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크리스티안 슈파첵(Christian Spatzek)은 누구인가. 그는 오스트리아의 연극배우이자 영화배우다. 1997년에 한국여성 윤선영씨와 결혼해 아들과 딸을 두었다. 김치와 매운탕을 좋아하는 그는 하루 세끼를 한식으로 먹으며 주말에는 한국교민들이 자주 가는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고 가끔 골프도 함께 친다. 그는 장난을 치거나 과장해서 말하는 한국친구들에게는 "뻥치지 마"라고 말할 정도로 한국화(?)되었다.
그런 그에게는 니콜라스 케이지, 웨슬리 스나입스, 우디 앨런과는 차별된 무언가가 있다.
크리스티안은 그의 부인 선영씨, 그의 여동생이자 배우인 안드레아(Andrea Spatzek)와 함께 2004년 '쌀과 놀이'(Reis & Spiel)라는 자선단체를 설립해 북한의 아이들을 돕고 있다. 할리우드 배우들이 벌어들이는 어마어마한 소득에 비하면 그들의 자선금은 소박함에 다름 아니지만 이런 행위를 행동으로 옮긴다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슈파첵 가족은 어떻게 이런 일을 시작하게 됐을까.
우리의 만남은 한 편의 영화
1991년, 의상디자인을 공부하기 위해 비엔나에 온 선영씨와 크리스티안의 만남은 마치 영화 같았다. 92년 카니발 '파슁'(Fasching,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축제) 때 한국인 친구와 함께 시내를 산책하던 선영씨는 끈질기게 쫓아오는 서너 명의 남자들로부터 도망치게 됐는데, 이 때 크리스티안이 나타나 남자들을 쫓아내고 선영씨 일행을 구해준 것. 그들의 연애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선영씨의 부모님은 크리스티안이 외국인인 데다가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특히 배우라는 특수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로 이들의 결혼을 반대했다. 부모님을 설득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이들은 결혼에 골인했고, 누구보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특히 의상을 전공한 선영씨는 가끔씩 크리스티안의 무대의상 작업을 하기도 하며 둘의 차이를 '공통점'으로 만들어 나갔다.
사실 크리스티안은 선영씨를 만나기 전부터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 대학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를 통해 김치, 불고기, 88서울올림픽 게임을 비롯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었다. 크리스티안은 선영씨가 의상디자인 학업을 마치고 한국에 귀국했을 때에는 선영씨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기도 했다.
평소에도 금발보다 어두운 색 머리의 여자들을 좋아했다는 크리스티안의 '내 사랑 선영' 스토리가 계속되자 선영씨는 "평생 김치를 공짜로 먹고 싶어 나와 결혼했을 걸요"라며 짓궂은 농담을 한다. 이어지는 크리스티안의 "뻥치지 마"라는 한국식 '받아치기'.
남미로 가려던 기부금이 북한으로 가게 된 사연
크리스티안의 동생 안드레아는 독일에서 활동하는 배우로 <린덴슈트라세>(Lindenstrasse)라는 인기 시리즈물에서 열연하고 있다. 그녀는 몇몇 독일 쇼에서 상금을 받기도 했는데 자선목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이 상금을 보낼 곳을 찾다가 몇 군데를 후보로 떠올렸다.
안드레아는 당초 오빠인 크리스티안과 함께 남미어린이들을 돕는 자선단체에 상금을 기부하려고 계획했다. 크리스티안의 지인이 그 단체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슈파첵 가족은 어느 날 TV를 통해 북한의 굶어죽는 아이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고, 이 다큐멘터리는 슈파첵 가족을 감동시켰다. 선영씨나 북한의 굶어죽는 아이들 모두 같은 민족, 한국 사람이었다. 슈파첵 가족은 남미의 아이들보다 북한의 아이들을 돕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해 독일의 자선기구인 DWH(Deutsche Welthunger Hilfe: 독일 세계기아 구조)를 통해 작년 처음으로 상금을 기부했다.
DWH는 북한에 지부가 있으며 직접적으로 봉사활동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다른 봉사단체들과는 두드러진 차별성을 갖고 있다. 때문에 기부금이 어떤 명목 하에 쓰였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런 인연으로 북한의 어린이들을 돕기 시작한 슈파첵 가족은 작년 동생인 안드레아와 부인 선영씨와 함께 '쌀과 놀이'라는 자선단체를 설립했다. '쌀과 놀이'의 첫 행사는 북한어린이들을 돕는 자선콘서트였고 두 번째 행사는 올해 봄의 자선골프대회다. 슈파첵 가족은 이 두 행사를 통해 총 6만 유로(약 8천만 원)를 DWH에 송금했다.
선영씨는 "두 아이의 엄마인 데다가 한국 사람으로서 북한의 아이들이 굶고 있다는 게 너무나 마음 아프게 다가왔다"며 "기부와 자선행사는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비엔나에 한국 전통가옥 짓고 싶다
슈파첵 부부에게는 꿈이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배우 아널드 슈워제네거처럼 주지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할리우드에서 성공해 전용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화려하게 방문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비엔나에 한국의 전통 가옥을 직접 짓고 싶어 한다. 바닥은 온돌로 깔고 지붕에는 우아한 기와를 올리고 처마에는 풍경이 달린 그런 전통적인 한국 가옥 말이다. 건축 재료도 구하기 쉽지 않고 운반비도 만만치 않을 텐데, 왜 이런 꿈을 갖게 된 걸까.
"나는 진정으로 한국을 사랑한다. 한국의 전통가옥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한국 전통가옥을 비엔나에 짓고 일반 시민들에게 개방하면 한국에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다. 그들은 신발을 벗고 집에 들어오는 순간 한국문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 한국이 오스트리아에 알려지고 오스트리아도 한국에 알려지면 양국간에 문화교류가 더 활발해질 것이다. 내 집에 들어오는 손님들한테 한 1유로(약 1200원) 정도를 입장료로 받으면 대강의 유지비는 맞아 떨어지겠지?"
희극배우처럼 마지막을 유머러스하게 장식하는 크리스티안의 대답이다.
기회가 닿으면 한국의 연극과 영화, TV물에서 꼭 한번 연기를 하고 싶다는 크리스티안은 이미 2001년도에 혜화동 알과핵 극장에서 상영된 <쥐사냥>이라는 연극에 출연한 바 있다. 한국말을 읽고 받아쓸 줄 아는 크리스티안은 지금도 한국어 회화를 배우는 중이다.
아이들 옷을 판매하는 작은 가게를 경영하는 선영씨와 비엔나와 잘츠부르크를 오가며 연기활동을 하는 크리스티안. 크리스티안은 오스트리아 내에서도 아주 유명한 배우는 아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명성'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사랑뿐"이라는 말처럼 '사랑' 그 자체다.
슈파첵 부부는 깃털 색깔은 다르지만, 공동가치를 실천하기 위해 서로 마주보고 있는 한 쌍의 잉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