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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환과 이문세에 한창 빠졌던 중고등학교 시절엔 라디오 듣는 재미로 그 시절을 보냈던 듯하다. 마이클 잭슨의 'Bad'를 'Bed'라고 잘못 신청해 진행자를 웃게 만들기도 했지만, 아무튼 집에는 '팝송 명곡' '분위기 있는 팝송' 등 제멋대로 이름을 붙인 녹음테이프가 뒹굴곤 했다.

그러한 취미는 20대 초반 학교 앞 음악다방으로 옮겨갔다. 친구들과 몰려가 쪽지에다 나름대로 멋을 부린 사연과 곡을 적었더랬다. 커피를 좋아하지 않던 내가 다방에 간 것은 순전히 음악을 듣기 위해서였는데 특히 디스크자키의 '빠다 바른' 멘트 듣는 재미가 쏠쏠했다. 게다가 같이 간 친구가 "야 좋다. 무슨 노래야"라고 묻기라도 하면 대단히 큰일이라도 한 것처럼 우쭐했으니.

그러나 그런 호사스런 취미는 오래가지 못했다. 음악다방은 곧 커피숍에 자리를 내줬고, 술집에 밀려났다. 그리고 내 기억에서도 사라졌다.

다방을 내 기억으로 다시 끌어올린 건, 올해 EBS가 방영한 드라마 <지금도 마로니에는>을 보면서였다. 김승옥 김지하 김현은 수시로 대학로 앞 '학림다방'에 모여 문학과 인생을 논했다고 하고, 전태일은 은하수 다방에서 동화시장 여공들의 처우개선을 고민했었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수많은 김수영들과 김민기들이 눙치고 앉아있었을 명동과 종로의 음악다방들은 모두 어떻게 됐을까. 이미 사라졌거나 남아있다고 해도 그 옛날의 분위기를 아직까지 지니고 있는 곳은 드물겠지만 그래도 현대사의 한 켠을 장식했던 곳들이 아닌가. 그 시절 지식인, 노동자들의 고민이 시작됐던 곳이 바로 다방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무작정 그 옛날의 다방을 찾아 나섰다. 이 글은 다방을 중심으로 한 한국 현대사의 단편이다.

최초의 다방은 1927년 '카카투'

<환상박물관-이미지와 도상으로 읽는 문화사>에 보면 우리나라 다방의 시초는 1927년 영화감독 이경손이 관훈동에 연 '카카투'다. 그 뒤 1933년 시인 이상이 요양차 들렀던 배천 온천에서 만난 기생 금홍이를 마담으로 두고 종로에 다방 '제비'를 차리기도 했다.

▲ 2004년 7080 충장로 축제에 등장한 DJ박스와 디스크자키(사진 왼쪽). 2004년 7080 충장로 축제에서 재현된 과거 음악다방.
ⓒ 김대홍
최재봉이 쓴 <간이역에서 사이버스페이스까지>를 보면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신한 문인들은 다방 '밀다원'과 '금강다방'에서 만나 서로를 위로했고", 이덕희는 친구 전혜린을 '학림다방'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다. 남대문로 2가 문예빌딩에 있던 문인들이 많이 모였던 '문예싸롱'에서는 문예잡지 '문예'를 발간하기도 했다.

1950년대 단골다방을 중심으로 모이던 문인들은 '모나리자'파와 '문예싸롱'파로 나뉘었고, 그곳에선 음악회, 미술전시회, 연극과 영화상영회가 펼쳐지기도 했다. <격랑과 낭만>의 저자 김시철에 따르면 당시 문화인들마다 모이는 명동지역 다방이 따로따로였다고 한다. 가톨릭 문인들은 '청동', 음악애호가들은 '돌체', 영화인들은 '나일구' 다방을 이용하는 식이었다.

6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음악다방이 줄줄이 문을 열기 시작했고 젊은이들의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1970년대는 음악다방의 전성기였다. 기름진 목소리로 유명 팝송과 클래식을 틀던 DJ들은 요즘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고, 사람들은 다방에서 최신 문화를 받아들였다. 한때 개그맨이었던 서세원이 퍼트린 유행어 "오늘은 왠지~"는 바로 그 시절 음악다방 DJ의 고정 멘트였다.

음악다방은 돈 없는 예술가 지망생들에게 따뜻한 안식처였다. 윤이상의 제자인 지휘자 김홍재는 가난했던 대학 시절, 악보를 사는 날이면 어김없이 음악다방에서 커피 한 잔 시켜 놓고 신청곡을 들었고, 시인 신경림은 학교 대신 '르네상스'로 출근했다. 만화가 허영만은 지금의 부인인 이명자씨와 명동 '마로니에'에서 데이트를 즐겼다. 통기타 세대들은 명동 심지다방(뒤에 오비스케빈)에 모였다.

소설가 성석제는 "20대였을 때 가던 다방은 대체로 '음악다방'"이었다며 당시 음악다방을 디스크자키가 팝과 가요를 트는 음악다방과 서양 고전음악이 나오는 클래식 음악다방으로 나누었다.(<즐겁게 춤을 추다가> 중)

1970년대 명동에서 음악다방 쉘부르를 경영하기도 했던 DJ 이종환이 "두 집 건너 부동산업소가 늘어서듯 한때 두 집 건너 다방이 줄지어 섰던 시절"이라고 회상하던 때였다.

그 시절, 다방은 '사랑방'이었고 '문화센터'였다. 그리고 철학과 인생을 논하던 자리였다.

은하수 다방, 지금은 미싱 소리만 들리고

조영래가 쓴 <전태일 평전>에는 한 다방이 꽤 여러 번에 걸쳐 나온다. 바로 '은하수 다방'이다. 전태일이 평화시장 여공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에 문제를 느끼고 첫 번째 회합을 가졌던 곳이 바로 그 곳. 책 속에 묘사된 장면을 잠깐 살펴보자.

"첫 번째 회합은 동화시장 아래 은하수 다방에서 열렸다. 컴컴한 다방 한 구석자리에 그들은 몰려 앉아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한 시간 가량 진행된 모임이 거의 끝나갈 무렵 태일이 일어나서 '앞으로 우리가 친목을 도모하되 개선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도 그렇고 평화시장 일대의 3만 명 직공들이 다 혹사당하고 있으니 이것을 시정해야 한다. 다음 기회에는 그런 이야기를 해보자'라는 취지의 말을 하였다... 이 날의 찻값은 태일이 전액 부담하였는데 그 뒤로도 번번이 그가 대부분의 찻값을 부담하였다...두 번째 회합은 첫 번째로부터 한 주일 후에 역시 은하수 다방에서 열렸다."

▲ 동화시장 입구에 만들어진 전태일 동상(사진 왼쪽). 전태일이 노동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모였던 '은하수다방'은 지금 공장으로 바뀌었다.
ⓒ 김대홍
은하수다방을 찾기로 했다. 유일하게 알고 있는 단서는 '동화시장 3층'이라는 것. 동화시장이 바라보이는 대로변엔 얼마 전에 만들어진 전태일 동상이 서 있다. 사람들은 새로 뚫린 청계천을 바라보다가 가끔씩 전태일을 힐끔거렸다.

대로변에 앉아있는 어느 건물 경비원에게 은하수 다방 위치를 묻자 "글쎄…"라며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짐 자전거에 물건을 싣기 위해 나와 있던 사람에게 묻자 "저기 옛날에 있었다고 하던데…"라며 두산타워 쪽 동화상가를 가리킨다.

마침 동화상가 입구엔 한 경비원이 앉아 있었다. "내가 2003년 7월부터 근무했는데, 그 때 이미 없었어."

예상대로 은하수 다방은 사라지고 없었다. 은하수다방이 있던 3층에 올라가니 미싱 소리만 요란했다. '스팡클, 레이저 커팅, 컴퓨터 자수'라는 이름이 붙은 곳에서 과거 다방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 옆에 있던 아주머니는 다방이 사라진 지 3, 4년쯤 됐다고 이야기한다. 생각보다는 꽤 오랫동안 버텼다.

그 시절 여공들의 삶보다는 나아졌을까. 3층 복도에 가득 쌓인 천과 사람들의 바쁜 움직임, 청계천 일대에서 아직도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공장들은 여전히 부정적인 대답을 강요하는 듯하다.

참, 은하수다방을 찾아 동대문길을 걷다보면 유명한 시인 김수영을 만나게 된다. 동대문역 10번 출구에서 나와 종로5가 쪽으로 걸으면 '김수영 선생 집터'라는 돌비석이 나타난다. 민족 시인과 노동자의 벗은 그렇게 한 동네에서 만나고 있었다.

40여년 향기가 남아있는 곳 '학림다방'

시인 김정환이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에 미쳐, 아침 모닝커피를 주는 시간부터 밤 10시가 넘은 시간까지 죽치고 앉아 그 노래만 신청해 들었다고 해서 '황태자'라는 별명까지 얻었다는 곳, 학림다방.

▲ 1956년 만들어진 학림다방. 김지하 황지우 김민기가 즐겨찾던 곳이다(사진 왼쪽). 학림다방 입구. 세월의 무게가 아늑하게 손님을 맞이한다.
ⓒ 김대홍
대학로에 있는 '학림다방'은 다방 전성기 시절 자취를 확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다. 70, 80년대 신촌의 명물로 통했던 '독수리다방'마저 지난해 6월 문을 닫았으니 말이다.

흰색과 녹색이 깔끔하게 조화를 이뤄 간판만 보면 최근 만들어진 듯 보이는 '학림다방'은 무려 4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간판엔 'since 1956'이라고 선명히 적혀 있다.

음악평론가 진회숙이 "어둠침침하고 초라하며 다소 허무주의적인 냄새마저 풍긴다"고 표현했던 학림다방은 1956년 동숭동 서울대 시절부터 자리를 지키던 곳으로 김지하 황지우 김승옥 전혜린 등 문인들과 김민기 임진택 등 예술인들이 즐겨 찾았다.

그들이 차를 마셨을 나무 테이블과 낡은 종이 케이스에 담겨진 LP판, 연필로 데생한 베토벤 그림, 낡은 책장과 책 등은 최백호가 부른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낭만에 대하여)를 흥얼거리게 만들었다.

며칠 전 방문한 학림다방에선 아늑한 편안함이 감돌았다. 20대로 보이는 여성 두 명은 느긋하게 뜨개질을 하고 있었고, 옆 좌석에선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러 명이 책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한쪽에선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는 교수(?)를 젊은이들이 캠코더로 찍고 있었고, 그 옆에선 젊은 여성 한 명이 일어서면 머리를 부딪히게 되는 좁은 공간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유리잔에 담긴 물대신 짙은 황색 자기 잔에 '모락모락' 김이 나는 엽차가 담겼다면 더 좋았겠지만 학림이 풍기는 풍경은 30, 40년 전 그대로였다.

▲ 4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학림다방에서는 테이블이나 창가 등이 모두 옛날 것 그대로다.
ⓒ 김대홍
영화 <챔피언>에서 김득구(유오성)와 경미(채민서)도 여기서 데이트를 했고, <번지점프를 하다>에서는 인태희(이은주)가 서인우(이병헌)에게 여기에서 라이터를 전해줬다. <강원도의 힘>에서도 재완(전재현)과 상권(백종학)이 학림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전혜린이 변사하기 전날 앉아있었던 창가 자리도 여전하다.

특히 '학림표 커피'로 유명한 이 곳 커피는 다방 뒤쪽 20m 골목 안에 있는 작은 커피 공장에서 만들어진다. 물 건너오는 외국산 원두커피와 달리 항상 2주가 안된 신선한 커피를 공급하는 게 바로 학림 커피의 강점이다. '맛'에 대한 고집과 현재와의 적절한 조화가 '학림다방'이 홀로 생존한 이유이기도 하다.

<명동백작> 이봉구는 왜 명동을 떠났을까
흔적조차 사라진 명동, 종로의 다방들


일제 때 서울에서 가장 번화가였던 명동은 광복 후에도 여전히 서울 문화의 중심지였다. 수많은 문인과 음악인들이 명동거리 다방에 앉아 인생과 철학을 논했다. 명동 은하수와 꽃다방, 휘가로, 돌체, 문예싸롱, 모나리자 등이 유명했고, 인근 종로2가의 칸토, 디쉐네, 뉴월드, 낙원동 르네상스가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곳에서는 음악회 그림 및 사진전시회가 열렸고, 시낭송회와 문학토론회가 개최됐다. 때때로 연극무대와 영화관으로 변신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독립투사 추모회, 요리강습회 등도 마련됐다.

오랫동안 서울의 중심지였던 명동이 화려함만은 강남에 내줬지만 오랜 연륜이 빚어내는 자긍심은 여전하다. 명동 거리를 걸으면 30년 된 식당은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심지어 40년을 넘긴 곳들도 있다.

그러나 그 오래된 거리 어느 곳에서도 '몇 십 년 됐다'는 다방은 단 한 곳 없다. 김수영, 전봉래가 눌러 살던 '휘가로', 음악광들의 아지트였던 '돌체'(명곡다방), 코주부 김용환 부부가 했다는 '금붕어'는 흔적조차 없다.

제일은행 본점 바로 서쪽에 있던 우리나라 최초 다방 '청목당'(복혜숙의 표현), 영화배우 복혜숙이 운영했던 '비너스'(현재 인데코 미술 서점 건물 3층 자리), 종로 2가 YMCA 근처의 '멕시코'는 책 속에서만 만날 수 있을 뿐이다.

혹시 흔적이나 찾을 수 있을까 싶어 명동 전성기 시절 '오아시스' '돌채' '청동' '봉선화'이 둘러싸고 있던 명동공원을 찾았다.

물어물어 공원을 찾아가니 인근 구멍가게에서 "요 앞 큰 건물이 명동공원 자리"라고 확인해줬다. 근처에 있던 40대로 보이는 여성이 "여기 오래 있었지만 명동공원 위치는 처음 알았네"라고 말한 것처럼 공원 일대는 오래전 추억 속으로 사라진 듯했다. 지금 '유투존' 건물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맥도날드'가 있는 자리다.

과거 다방이 있었을 자리엔 '모마'라는 에스프레소 커피 전문점이 화려한 불빛을 내뿜고 있었다.

조선 5백년 도읍의 기운이 서려있는 종로 또한 수많은 예술인들이 노닐었던 다방이 많다. 탑골공원 건너편 인사동 진입로에는 남궁, 비너스 카카듀가 성업했고, 인사동에서 종각역까지 이어진 종로2가엔 양지, 영보그릴, 멕시코, 시온, 탱고, 서라벌, 복지 등이 간판을 내걸었다. 그러나 종로2가를 거닐면서 본 것은 사주까페와 커피숍뿐이었다.

지금도 서울과 지역 몇 몇 곳에는 옛날다방 분위기를 풍기는 곳들이 있다. 물론 대부분 최근 만들어진 곳으로 인테리어만 옛날풍이다. 그러나 <명동백작> 이봉구가 명동을 떠난 것은 다방 커피 맛이 변했다거나 인테리어가 바뀌어서가 아니다. 자신의 오랜 친구들이 이미 죽거나 명동을 떠났기 때문이다.

옛날식 다방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곳을 찾을 천상병이나 전혜린, 그리고 김수영이 이미 이 세상에 없다. 그래서 명동과 종로의 음악다방은 영원히 추억이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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