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시아심의 본명은 심상대이다. 그의 소설에는 삼팔따라지 비주류들의 풍찬노숙을 그린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그것이 이번 작품집에 함께 실려 있는 '병돌씨의 어느 날'에서처럼 뒤쪽으로 묵지근한 슬픔을 눙치고 있든 어찌하든 간에 재미있고 속도감 있게 읽히는 그의 소설처럼 묵호(동해)로 이어진 길은 시원스레 뚫려 있다. 가을의 풍광을 따라 달리다보니 묵호도 금방 지척인 것 같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묵호(墨湖)라는 지명을 쓰게 된 것일까? 조선조 후기 순조 때 이 마을에 큰 해일이 일어나 굶주림이 극심하게 되자 이를 수습하고자 나라에서 파견된 이유옹이라는 관리가 마을 이름이 속지명과 한자 지명의 두 가지인 것을 알고, 이곳은 물도 검고 바다도 검고 물새도 검으니, 먹墨(묵)자를 써서 묵호(墨湖)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곳 노인들께서는 옛날부터 오징어가 많이 잡혀 오징어 먹물 때문에 그렇다는 말씀들을 하신다.
묵호는 예전에는 강원도 명주군 묵호읍에 속하였고, 80년도에 삼척군 북평읍과 묵호읍이 통합되어 현재는 강원도 동해시 묵호동으로 행정 명칭이 변경되었다. 지금은 예전의 명성을 유지하기는 조금은 활기가 빠진 것처럼 보이지만, 묵호는 분명 강원도의 대표적 항구로 군림했고, 지금도 부두의 시커멓게 쌓인 적탄장 등 주요 기간산업 등으로 그 명맥을 어렵사리 이어가고 있다.
어쨌든 이 자리가 묵호에 대한 신상명세를 떼는 것은 아닐 터이니 이쯤에서 본론으로 들어가자.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주인공은 택시기사, 선장, 시청공무원, 광고사 주인, 양화점 주인, 신문지국장, 철물점 주인, 토목기사 등의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는 친구들과 걸판지게 회포를 푼다.
'어느 집 빨랫줄에나 한 축이 넘거나 두 축에 이르는 오징어가 만국기처럼 열려 있었고, 집집에서 피워 올린 꽁치비늘 타는 냄새가 묵호의 하늘을 뒤덮는 저녁, 양동이로 머리를 후려치며 싸우던 공동수도의 아낙네들, 건조장 바닥에서 떨고 있는 개, 욕설과 부패' 이것이 그들이 기억하는 묵호의 풍광이었다.
산다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곳, 묵호! 그러나 그러하기에 산다는 것이 오히려 절실한 곳이 묵호이다. 이 점은 '묵호를 아는가'라는 소설 제목의 '묵호'를 '인생'이나 '슬픔'으로 바꾸어보면 확연해진다. 인생을 아는가 혹은 슬픔을 아는가 하고 물으리만치 이 소설은 시대의 뒷전으로 밀린 사람들의 조금은 비릿하지만 우악스레 건강한 삶의 풍경을 그려낸다.
동해시는 요즘 '해오름의 고장 아름다운 바다의 도시'라는 이미지 홍보와 자연경관을 이용한 관광산업과 인근해 어업에 주력하고 있었다. 영화 '미워도 다시한번' 촬영지로 다시 각광을 받는 해발 67m의 묵호등대에서 보는 항만의 풍경은 시멘트 사일로, 군함, 조선소와 어판장, 항만청 청사, 세관의 테니스 코트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한결같이 변함없는 것이 묵호항 앞의 검은 빛 바다이다. 한쪽 옆 갯바위에서는 아직도 천연 해삼을 건져 올릴 정도로 저 검은 물빛 속에 풍부한 해산자원이 감추어져 있으리라. 공동어시장 앞에는 그물을 보수하는 손길이 날이 저물도록 이어졌으며, 어달포의 무인등대 마을은 밤늦도록 오징어를 말리는 어부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부두의 적탄장은 웅장한 산을 이루고 있었고, 그곳으로 난 영동선의 철길은 그 거뭇한 먼지를 날리며 엎드려 있는 것을 보면 이제 묵호의 墨(묵)자에는 검은 탄가루의 검음도 또 하나 추가 되어야 할지 모른다. 아무튼 산다는 것의 호랑이 아가리 같은 결박에서 아무도 자유롭지 못한 것처럼 끝끝내 누구도 이 바다를 잊지 못하는 것일까.
누구나 문득 무언가 그리워지거나, 서러워져서 망연히 하늘을 쳐다보거나 바다를 찾고 싶을 때, 묵호의 바다를 찾아도 좋으리라. 그 푸르다 못해 검게 된 바다는 부드럽게 출렁이는 젖가슴으로 돌아온 탕아의 야윈 볼을 투덕투덕 다독이며 이렇게 얘기해 줄지 모른다. '얘야, 떠나거라. 어서 떠나거라. 바다에는 아무것도 없단다. 자아, 어서 인간의 바다, 삶의 현장으로 떠나거라'라고 위무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