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변호사협회의 하창우 공보이사가 <조선일보>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구성원 다양화를 위한 인위적 기준에 집착한 나머지 '코드 인물'에 집중됐고 오히려 실력있는 법관이 추천되지 못했다." 이용훈 대법원장이 어제 대법관 후보 3명을 임명제청한 데 대한 평이다.
아이러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변호사단체 관계자가 이렇게 평했다는 게 적잖이 놀랍다.
하창우 이사가 언급한 '코드'가 구체적으로 뭘 뜻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부연설명이 없다. 다만, 하창우 이사의 문제의식을 공유한 일부 언론의 지적을 종합하면 대략 이런 것일 게다.
박시환 대법관 후보는 탄핵심판 때 대통령측 변호인을 맡았고, 천정배 법무장관이 사석에서 언급한 "대법관이 돼야 할 사람" 네 명 중 두 명이 임명 제청됐다는 점 등등.
법무장관이 '적극 미는' 인물들이 대법관 후보가 됐는데 그 가운데 한명은 대통령 변호인을 맡았던 인물이다. 게다가 이들을 임명제청한 이용훈 대법원장도 대통령 변호인이었다. 눈에 불을 켜고 의도성, 즉 코드 인사의 흔적을 찾고자 하는 이에겐 썩 괜찮은 그림이다.
세상사 보기 나름이라고 했던가. '코드'라는 게 '마음'의 범주에 속하다 보니 객관적 입증엔 한계가 있다. 그렇게 보면 그렇게 보이고, 그렇다고 우기면 그렇게 되는 게 코드다. 문제를 제기하는 측은 의혹 제기의 '자유'를 누릴 수 있지만, '코드 인물' 입장에선 '몸'으로 항변해야 하는 답답함만 안는다.
의혹을 제기하는 이가 아무리 '자유'를 누린다 해도 모든 이가 그런 '자유'를 누리는 건 아니다. 최소한 변호사만큼은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
'코드' 혹은 '철학', 의도성 찾는 이에겐 썩 괜찮은 그림
상식은 이렇다. 변호사는 사건을 수임할 때 의뢰자의 신분·재력 등을 가려선 안 된다. 변호사의 덕목은 억울하다고, 또는 벌이 과하다고 호소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적극 변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박시환 후보의 전력은 어떻게 봐야 할까? 자명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같은 변호사가 다른 변호사를 향해 대통령측 변호인이었다는 이유로 '코드 인물'을 운위해선 안 된다.
천정배 장관의 하마평도 그렇다. 천 장관의 '입놀림'이 적절했다고 볼 수는 없다. 대법관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법률참모로서 그런 말을 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항변도 있겠으나 설령 그렇다 해도 대통령한테 할 말이지 친구들한테 할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을 갖고 '코드'를 운위하는 것 또한 적절치 않다. '코드'라는 단어를 우리말로 풀면 대충 '이심전심' 쯤이 될 것이다. 좀 더 속되게 풀자면 '알아서 길 수 있는 심정적 바탕' 정도일 것이다. 따라서 '코드'라는 말에는 '결탁'의 이미지가 오버랩돼 있다.
'철학'이라는 말도 있다. 세계를 보고 사물을 보는 가치관이다. 철학에서 능동적인 의지가 나온다. 그래서 '철학'을 공유하는 사이를 두고 '결탁'이란 말은 쓰지 않는다.
그럼 천정배 장관의 말은 뭘 뜻했던 걸까? 천정배 장관의 발언을 단독 보도했던 <중앙일보>는 "대법관이 돼야 할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액면 그대로 읽으면 "이런 사람이 대법관이 됐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물론 이런 선호의 배경엔 '철학'의 동질성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이를 두고 '코드'라 한다면 달리 방법이 없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도록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다.
다만, 그렇게 생각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만큼 임명제청권자나 임명권자의 '자유'도 보장하면 된다. 자신의 '철학'에 맞는 인사를 제청하고 임명할 수 있는 '자유' 말이다.
우리나라 대법원이 보수 일색이라는 지적에 이의를 다는 이가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인사를 대법관에 임명해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인사 철학'을 실천할 자유가 개인의 범주를 넘어 전 국가적 과제라고 생각하는 자유 또한 보장해야 한다.
이것이 '코드'를 운위하는 일부 인사와 언론조차도 부정하지 못하는 대법원 다양화의 첩경이다.
'실력'은 헙법과 법률에 대한 지식 아닌 서열문화에서의 '기수'
물론 반론이 없지는 않다. 하창우 이사의 입에서 나온 '실력'이란 두 글자에 반론의 줄기가 형성돼 있다. "오히려 실력 있는 법관이 추천되지 못했다"는 하창우 이사의 말은 공교롭게도 대법관 후보로 제청된 세 사람에 대한 역평가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래서 궁금해진다. 대법관에게 요구되는 실력이란 뭘까? 헌법에 따르면 법관은 "헌법과 법률과 양심"에 따라 판결하도록 돼 있다. 따라서 '실력'을 재는 척도는 헌법과 법률에 대한 지식, 그리고 양심이 될 터인데 양심은 철학의 문제다. 양심에 일등이 있고 꼴찌가 있다는 말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들어본 바가 없다.
그럼 남게 되는 척도는 두 가지, 헌법과 법률에 대한 지식이다. 사실 판단을 하는 하급심과는 달리 대법원은 법리 판단을 주로 하는 곳이다. 하급심이 행한 사실 판단에 법리적 오해나 착오가 있었는지를 가려내는 곳이 대법원이다. 그렇기에 헌법과 법률에 대한 지식은 대법관에게 요구되는 기초적이면서도 근본적인 능력이다. 여기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까 의문이 증폭된다. 하창우 이사가 운위한 '실력'이 세 명의 대법관 후보의 헌법과 법률에 대한 지식을 겨냥한 것인가?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법관 제청을 둘러싼 코드 논란 이전에 인사검증의 부실성 문제가 논란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코드'를 운위한 일부 언론조차 '코드 인물'이 나름대로 시국·공안 사건이나 노동사건에서 전문성을 갈고닦은 인물이란 점은 인정하지 않았는가.
그럼 하창우 이사가 언급한 '실력'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실력이 계량화된 척도로 재는 항목이란 점을 고려할 때 법조 경력 정도가 얼핏 떠오르지만 이 또한 아닐 것이다. 법조계, 더 나아가 사회 전체적으로 논의되는 사법개혁의 핵심 항목 가운데 하나가 기수 중심의 서열문화다. 하창우 이사가 이를 모를 리 없다.
'코드 인사'를 둘러싼 갑론을박은 일찌감치 예견됐던 일이기에 그럭저럭 내성이 갖춰졌지만 난데 없이 삐져나온 '실력론'에 대해선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답은 하창우 이사, 더 나아가 변협의 추가 설명을 들어본 뒤에 내려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