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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 성악은 기악 쪽보다 조금 더 어려운 것 같다. 일단 체력에서 밀린다. 체력이 달리고 성량이 달리니까 출발점부터 다른 셈이다. 체력과 성량이 어느 정도 뒷받침된다고 해도 언어 문제가 가로막는다. (중략) 음악성이 뛰어나고 체력 관리도 잘하고 서양 언어에도 능통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장벽은 또 있다. 마치 연극배우들처럼 얼굴 하나로 기쁨, 슬픔, 고통, 놀라움, 고마움, 미움 등의 온갖 감정을 표현해 내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줄은 몰랐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소프라노 조수미는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서양인과 한국인의 차이를 이렇게 털어 놓았다. 물론 이런 차이 때문에 한국인만의 독특한 소리가 나온다고 덧붙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 최근 리노베이션을 한 '슈타츠오퍼' 외부 모습.
ⓒ 배을선
1990년대에는 세계 3대 테너라고 하면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를 꼽았다. 음악의 대가들이 세계 3대 오페라 극장으로 밀라노의 '라 스칼라', 비엔나의 '슈타트오퍼',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을 꼽을 만큼 오페라는 서양, 특히 유럽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서양인들의 틈바구니를 뚫고 세계 3대 오페라 극장 중 하나인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슈타트오퍼(비엔나 국립오페라)에서 전속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이 있다. 이곳의 유일한 한국인 전속 가수 심인성(30)씨.

한국 사람들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심씨는 이미 <사랑의 묘약> <토스카> <빌리 버드> <살로메> 등 굵직굵직한 무대에서 단련된 베테랑이다. 유럽인들 틈바구니에서, 이끌어 주는 선배 하나 없이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의 행로는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10월초, 심씨의 노래에 대한 열정과 성공담, 슈타트오퍼에서의 생활 등을 듣기 위해 오스트리아 슈타트오퍼 근처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유학 후 첫 번째 오디션 "공부 더해라"

▲ 심인성씨.
ⓒ 배을선
- 언제부터 성악을 시작했나? 비엔나에 오기 전까지의 경력을 간략히 소개해 달라.
"13살 때부터 성악을 시작했고 한국예술원 1회 졸업생이다.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오디션을 거쳐 모집하는 신인 오페라 가수가 되면서 사실상 데뷔했다. 그때 작품이 <결혼청구서>라는 작품이었는데 '밀'이라는 주역을 따냈다.

97년 <라보엠> 공연을 위해 싱가포르에서 한 달 가량을 체류하다가 이탈리아에서 활동 중인 다른 한국인 가수를 만났는데, 이탈리아로 유학 가고 싶다고 했더니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추천해 줬다. 내가 오페라뿐 아니라 독일 가곡에도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아버지께서는 유학을 반대하셨는데 IMF가 터지자 갑자기 유학을 보내 주셨다. "

- '슈타트오퍼'의 전속가수가 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을 것 같다.
"98년 3월에 비엔나에 도착했는데 독일어를 잘 하지 못해 막막했다. 처음엔 컨저바토리움 비엔나에서 <여자는 다 그래>(Cosí fan tutte)라는 작품의 '돈 알폰소' 역을 맡았는데, 같이 출연한 동료 배우의 아버지가 당시 슈타트오퍼의 지휘자였다. 그 분이 '오디션을 보러 오라'고 하기에 오디션을 보러 갔는데 노래를 들어 보더니 '공부를 더하라'고 했다. 오디션에 떨어진 거다.

이후 벨베데어 콩쿠르에서 입상해 장학생으로 프랑스에 유학을 가게 됐다. 프랑스에서 1년 머물렀는데 그때가 정말 힘들었다. 내 생애 가장 힘든 슬럼프였다. 노래가 잘 안 불려지고 목소리가 안 나왔다. 다른 친구들이 쟁쟁한 오페라 극장에 전속가수 등으로 계약돼 나갈 때 나는 모든 오디션에서 다 떨어졌다. 그러다가 다시 한 번 비엔나의 슈타트오퍼 오디션에 시도했는데 합격했다. 그 길로 프랑스 생활을 청산하고 비엔나로 돌아왔다."

"한국인 노래 뛰어나지만 주역 따긴 힘들어"

▲ 심인성씨가 <둘카마라>에서 열연하는 모습.
ⓒ 심인성
- 유럽인들에게도 슈타트오퍼의 전속가수가 되는 건 쉽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오페라 가수는 노래 실력뿐 아니라 외모도 꽤 중요하다고 하던데 서양인과 다른 외모 때문에 어려운 점은 없었나?
"일단, 한국인은 정말 노래를 잘한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한국 성악 가수들의 노래를 들어 보면 목소리가 (다른 유럽가수들과) 다르다.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다. 한국인은 소리가 뛰어나다고…. 나는 베이스(가장 낮은 음역)가 전문인데, 실제로는 음역이 다양한 편이다. 때문에 베이스도 하지만 베이스바리톤도 가능하고 바리톤까지 커버할 수 있다.

아마도 극장 쪽에서 심인성 한 명을 뽑으면 세 명(베이스, 베이스바리톤, 바리톤)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매우 계산적인(?) 생각에서 나를 뽑은 게 아닌가 싶다(웃음). 나는 키가 183cm로 동양인 가수치고는 매우 큰 키다. 이런 큰 키가 장점으로 작용한 것 같다."

- 동양인이 주역을 맡는 것은 아직도 한계가 있나?
"사실 그렇다. 지금은 라디오 시대가 아니라 비주얼 시대다. 아무리 노래를 잘해도 로맨틱한 유럽 오페라의 남자 주인공 역에 코 낮고 눈 작고 키 작은 동양 남성을 세울 수는 없다.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고전극에 아무리 노래를 잘한다 해도 백인, 혹은 흑인 남성을 주역으로 세우기는 힘들지 않나. 가능하다고 해도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이곳 사람들은 오페라가 자기들의 전통 문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역만큼은 '자존심'이라 생각하며 자기네 인종에게 주고 싶어 한다. 슈타트오퍼의 음악 감독이 나에게 솔직하게 말하더라. 동양인들은 (캐스팅되기가) 두 배 이상 힘들다고. 인정할 거 다 인정한다. 그러나 좌절할 수는 없지 않나."

쟁쟁한 오페라 가수들... 공연 전 연습은 두 번뿐

▲ 오스트리아 비엔나 오페라극장 '슈타트오퍼'내부. 이 극장은 거의 매일 매진이어서 시작 3시간 전부터 입석으로라도 오페라를 보려고 줄을 서는 400~500명의 사람들로 붐빈다. 입석료는 2유로~3유로 50센트(2천5백원~4천원).
ⓒ 배을선
- 세계적인 오페라 극장과 한국의 그것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한국은 오페라 시즌이 일 년에 잠깐인 데 반해, 비엔나에서는 1년 365일 중 300일 동안 오페라 공연이 열린다. 한국에서는 오페라 스케줄이 잡히면 석 달 전부터 연습과 리허설을 반복한다. 연습 시간이 무대에 오르는 진짜 오페라 시간보다 더 길다. 슈타트오퍼에서는 오케스트라는커녕 리허설도 없이 피아노의 반주에 맞춰 2번 연습하는 게 전부다.

처음 전속 가수로 계약을 하고 스케줄을 받았는데 바로 이틀 후에 공연이 있었다. 물론 단역이었지만 딱 2번 피아노 건반에 맞춰 연습한 게 전부여서 너무 황당했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슈타트오퍼에서 노래 부르는 가수들이 워낙 쟁쟁한 베테랑 선수들이어서 연습이 그리 필요치 않은 거였다. 물론 이곳에도 프리미어 공연에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총리허설을 한다."

▲ 심인성씨 공연모습.
ⓒ 심인성
- 스케줄은 어떻게 잡히나?
"스케줄은 보통 1년 단위로 잡힌다. 그러나 주역을 맡을 경우 4, 5년 전부터 스케줄이 내려온다. 전속 가수는 아무리 대단해도 주역과 단역, 혹은 조역을 번갈아 가면서 맡는다. 나의 경우 2009년에 주역을 맡게 된다. 지금은 단역과 조역을 번갈아 가면서 하고 있다."

- 오스트리아나 독일 등에 음악 유학생이 매우 많다. 중고등학교 입학을 위해 오는 조기 유학생부터 대학과 대학원 진학을 위해 오기도 한다. 이곳의 수준이 한국보다 훨씬 나은가. 정말로 유학이 필요한 건가.
"한국에선 유학이 최고 아니면 최선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한국의 음악 교수진은 정말 세계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다. 한국의 음악 수준이 높기 때문에 대학교 교수진의 수준도 같이 따라가는 거다.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정말 해외에 나오고 싶다면 한국에서 배우고 나서 프로페셔널 할 때 와라.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서나 직업을 갖기 위해 유럽에 오는 것이 여기에서 배우고 한국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다만, 유럽에 와서 무언가를 하고 싶다면 언어를 확실하게 배워라. 음악 하는 학생들의 공통점이 '음악 하니까 언어는 별로 안 해도 되겠지'라는 마인드가 있다는 거다. 말을 잘하면 친구를 사귈 수 있고 사람들과 넓게 친해질 수 있다. 그런 와중에 좋은 기회도 올 수 있다. 나는 영어, 독일어와 이태리어, 불어를 조금씩 한다. 동양인 성악가가 불어를 하는 경우는 드물어서 나 같은 경우는 조금 하는 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경외심 어린 눈길을 받는다. 음악으로 유럽에서 성공하고 싶으면 언어를 배우는 데도 게으르면 안 된다."

삼성, 슈타트오퍼 후원하지만 체감하기 어려워

- 슈타트오퍼의 공식 후원사 중 한 곳이 삼성이다. 심인성씨가 유일한 한국 출신 전속 가수인데 삼성 쪽에서 특별히 후원하는 부분은 없나?
"전혀 없다. 삼성 쪽 사람은 만난 적도 없다. 날 위해 특별히 스폰서 해 달라거나 돈을 달라고 하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적어도 삼성이 후원하는 곳에 한국 예술인이 있다면 신경을 더 쓸 수는 있지 않나 싶다.

▲ 매달 무료로 배포되는 오페라 공연 계획표에 언제나 실리는 삼성의 광고. 삼성은 일본의 '렉서스' 와 함께 비엔나의 '슈타트오퍼'를 후원한다. 7. 공연모습
ⓒ 배을선
언젠가 일본인 음악 감독 세이지 오사와가 <마농 레스꼬>를 지휘할 때 무대 위로 '렉서스' 차가 돌연 나타났다. 당시에는 슈타트오퍼의 공식 후원사였던 렉서스가 '해도 해도 너무한 광고를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상부상조였다. 렉서스가 후원하는 곳이 표면적으로는 슈타트오퍼로 보이지만 사실 렉서스는 브랜드 이미지와 일본, 그리고 일본인 예술가를 동시에 후원하면서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거기에 비하면 삼성의 광고는 브랜드 이미지에 집중되어 있다. 삼성뿐 아니라 현대, 기아, LG 등의 한국 대기업들이 유럽에서는 점점 명성을 쌓고 있는 시점이다. 대기업들이 제품을 홍보하는 행사에 한국 예술인들을 초청하면 한국과 한국 예술, 그리고 한국 제품을 동시에 홍보할 수 있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대기업의 더 적극적인 예술 후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 음악가와 결혼했다고 들었는데.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아내와 2002년 결혼했다. 그 당시에도 비엔나극장에서 전속가수로 일하고 있는 중이라 2주 휴가를 내고 한국에 부리나케 가서 결혼식을 올렸다. 아들은 이름이 수빈이다. 비엔나에서 태어나서 일부러 '빈'(독일어표기 Wien)자를 이름에 넣었다. 부모님께서 손자의 사주팔자를 보셨는데 이 녀석도 목소리로 성공한다고 한다. 음악교육을 시켜볼 생각이다."

- 오페라 가수로서의 목표는 무엇인가. 앞으로도 계속 비엔나에 머물 생각인가.
"사실 가장 원하는 것은 한국에 가서 노래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는 오페라 시즌이 있어서 그 때가 아니면 노래를 부를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 오페라뿐만이 아니라 클래식 음악이 더 많이 활성화 될 필요가 있다. 한국의 클래식음악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 그런 목적을 가지고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자 한다. 정말 매일매일 열리는 한국의 오페라극장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다."

세계 3대 오페라극장을 말한다

세계의 유명한 오페라 대가들은 "나는 3대 극장에서 모두 노래를 해봤으니 소원이 없다"고 말한다. 이 대가들이 말하는 3대 극장이란 이탈리아 밀라노의 '라 스칼라',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슈타트오퍼',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이다.

일각에서는 슈타트오퍼 대신 영국 런던의 '코벤트가든'을 세계 3대 오페라극장으로 꼽기도 하는데 코벤트가든에서는 오페라 시즌에만 오페라를 상영하지만 슈타트오퍼는 문을 여는 300일 중 한달에 3~4번 있는 발레 공연을 제외하고는 매일 오페라 공연이 열린다. 이밖에도 유럽에는 함부르크, 베를린, 취리히 등 수없이 많은 유명한 오페라 극장이 있다.

라 스칼라: 이탈리아 밀라노에 위치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오페라극장으로 정식 이름은 '떼아뜨로 알라 스칼라(Teatro Alla Scala)'로, 계단 극장이라는 뜻이다. 1776년 당시 이탈리아를 식민 통치하던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황제가 불타 버린 극장 자리에 지금의 라 스칼라를 지었다. 라 스칼라는 오페라 가수들 사이에서는 '명예의 전당'으로 불린다.

슈타트오퍼: 1869년 5월 15일 모차르트의 <돈지오바니>의 공연을 초연으로 문을 연 슈타츠오퍼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소되어 재건축되기까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에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비엔나의 주요 건물들이 많이 파괴됐는데 오페라 극장 없는 클래식 음악의 도시 비엔나를 견딜 수 없었던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기부로 비엔나 시청보다 더 먼저 재건립됐다. 슈타트오퍼는 프랑스 파리의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 이탈리아 밀라노의 라 스칼라와 함께 유럽의 3대 오페라 극장으로 불린다.

메트로폴리탄: 미국 뉴욕의 링컨센터에 위치한 미국의 대표적 오페라 극장. 1883년 뉴욕 서39번가에서 개장했으나 20세기 중반 R. 빙 감독 때 지금의 링컨센터로 이전했다. 뉴요커들은 이 극장을 줄여서 '메트'라고 부른다. 오페라 가수들에게 있어 메트로폴리탄은 글로벌 가수로 클 수 있는 무대로 여겨지고 있다. / 배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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