제 이상으로 똘똘 뭉쳤다."


야당 정치인과 경제·언론인에게까지 확대되었다면 변명의 여지 없어

이 메모는 최씨가 자신의 입장에서 기술한 것이기 때문에 자의적인 부분이 적지 않다. 특히 "김은성 국정원 2차장은 권 고문에게 나와 홍걸씨에 대한 온갖 거짓정보를 보고했다"는 부분은 논란의 소지가 크다. 실제로 김홍걸-최규선씨를 견제한 또 다른 한축이었던 김은성 전 차장은 2001년 말에 벤처사업가 진승현씨로부터 5천만원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되자 이듬해 4월 재판부에 제출한 탄원서에서 이렇게 호소했다.

"최규선에 대해서는 2년 전(2000년)에 이미 문제점을 종합해 청와대에 보고한 바 있고, 대통령께서는 국정원이 책임지고 최규선을 조치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김홍걸씨나 권노갑씨는 제가 허위정보를 만들어 유능한 사람을 죽이려 한다고 임동원 원장님과 저에게 노발대발했습니다. 심지어 차장을 바꿔야 한다고까지 하여 제가 당시 임 원장께 사의를 표명하고 권노갑씨와 김홍걸씨를 만나 담판까지 지은 적이 있습니다."

김 차장은 실제로 당시 이희호 여사로부터도 좋지 않은 평가가 나온다는 얘기를 전해듣고 임동원 원장에게 사의를 표명했으나 청와대로부터 반려되었다. 최씨는 당시 김은성 차장이 '온갖 거짓정보를 보고'했느니 '허위정보를 만들'었느니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김 차장이 불법감청을 통해 '사실정보'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은성 전 차장도 최근 기자와 가진 비공개를 전제로 한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최규선씨를 옹호하는 홍걸이와 권 고문이 꼼짝 못할 정보를 입수해 대통령께 친전 보고서를 올렸는데, 대통령께서 권 고문을 불러 보고서를 던지며 '어떻게 된 일이냐'고 호되게 질책을 하는 바람에 (정보보고의 출처가 알려져) 권 고문이 내게 전화를 해 노발대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알 왈리드의 돈을 끌어들여 최규선씨와 동업하려던 김홍걸씨의 벤처사업 건은 2000년 6월 청와대 가족회의에서 부결됐다. 당시는 이미 주가가 폭락하던 시점이었다.

김 전 차장은 "만약 그때 내가 아무 일 안하고 눈치만 보다가 홍걸이가 벤처투자에 뛰어들었다면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졌겠냐"면서 "대통령이 '벤처대국' 운운한 게 결국은 아들 도와주려 한 게 아니냐는 비난이 쏟아졌을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김 전 차장은 김옥두 의원 등이 연루된 분당 파크뷰 아파트 특혜분양 건에 개입한 것에 대해서도 국정원 차장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악역'이었다고 말했다.

문제는 대통령의 통치권 누수를 막기 위한 김 전 차장의 '집중관리' 대상이 대통령 친인척과 동교동 실세 정치인의 범위를 넘어서 야당 정치인과 경제·언론인에게까지 확대되었느냐는 점이다. 그럴 경우 김씨의 '충정'은 아무리 변명해도 '범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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