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호 펄 벅은 나를 실망 시키지 않았다. 짧은 글이지만 깊이 있고 안정감 있는 동화다. 아이들이 죽음과 삶을 관조하는 철학적 사유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몹시 궁금하다.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도 가볍게 넘어갈 수는 없을 거다.
키노네 집은 산비탈 층층대를 이룬 논밭을 일구며 산다. 지야네는 그 아래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며 산다. 둘은 친구다. 그들은 평화로웠다.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는 일상을 즐거워 했다. 적어도 그 일이 있기 전엔 그랬다.
그날, 키노는 아버지가 순무를 심는 것을 돕고 있었다. 땅거미가 졌을 때 하늘은 붉게 물들었고 농장의 땅까지 흔들렸다. 화산이 다시 폭발한 것이다. 바다 빛깔은 붉은 회색을 띠어 아름다웠지만, 키노는 그걸 보고 도리어 두려움을 느꼈다.
영주의 성에 깃발이 올랐다. 마을 사람들에게 대비하라는 표시이다. 성벽 안의 대피소로 피하라는 종소리가 언덕 아래로 퍼져나갔다. 키노는 지야를 향해 흰 오비를 흔들었다. 지야는 영주의 성이 아니 키노의 집으로 가족들을 뒤로 한 채 올라 왔다. 가족들은 배를 지키기 위해 남기로 한 것이다.
키노가 막 지야에게 반갑다고 할 때다. 갑자기 돌풍이 바다에서 일어났다. 애원하는 듯한 종소리가 다시 울렸다. 해일이 으르렁거리고 포효하는 소리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마침내 마을을 덮쳤다. 거대한 정적 속에 모든 것이 가라앉았다.
"지야는 다시는 행복해질 수 없을 거예요."
"아냐, 언젠가는 다시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거다. 왜냐하면 삶은 언제나 죽음보다 강하거든. 그렇지만 처음에는 다시는 행복해질 수 없다고 여기겠지. 아마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야 될 거다. 눈물은 우리 몸의 나쁜 감정을 씻어낸단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이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인생이 얼마나 멋진지 알게 될 거야. 잊지마, 폭풍이 온 다음날의 하루는 폭풍 전의 모든 날들보다 더 소중하다는 거."
"언젠가 너는 네가 왜 죽음을 무서워했는지 궁금해 할 거야. 오늘, 왜 네가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했는지를 궁금해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야는 아직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게 누워만 있던 지야에게 어느 날 영주가 찾아온다. 고아가 된 지야를 아들로 삼고자 보러 온 거다. 키노의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다. 아버지는 지야에게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살 것인지, 영주 아들로 살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게 했다. 영주를 만난 지야가 묻는다.
"왜 어르신은 그들을(해일에서 목숨을 구한 다른 사람들) 이 큰 집으로 초대해, 아드님과 따님으로 삼지 않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나는 그들을 내 아들과 딸로 삼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
"너는 밝고, 잘생겼어. 사람들이 네가 이 마을에서 가장 똑똑한 소년이라고 하더구나."
"저는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게 없어요. 제 아버지는 어부일 뿐입니다."
왜, 지야는 영주의 아들이 되지 않은 걸까, 폭풍이 지난 뒤 지야의 인생은 달라졌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삶의 소중함으로 바뀐 것이다. 영주의 아들이 아닌, 어부의 아들로 가족의 죽음을 간직한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한다. 지야는 이제 두렵지 않다. 살아갈 준비가 되었고 삶을 사랑하게 되었다.
"지야 오빠가 왔어!"
그녀가 소리쳤다.
"지야 오빠! 지야 오빠!"
지야는 그녀의 귀여운 얼굴을 보자, 팔을 벌려 꼭 안았다. 처음으로 그는 가슴에 위안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위로는 생명 그 자체와 같은 세쯔(키노의 여동생)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지야는 청년이 되었다. 바닷가에 세워지는 집을 바라보고 서 있자, 지야는 엄습하는 희열을 느낀다. 집짓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며 꾸짖는 영주에게 그는 말한다.
"땅이 심하게 흔들리면, 어르신의 성도 허물어질 겁니다. 이 섬에 사는 우리에게 영원히 안전한 피난처는 없죠. 우리는 용감해요. 왜냐하면 우리는 반드시 용감해야 하거든요."
지야가 사는 섬 뿐만 아니라 지구 어느 곳에도 안전한 피난처는 없다. 우리도 위험이 도사리는 도시를 살지만 피난처에서 웅크리고 살기 보다는 아침마다 버스를 타고 다리를 건넌다. 저녁이면 긴 터널을 건너기 위해 지하철에 몸을 맡긴다. 다가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안락만 추구한다면 오늘의 나를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지야가 폭풍을 겪기 전과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죽음을 일반화 시키지 못한 상태다. 죽음은 타인의 것이다. 오늘을 사는 이유가 치열하지 못함이 거기에 있다. 삶을 즐기기 못하는 것도 거기에 있다.
지야에게 삶의 모든 것이 아름다운 까닭은 가족의 죽음이 함께 하고 있으며, 죽음이 항상 목전을 오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해일이 휩쓸고 지나간 바로 그곳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지야, 역시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이 함께 살던 곳에 집을 짓고 세쯔와 새살림을 꾸린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와 형처럼 배를 지키다 죽진 않을 거다.
"해일이 다시 오더라도 괜찮아요. 저는 대비를 하고 있어요. 저는 그것과 맞설 것입니다. 저는 두렵지 않아요."
펄벅은 대문호답게 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짧은 글이지만 그 곳엔 삶과 죽음이 공존했다. 오래 전 그녀의 사유(思惟)가 오늘의 내게 전해지는 고전의 풍미(風味)를 느낄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 도서제목 : 해일
저 자 : 펄 벅
출 판 사 : 내 인생의 책
리더스 가이드와 알라딘에 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