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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이 그림 같다>
ⓒ 생각의 나무
언제부턴가 이름을 들었을 때 그 사람의 용모를 짐작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만나서 얼굴을 확인하고 다시 그 짐작을 되짚어 본다. 상이 겹쳐지면 더러 빗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엇비슷한 그림이 만들어 진다. 합리화된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 이름을 토대로 다시 상대를 재구성하는 것인지도. 결과는 같다. '어쩌면 그 이름처럼 생겼을까'다.

요즘은 아이디를 즐겨쓰는 시대라서 아이디로 상대를 짐작하게 된다. 아이디의 경우는 이름보다 더 적중률이 높다. 전화번호를 아이디로 쓰는 무미건조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개 자신의 특성을 기반으로 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어느 취미 카페 정모 때 '아침이슬'이란 아이디를 쓰는 사람을 만났는데 맑은 얼굴에 큰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영낙없는 아침이슬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름은 그 사람을 대표하는 가장 큰 아이콘으로 부족함이 없다.

손철주의 <인생이 그림 같다>의 경우는 어땠을까? 책 이름을 처음 보았을 때 단순히 그림해설서 정도를 상상했었다. 내용은 물론 그림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그림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림보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더 구수하게 펼쳐진다.

옛 그림부터 시작해 연적, 다완, 기와, 문양, 옹기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들이 문화부 미술기자였던 작가의 눈을 통해 다시 태어난다. 그뿐이 아니다. 우리 전통 산수화, 풍속화에서 일본의 우키요에, 서양화… 여기다 앤디 워홀의 팝아트와 괴짜 사진가 헬무트 뉴튼의 삶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동서고금의 미술을 종횡무진한다. 그림 보는 사람 눈으로 읽은 세상 박물지쯤 될까.

"그림은 경치 좋은 곳이나 벗은 여자를 그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다. 그들은 보기 좋은 떡이 당연히 맛있다고 믿는 부류다. 보는 것은 시각이고 맛보는 것은 미각이다. 그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아니라 물과 기름의 차이다.

풍경화는 누드화를 보는 눈으로 추상화를 보면 이건 동그라미 저건 세모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때 추상화는 그림이 아니라 형태의 조합인 것이 되고 만다. 어미돼지 곁에 새끼돼지를 올망졸망하게 그려놓고선 '가화만사성', 물레방아 한가하게 돌아가는 산골동네를 그려놓고선 화평… 하는 수준, 이발소 그림이라야 수긍할 수 있다면 이 세상 미술은 몽매한 안목에만 봉사하는 역할 외에 더 무엇을 하겠는가. " -'달걀그림에 달걀이 없다' 중에서


미술전문기자 시절에 펴낸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에 이어 7년 만에 묶은 이 책은 '미술에 홀린 손철주의 미셀러니'라는 부제처럼 논리적이지 않아 글이 더 말랑말랑하고 쉽게 읽힌다. 딱딱한 허위의 가식을 벗어버리고 틀을 넘나들며 작가 특유의 매끄러운 달변으로 사물을 헤집는다. 이달주의 그림 '귀로'를 읽는 그의 품새는 그림보다 더 그림에 가깝다.

"피득한 기가 가신걸보면 건어물인데 쾌를 묶지 않은 걸로 보면 시장바닥에서 낱개로 산듯하다. 여름날 오후 채반과 소쿠리를 이고 얹은 일가족이 집으로 돌아간다. 삼베적삼차림의 아낙은 일찍 본 딸 덕에 늦둥이를 업는 수고를 덜었다. 검정 광목 치마저고리에 자주빛 보자기를 둘러쓴 딸은 아직 처녀다. 저 수줍어하는 손깍지 낀 품새는 세상이 우호적이지 않은 나이를 말해준다.

소쿠리를 든 머슴애는 금방이라도 퉁을 놓을 표정이다. 시골 닷새장을 작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사뭇 덤덤하다. 굴뚝에 연기피고 고봉보리밥과 함께 구운 어물이 개다리소반에 올라야 이애 얼굴이 풀릴까. 50년대 말 내남없이 곤고했던 살림살이지만 한갓진 시골풍정은 어머니 품에 안기듯 푸근하다." -'향수와 허영' 중에서


책에서 얻어낸 가장 큰 소득을 들라면 난해한 작품 앞에서 멈칫거리지 않아도 된다는 배짱이다. 책에서 그에게 배운 중요한 독도법 때문이다. 그는 예술 작품에 대한 천편일률적인 해설 방식에 팔뚝을 걷어붙이고 딴지를 건다.

모든 작품이 간과하는 자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천천히 살피고 주의 깊게 생각하기가 으뜸 덕목이라는 것. 사리에 맞지 않는 연상. 곁길로 간 추측. 오도된 신념 그런 것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작가는 없다는 것. 그래서 모든 감상은 궁극적으로 독단이자 편견이라는 것. 요컨대 작품 앞에서 주눅 들어 벙어리 되지 말고 제식대로 그림을 읽고 맘껏 떠들라는 시원한 설파다.

중국 원나라 자정의 '석창도' 중에서 뽑은 앞 그림은 흰색 표면과 어울려 깔끔한 느낌을 준다. 군데군데 원색 그림과 사진들은 책읽는 재미를 더한다. 또한 후미에 내용에서 인용한 인물의 간략한 설명을 색인해 놓아 좀더 설명이 궁금한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인생이 그림 같다 - 미술에 홀린, 손철주 미셀러니

손철주 지음, 생각의나무(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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