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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0일 평양에서 탄생한 우리 민족의 첫 통일동이. 이 통일동이는 분단과 이별의 상징이었던 판문점을 통일과 기쁨의 상징으로 전변시켜 놓았다.
지난 10월 10일 평양에서 탄생한 우리 민족의 첫 통일동이. 이 통일동이는 분단과 이별의 상징이었던 판문점을 통일과 기쁨의 상징으로 전변시켜 놓았다. ⓒ 박준영
판문점은 지난 60년간 분단과 이별의 상징이었다. 그러하기에 지금도 판문점을 찾는 실향민들은 북녘에 있는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판문점 자유의 다리에 놓여진 철조망에 가족을 그리는 쪽지를 붙여놓고 북녘을 향하는 바람에라도 그리움이 실려가라고 눈물 젖은 손수건을 걸어놓는다. 그렇게 60년간을 버텨온 철조망에는 세월의 비극과 눈물이 쌓이고 쌓인 수많은 종이들과 편지, 손수건과 깃발들이 버거운 듯 축 처져 있다.

또한 판문점은 대결의 상징이기도 했다. 오로지 민족통일에 보탬이 돼보겠다는 일념으로 평양을 방문했던 수많은 인사들이 판문점에서 쇠고랑을 차고 곧바로 차디찬 감옥으로 끌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민족의 대경사를 맞이하는 자리에 꼭 참석해야 한다며 아픈 사람을 제외하고는 전 단원이 모두 환영행사에 참석했다는 가극단 미래
민족의 대경사를 맞이하는 자리에 꼭 참석해야 한다며 아픈 사람을 제외하고는 전 단원이 모두 환영행사에 참석했다는 가극단 미래 ⓒ 박준영
황선씨도 그랬다. 98년 한총련 방북대표로 어렵사리 평양을 방문했던 그는 판문점을 통해 내려오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가족의 품이 아닌 감옥 속에 갇혀야 했으며 그렇게 2년6개월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7년 후인 2005년 10월25일 황선씨는 판문점이 가진 ‘대결의 상징’을 ‘화해의 상징’으로 바꿔놓았으며, 그의 둘째딸,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동이는 ‘분단의 상징’을 ‘통일의 상징’으로 전변시켰다. 그러하기에 황선씨와 통일동이에게 보내는 민족의 고마운 인사는 끝이 없다.

동생을 맞은 큰 딸 '민'이는 마냥 신기한 듯 엄마와 동생 주변을 떠날 줄 모른다. 이 행복한 가족에게서 아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동생을 맞은 큰 딸 '민'이는 마냥 신기한 듯 엄마와 동생 주변을 떠날 줄 모른다. 이 행복한 가족에게서 아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 박준영
그래서일까. 판문점은 12시부터 설레기 시작했다. 황선씨와 통일동이를 맞이하기 위해 서울에서 달려온 사람들은 미리 준비해온 환영 플래카드를 붙이고 환영풍선을 부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픈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단원이 판문점에 왔다는 가극단 미래의 강문주 대표는 “민족적 대경사를 맞이하는 자리에 빠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면서 “통일동이를 생각만 해도 좋다”며 조만간 통일동이를 위한 노래도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웃어보였다.

또한 강문주 대표는 “이 애기는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을 것”이라면서 “분단과 이별의 상징이었던 판문점이 통일과 기쁨, 만남의 상징으로 변했다”며 통일동이에게 고마울 따름이라고 전했다.

1시경 판문점에 도착한 앰뷸런스에서 황선씨와 꽃분홍색 이불에 싸인 통일동이가 내리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들고 있던 풍선을 흔들며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아이에게 몰려든 취재진의 열기는 통일동이에게 모인 우리 민족의 관심을 대변이라도 하듯 뜨거웠다.

황선씨의 건강한 모습
황선씨의 건강한 모습 ⓒ 박준영
한바탕 환영과 축하, 기쁨의 인사가 오고간 후 열린 기자회견 자리에서 권오창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상임대표는 웃음을 가득 머금은 얼굴로 “통일동이를 업고 온 황선 동지를 열렬히 환영하자”며 여느 때와는 달리 기분좋은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권오창 상임대표는 “통일의 꽃 황선 동지가 10개월간의 산고 끝에 통일 옥동자를 낳았다”면서 “이제 이 아이가 아무 걱정 없이 공부하고 뛰어놀 수 있는 나라, 주인된 신분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더욱 열심히 노력하자”고 당부했다.

한편 황선씨의 친정아버지와 시아버지는 황선씨의 출산에 큰 힘을 쓴 평양산원과 편안한 산후조리를 위해 애쓴 남북적십자사와 통일부에 감사의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그러나 이날 누가 뭐래도 가장 기쁜 사람은 황선씨 본인이었을 게다. 98년 미군의 총칼 앞에 눈물을 꾹 참았던 그였지만, 2005년 오늘은 출산을 환영하는 남북적십자사의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 판문점을 넘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이별하기 싫어하는 평양산원 소아과 간호사들의 눈물바다를 보며 남녘으로 향했다. 내가 평양에서 출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남북관계가 좋아졌다는 것이며 6·15공동선언에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소감을 전한 황선씨.

그러나 그는 마냥 기쁠 수만은 없었다. 이 환영의 자리에 자신과 함께 서서 웃어야 할 남편이 없기 때문이다.

“딸은 평양에서 태어나고 아빠는 국가보안법 수배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 아직 이 땅의 현실이다. 어서 빨리 아빠가 집으로 와서 둘째아이의 첫돌에는 온 가족이 손을 잡고 평양관광길에 올랐으면 하는 것이 희망이자 바람이다.”

평양산원에서 작성해준 ‘출생증명서’와 남쪽 정부에서 내어줄 ‘대한민국 국적.’ 분명 황선씨의 둘째 아이는 출생은 평양에서 했지만 국적은 대한민국이다. 하지만 그의 바람처럼 그의 딸이 빠른 시일내에 ‘남한’ ‘북한’이 아닌 ‘코리아’라는 국적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10분만 늦었어도 위험했다"
긴박했던 출산 당시 상황... 민족의 정성이 위기 넘겨

애초에 황선씨는 평양방문을 하지 않으려 했다. 수술날짜가 아직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0월 8일 출발하기로 했던 시부모님의 평양행이 인천공항에서 명단누락으로 좌절된 것을 알고 부모님과 함께 10월10일 출발하게 된 것이다.

이미 알려졌다시피 10월 17일로 분만날짜를 잡아놓았던 황선씨는 의사의 ‘평양 정도면 아무 상관없다’는 허락에 한 번 실망으로 주저하는 부모님을 모시고 평양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일은 그날 오후 터졌다. 평양에 도착하고 오후쯤 동명왕릉 참관을 할 때 갑자기 진통이 온 것이다. 걸음이 더딘 그의 상태를 알아본 북측 한 인사가 곧바로 평양산원에 연락을 취해 평양산원에서 진찰을 받을 수 있었다.

한 차례 진찰을 받고 어렵사리 아리랑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으나 저녁 9시 30분경 또다시 강한 진통이 찾아와 대기해 있던 앰뷸런스에 몸을 실고 평양산원으로 향해야 했다.

상태를 살펴보던 의사들은 자궁 수술자리가 곧 파열될 위기라고 진단하고 곧바로 수술에 들어갔다. 10~20분만 늦었어도 산모와 태아 모두가 위험할 수 있던 상황. 평양산원 원장이 오후 내내 황선씨 곁을 지키며 상태를 지켜봤던 그 정성으로 의사들도 수술을 진행했고, 다행히 황선씨는 건강한 딸을 출산할 수 있었다. / 박준영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자주민보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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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자전국회의에서 파트로 힘을 보태고 있는 세 아이 엄마입니다. 북한산을 옆에, 도봉산을 뒤에 두고 사니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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