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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안기부의 불법도청 사건과 관련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정원 청사를 10시간 30분동안 압수수색을 실시한 40여명의 서울중앙지검 압수수색팀을 태운 차량들이 저녁 7시 30분경 국정원 청사를 나오고 있다.
옛 안기부의 불법도청 사건과 관련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정원 청사를 10시간 30분동안 압수수색을 실시한 40여명의 서울중앙지검 압수수색팀을 태운 차량들이 저녁 7시 30분경 국정원 청사를 나오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공식확인 부분' 중 언론이 가장 주목하는 대목은 "대통령을 잘 보필하기 위해"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도청을 자행했다는 주장이다. 언론은 이 주장을 토대로 전직 국정원장들의 개입 의혹, 더 나아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인지 여부까지 뉴스거리로 삼고 있다.

언론이 오늘 보도한 내용은 이런 큰 틀에서 나온 의혹들이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유선중계통신망 감청장비인 'R2'개발에, 천용택 전 국정원장은 이동식 휴대전화 감청장비인 '카스' 개발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보도됐다.

그리고 검찰이 국정원장의 대통령 정례보고 때 배석했던 청와대 비서실장과 정무·외교안보수석들에 대한 수사는 물론,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서면조사를 실시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정권 차원의 도청의혹을 배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동아일보> 등 일부 언론은 김은성 전 2차장이 김대중 정부 실세들에게 도청내용을 제공한 의혹을 제기했다. 또한 이를 뒷받침하듯 장성민 전 민주당 의원은 "김은성 전 2차장이 권노갑 전 민주당 최고위원 퇴진운동을 하지 말라며 정치에 개입한 일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정권 차원의 도청의혹 뿐 아니라 도청내용의 사적 이용의혹까지 제기된 것이다.

짚을 만한 모든 내용을 앞다퉈 보도하면서도 언론은 물길을 잡지 않고 있다. 진실 여부를 확정하기 어려워서 그런지 언론은 대부분 '치고 빠지기' 보도로 일관하고 있다. 이러다보니 꼭 정리해야 하는 '마디'를 놓치고 있다. 이런 것들이다.

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도청 인지 의혹은 사실인가

지난 9월 5일 광주를 방문해 국립5·18묘지를 방문해 묵념을 하고 있는 김 전 대통령.
지난 9월 5일 광주를 방문해 국립5·18묘지를 방문해 묵념을 하고 있는 김 전 대통령. ⓒ 광주드림 안현주
사실 규명의 열쇠는 국정원장이 도청내용을 보고받았는지 여부다. 만약 이 의혹이 사실로 판명날 경우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도청 인지 여부는 큰 쟁점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김 전 대통령은 재임 당시 국정원장으로부터 주례 보고를 받았는데 그 보고 내용이 도청에 의한 것인지 여부를 판단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청의 최대 피해자"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주장이 아직 공명효과를 발휘하고 있긴 하지만, 그 역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정원장이 도청내용을 토대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주마다 정보보고를 했을 경우 그 정보가 도청에 의해 취득된 것인지를 최소한 '추측'할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도청의 최대 피해자"란 이력은 거꾸로 무엇이 도청정보인지를 판별할 경험을 갖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언론은 아직 여기까지 나아가지는 않고 있다. 지난 6일 한나라당 권영세 의원이 분기마다 국정원이 휴대전화 감청승인서를 올리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직접 서명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이 주장을 단독기사로 비중있게 보도한 언론은 거의 없었다.

아직은 도청인지 의혹이 "도청의 최대 피해자"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무친 주장'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② 도청 내용은 정권실세에 보고됐나

국민의 정부 시절 도청의혹 사건에 대해 권노갑 민주당 전 고문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사진는 지난 2003년 국정감사 당시 증인으로 출석한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
국민의 정부 시절 도청의혹 사건에 대해 권노갑 민주당 전 고문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사진는 지난 2003년 국정감사 당시 증인으로 출석한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 ⓒ 오마이뉴스 이종호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언론은 <동아일보>다. 지난주에 국정원의 도청내용이 당시 정권 실세들에게 보고됐다는 의혹을 제기한 <동아일보>는 오늘자에선 대공 첩보까지 정권실세들에게 보고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같은 의혹은 장성민 전 민주당 의원이 어제 김은성 전 2차장의 정치개입 의혹을 제기하면서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동아일보>가 도청내용을 보고 받은 당시 정권 실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목한 권노갑 전 민주당 최고위원과 김은성 전 2차장의 행적이 여러 곳에서 겹치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김은성 전 2차장이 장성민 전 의원에게 "손 떼라"고 요구한 사안이 다름 아닌 당시 민주당 소장파들의 '권노갑 최고위원 퇴진운동'이었다는 점, 김은성 전 2차장이 발탁될 수 있었던 데 권노갑 전 최고위원의 힘이 적잖이 작용했다는 점 등이 종합되면서 '김은성→권노갑' 라인에 대한 의혹의 시선을 언론은 거두지 않고 있다.

언론이 제기한 이같은 의혹은 안기부 미림팀이 오정소 당시 안기부 2차장을 매개로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차남 현철 씨와 이원종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을 위해 '봉사'했다는 의혹과 쌍둥이처럼 닮아있고, 그래서 더 심각하다.

안기부·국정원의 공조직 개입 여부는 차치하고, 정보기관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정권의 실세들에 의해 사적으로 활용됐다면 그 활동 목적에 '사적 용도'가 개입돼 있었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술자리에서 현철씨를 비판한 박관용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견제구를 받고, 권노갑 전 최고위원 퇴진운동을 벌이던 민주당 소장파 의원들이 '협박성 경고'를 받은 사례는 그것을 웅변한다.

③ 검찰 수사는 공평하게 진행되고 있는가

검찰발 도청관련 뉴스를 보면 뚜렷한 특색을 보이고 있다. 안기부 도청행위에 대한 뉴스보다 국정원 도청행위에 대한 뉴스가 좀 더 풍부하고 고급이라는 것이다.

미림팀장 공운영씨에 대한 수사를 전후해 안기부 도청행위에 대한 뉴스가 쏟아지긴 했지만, 그 이후론 잦아들기 시작했다. 특히 공운영씨의 '윗선'이란 의혹을 받았던 오정소 전 2차장, 김현철·이원종 씨에 대한 수사과정에서는 이렇다 할 뉴스가 나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미림팀의 도청이 정권 차원에서, 즉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인지 아래 이뤄졌는지 여부는 고사하고 전직 안기부장들의 인지 여부조차 큰 이슈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국정원 도청행위 뉴스는 다르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진 것인가?

형식과 절차만 놓고 보면 그럴 법도 하다. 안기부 건의 경우 구속된 사람 중 핵심 인물이 되는 사람은 공운영씨다. 반면 국정원 건의 경우 김은성 전 2차장이다. 이에 따라 보도의 출발점이 되는 구속영장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다. 즉 도청 경위와 활용 범위 등에서 일개 팀장과 2차장의 진술 내용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다가 김은성 전 2차장이 검찰 구속조치에 반발하면서 입을 열고 있기 때문에 뉴스거리가 더 생산되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이건 결과론이다. 이 대목에서 단순화해서 물어야 하는 건 이것이다.

검찰은 왜 김은성 전 2차장은 구속하면서 오정소 전 2차장에 대한 사법처리 결과가 다른 이유가 뭔가? 그것이 이른바 '증거' 때문이라면 안기부에 대한 수사가 상대적으로 미진한 이유는 뭔가? 또 하나. 김은성 전 2차장 수사내용은 흘러나오면서 오정소 전 2차장 수사내용은 통제된 이유가 뭔가?

이 궁금증은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에서나 풀릴 것이다.

④ 검찰의 도청은 누가 수사하나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사앞 검찰 깃발.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사앞 검찰 깃발. ⓒ 오마이뉴스 권우성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안기부와 국정원의 도청행위를 수사하는 검찰의 '자격'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일보>는 검찰이 도청장비 103대를 보유한 바 있다고 보도했다. 또 <서울신문>은 '진승현 게이트' 수사 때 김은성 전 2차장의 개입을 계기로 국정원의 도청을 인지한 검찰이 김은성 전 2차장에게 세 차례에 걸쳐 "처벌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 적이 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에서 두 가지 의혹을 추출할 수 있다.

하나는 검찰이 보유했던 103대의 도청장비가 모두 합법감청에 쓰였는가 하는 의혹이다. 이 의혹은 검찰도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했을 개연성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진다.

또 하나는 검찰의 직무유기 의혹이다. 검찰이 국정원의 도청 사실을 알고 세 차례에 걸쳐 "처벌할 수도 있다"고 경고를 한 게 사실이라면, 이는 명백히 불법 도청행위를 눈감아 줬다는 얘기가 된다. 결국 처벌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검찰에 쏠리는 의혹의 시선이 적지 않은데도 검찰은 도청행위에 대한 수사를 '독점'하고 있다. 언론 보도는 거의 대부분 이 '독점 시장'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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