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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읍 하송리 소재 열녀각
강원도 영월읍 하송리 소재 열녀각 ⓒ 이기원

과거 우리의 역사 속에서 남편을 사별할 경우 그 부인이 따라 죽는 것을 미덕처럼 여기던 때가 있었습니다. 남편이 죽었을 경우 비통해서 음식을 거부하고 죽음을 맞이한 여인에게는 열녀라는 수식어가 붙어 열녀문을 세워줬습니다. 이런 남성 중심 사회에선 미망인을 죽어야 할 사람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 정도로 여겼던 것입니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원주 사람 조씨는 남편이 죽은 뒤 죽은 시신을 끌어안고 1주일을 지냈으며, 음식을 먹지 않은 채 15일을 지냈다. 주위에서 조씨의 상태를 염려해서 재혼을 시키려 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슬피 울며 지냈다. 결국 얼마 뒤에 조씨는 혼서(婚書)와 남편이 읽던 책 두 권을 끌어안고 목을 매어 자결했다. 이러한 사실이 중앙에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좋은 풍속을 권장한다는 명목으로 조씨의 절개를 기리라는 명을 내렸다. <국역 조선왕조실록 성종 5년 참조>

살아 있는 사람에게 죽음을 강요할 정도로 철저했던 남성 중심 사회의 관습 속에서 미망인이란 이름으로 많은 여성들이 죄인처럼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슬픈 과거의 유산이 '말'로 남아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성이 남성의 종속물처럼 여겨졌던 게 언제부터일까요? 성리학적 가치가 확산되었던 조선 중기 이후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여성도 부모의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고, 딸도 부모의 제사를 지낼 수 있었으며, 여성들의 재혼도 가능했고, 결혼 후 사위가 처가에서 생활하기도 했던 모습이 성리학적 가치의 확산 때문에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삼종지도, 칠거지악, 출가외인 등의 굴레가 여성들에게 씌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제약은 때로는 여성들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기도 했습니다.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어야할 존재가 되어버린 미망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에 종속되어 사는 것처럼 불행한 게 없습니다. 관습이나 제도에 의해 강요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던 사회 속에서의 미망인이 그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열녀라는 말로 과대 포장되고 미풍양속이란 말로 미화되었던 과거의 모습 중에서 삶의 주체가 아닌 종속된 삶을 강요당했던 많은 여성들의 슬픈 모습이 확인됩니다. 미망인이란 말을 통해서 그 아픈 과거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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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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