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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초등학교. 잡곡밥, 추어탕, 도토리묵 무침, 감자와 피망과 양파를 곁들인 소시지 볶음, 그리고 김치. 오늘(28일) 점심 급식 메뉴였습니다.

추어탕이라니…지금까지 나온 급식 메뉴에 이런 건 없었는데? 원래 학교 급식은 아이들 위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아이들 입맛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래서 새콤달콤하거나 먹기 좋은 것들로 식단이 작성 되곤 했지요. 근데 아무리 눈을 씻고 다시 봐도 정말 추어탕입니다. 순전히 학생보다는 교사인 저를 위한 건 아닌가? 잠시 즐거운 해석을 맘껏 해봅니다.

가정으로 매주 나가는 메뉴에는 추어탕이 명시되어 있지만 아이들은 오늘 먹는 이것이 추어탕인지 잘 모를 겁니다. 만약 알면 먹을까요? 가끔 뼈가 씹히지만 멸치국이려니 하겠지요. 하지만 추어탕은 환절기 아이들 건강에 참 좋은 음식입니다. 오죽하면 이름도 추어탕(鰍魚湯)일까.

점심을 먹고 나면 식판그릇을 담임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억지로 음식을 먹이려는 의도가 아니라 혹시 누가 아파서 밥을 못 먹는 것은 아닐까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몸이 불편해도 쑥스러워 말을 못하는 아이들은 음식을 남김으로써 자신의 상태를 표현합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 오늘의 메뉴. 추어탕이 압권입니다. 아이들에게 추어탕이 미꾸라지국이라는 걸 말해주면 잘 먹을까요?
ⓒ 송주현

"야, 오늘 소시지 볶음이네. 게다가 몸에 좋은 피망과 양파까지. 우리 다른 반찬은 몰라도 이것은 남기지 말기야."

아이들이 밥 먹는 걸 보면 바람이 이는 것 같습니다. 학교에선 저 아이들이 과연 집에서 그토록 잘 안 먹어서 엄마의 마음을 애타게 하는 애들 맞나 싶을 만큼 경쟁적으로 잘 먹습니다. 아이들은 냠냠 쩝쩝 밥을 먹으면서도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옆에 있는 아이들과 종알종알 이야기를 합니다. 숟가락 움직이는 덜그럭 소리와 아이들의 이야기 소리가 엉키면 누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저는 하나도 모르겠는데 아이들은 용케도 자기들이 필요한 대화는 다 합니다.

요놈들이 무슨 초음파라도 쓰나? 같은 식판, 같은 수저, 같은 메뉴로 점심을 먹으니 누구나 똑같은 처지가 되는 아이들. 예전엔 도시락 반찬 때문에 기죽는 아이도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 나라가 학교 급식을 실시한 건 참 잘한 일인 것 같습니다.

아이들과 단체로 점심을 먹다보니 아이들의 식성에 대해 잘 알게 됩니다. 어쩌면 성격과 식습관이 그렇게 비슷한지 참 신기합니다. 담임이 이런 생각을 하는지 안 하는지 아랑곳 않고 아이들은 받아 온 점심을 냠냠 후루룩 잘도 먹습니다. 몇 명만 빼고요.

"아니, 이게 뭐야?"
"저 이거 못 먹는데요…."
"우리 성연(가명)이가 이게 매운 고추인줄 알고 못 먹는구나. 이건 피망이야. 먹어 봐."
"저 이거 먹으면 토하는데요."
"그래애? 피망 알레르기가 있나보구나. 어쩌니? 맛있는 피망을 못 먹어서…."
"그거 아닌데요. 그냥 못 먹는데요."

'어쭈, 요놈 봐라. 영양사 선생님이 일일 영양가를 계산해서 필요한 만큼의 섭취량을 요리해 준 것인데 안 먹겠단 말이지? 네가 싫으면 안 먹는 거지. 음식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보장하는 것이 아이로 하여금 스스로의 인권에 대하여 당당할 수 있게 하는 자립적 결정능력을 길러주는 것일 테고. 아무리 어린 아이라고 해서 먹고 싶은 것과 먹기 싫은 음식을 구분해서 먹는 것조차 못하게 한다면 도대체 아직 어린 이 아이가 무슨 낙으로 학교에 오고 싶을 것인가.'

하지만 단지 음식을 가려먹는 편식의 정도라면 뭐가 문제겠습니까. 문제는 음식에 대하여 까다로운 아이들은 다른 일상사에서도 비슷하다는 겁니다. 아이들과 규칙을 지켜가며 하는 놀이인 피구나 축구를 할 때에도 왜 저 아이는 쉽게 토라지고 흥을 깨는 걸까요. 다른 아이들의 단점을 크게 부각시켜 놀리기도 하고 말입니다.

"성연이가 피망을 먹으면 살이 되고 영양이 되겠지만 안 먹으면 이걸 치우느라 급식 아주머니께서 힘드실 텐데?"
"저 피망 안 먹어도 키 잘 크는데요. 그리고 저만 안 먹는 것도 아니고 서경이도 안 먹고 진주도 안 먹었는데요…."
"하지만 서경이와 진주는 김치는 다 먹었더라. 근데 너는 지금 야채를 다 남겼잖아."

아이는 담임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편입니다. 담임의 사랑에 대한 욕심이 강하지요. 그런 아이들은 담임이 이런 일로 자신을 미워하게 될까봐 두려움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보기에 자신과 담임의 사랑을 놓고 경쟁관계 있다고 여겨지는 다른 아이들까지 끌어들여서 어떻게든 선생님으로부터 자신의 이미지가 망가지는 것을 막아보고 싶어합니다.

다른 아이는 사랑하면서 자기만 덜 사랑한다고 생각되면 아이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될까요. 그래서 다른 아이는 안 먹었어도 봐 주시지 않았느냐고 속이 다 보이는 항변을 하고 있는 겁니다. 아, 천사처럼 귀엽고 순수한 성연이. 하는 짓 하나 하나가 어쩌면 그렇게 예쁘고 투명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천사라고 하나봅니다. 이 아이가 편식을 고치면서 세상과도 화해를 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예쁠까요.

"성연아, 성연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치킨이랬지?"
"아뇨. 피자로 바뀌었어요. 그것도 ○○○피자요."
"그래? 그런데 어쩌나. 피자를 너무 많이 먹으면 뚱뚱해진다는데?"

매스컴 때문인지 아이들은 막연하게 남자 담임은 예쁜 여자애들을 더 좋아한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11살인데도 벌써 가방에 빗을 넣어 가지고 다닙니다. 자신의 머리가 단정하고 예쁘게 되면 약간 통통한 편인 자신을 선생님이 예쁘게 봐 주실 거라는 기대 때문이겠지요? 이래서 딸을 기르는 아빠들은 모두 딸에게 끔벅 죽게 되나봅니다. 어느 아빠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딸에게 안 넘어갈 수가 있을까요?

"성연이가 피망을 안 먹겠다면 사실 선생님도 억지로 먹게 하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피망 엔 비타민이 아주 많은데 이 비타민은 아주 중요하거든. 비타민이 부족하면 괴혈병이라는 무서운 병에 걸려요. 그럼 얼굴이 아주 미워진대. 성연이는 얼굴이 아주 예쁘니까 피망이 싫으면 다른 과일이나 채소라도 많이 먹어야 해. 알았지?"
"에잇, 그냥 피망 먹을게요. 히히….

▲ 드디어 피망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피망을 먹기까지 이 아이에게는 얼마나 길고 복잡한 의사결정 과정이 필요했는지 모릅니다. 아이에게 무조건 먹으라고 하기보다는 이걸 먹겠다고 결정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안내하는 것이 어른들이 해야할 일이겠지요?
ⓒ 송주현

아이는 피망을 덥석 물어 한 입에 넣고는 오물오물 토끼처럼 예쁘게 먹습니다. 비위가 상해서 안 먹는 것도 아니었고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안 먹은 것도 아닌, 그저 "사랑 받고 관심을 받고 싶어서" 그동안 편식을 해왔다고 생각한다면 제가 너무 아이 편만 드는 것일까요?

이 아이에게 있어서 아이의 입맛을 결정하는 그 어떤 기준보다 우선되는 기준은 예뻐지는 일. 그동안 여러 번 시도 했어도 고치기 힘들었던 야채 혐오증을 이렇게 쉽게 고칠 수 있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어쩌면 이 아이는 이걸 미리부터 고칠 생각을 하고 있었을 데 미련한 담임이 지금까지 끌고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고, 미안해라.

도대체 누가 얼굴 예쁜 사람만 최고라는 신념을 아이에게 심어 놓은 걸까요? 매스컴이든 누구든 간에 이 착하고 티 없는 아이의 마음에 미인지상주의를 심어 놓은 이는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일입니다. 끝으로 이 아이의 피망에 대한 소감을 알려드립니다.

"음, 맛있네요? 이 피망 이름이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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