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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중관촌에 내걸린 "과학 기술은 최고의 생산력이다"는 구호.
베이징 중관촌에 내걸린 "과학 기술은 최고의 생산력이다"는 구호. ⓒ 김대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으로 외국에 있던 중국의 과학자들 약 2000여 명이 대거 귀국하고 1957년까지 추가로 1000여 명의 유수한 과학자들이 중화애국주의로 똘똘 뭉쳐 귀국하면서 중국은 기초과학분야의 인력자원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여기에 건국 이후 국비로 파견했던 소련 유학생들까지 가세하면서 과학 분야의 막강한 인력풀을 형성할 수 있었다.

고립무원의 외교 위기를 타파하기 위한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합쳐지면서 중국의 과학기술은 괄목상대할 만한 수준으로 발전하게 된다. 스푸트니크 충격 이후 미국이 최초로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고 우주항공분야에서 소련을 추월했던 것처럼 중국의 분발과 성장 또한 놀라운 것이었다.

1961년 최초 단거리 액체탄도미사일 발사실험에 성공한 데 이어 1964년 10월 16일에는 소련의 지원 없이 원자폭탄실험에 성공했다. 그 후 1967년 6월 17일에는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하더니 1970년 4월 24일에는 최초의 인공위성 동팡홍(東方紅) 1호를 발사하기에 이른다.

중국이 자력으로 개발한 원자폭탄, 수소폭탄, 인공위성은 '량단이싱(兩彈一星)'으로 불리며 마오쩌둥 시대 중국사회주의의 선진성과 자주성을 홍보하고 정치군사상 세계에서 막강한 위상과 영향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중국인민들에게 대대적인 선전 도구가 되었다.

중국은 1970년 이후 2000년까지 12종의 청정(長征)시리즈 로켓과 선저우(神舟)1호 발사에 성공하더니 드디어 2003년 10월 15일 세계에서 셋째로 유인우주선 선저우5호 발사에 성공해 온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중국은 또 90%에 달하는 발사성공률과 저렴한 발사 비용으로 외국의 상업용 로켓 27개를 대신 발사해 주는 등 항공산업분야에서 최고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오는 10월 13일 2명의 우주비행사를 태운 두번째 유인우주선 선저우6호의 발사를 눈앞에 두고 있다.

중국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선저우 7, 8호에 이어 2020년까지 달 탐사 계획 '창어(嫦娥) 프로젝트'와 화성탐사 계획인 '수왕싱(雙星)프로젝트'를 완성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밝히고 있다.

중국의 과학기술 연구의 방향도 군수와 우주항공산업에서 IT, 생명공학, 자동차 등 상업과 산업분야로 옮겨져 세계 선진 각국을 긴장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의 높아진 과학기술은 이제 사회주의체제의 우월성 과시와 체제 홍보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넘어 중국 경제 도약의 중심축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데일리차이나]는 그날 그날의 중국 근현대 소사(小史)를 전하며 중국 역사 속의 오늘의 의미를 되새겨 보려고 합니다. 이 글은 국정넷포터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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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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