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에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유적 외에 또 하나의 명물이 있다. 베를린 시내의 한 횡단보도 앞. 이 명물은 울고 있던 꼬마 아이를 웃음 짓게 만들고 관광객들에게는 셔터를 누르게 만든다.
주인공은 신호등 안에 들어있는 이른바 '신호등맨(Ampelmann)'이다. 전 세계를 통틀어 유일하게 모자를 눌러쓴 모습을 하고 있는 구동독의 신호등맨은 눈에 띄면서도 친근감을 주는 캐릭터로 독일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해왔다.
그런데, 이 신호등맨을 두고 지난봄부터 동독과 서독의 회사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모자 쓴 신호등맨의 탄생
신호등맨은 1961년 구동독의 교통심리학자 카를(78)에 의해 태어났다. 색깔만 들어있는 단조로운 신호등을 사람들이 자주 무시하면서 교통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자 동독 교통부에서 눈에 띄는 신호등 개발계획을 세운 것. 당시 동베를린 관계기관에 근무하던 카를씨는 교통심리학자, 교통의학자 등 관련 연구자들과 수년간의 연구를 거쳐 현재의 신호등맨을 도안해냈다.
그러나 모자를 쓰고 있는 신호등맨이 카를씨에 의해 처음 선보여졌을 당시 동독 당국은 '불합격' 판정을 내렸다. 신호등맨이 쓰고 있는 모자가 사회주의 동독의 적이었던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됐기 때문. 이에 따라 카를씨는 '정치색'을 없애기 위해 모자를 평평하게 하고 서민적 분위기가 풍기도록 수정했다.
이렇게 태어난 신호등맨은 60년대부터 동베를린에서 도입되기 시작해 70년대부터 구동독 전역에 설치됐다. 신호등맨의 등장과 함께 교통사고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뿐만 아니라 신호등맨은 동독일들에게도 금세 친숙한 존재로 자리 잡았다.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머금게 하는 단순하면서도 눈에 잘 띄는 캐릭터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을 사로잡았기 때문. 특히 구동독 교통안전교육을 위한 동독 방송프로그램의 로고로 신호등맨이 이용되면서부터 동독인들에게 더욱 친근한 존재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90년 동서독 통일과 함께 구동독은 지도상에서 사라졌지만 신호등맨은 구동독을 상징하는 문화적 상징으로 남았다. 통일 이후 급격한 삶의 환경 변화 속에서 몸과 마음이 지쳐버린 구동독인들에게 옛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심벌로 자리 잡은 것. 이런 인기에 힘입어 2001년 마흔 번째 생일을 맞은 신호등맨은 언론의 대대적 조명을 받기도 했다.
신호등맨은 90년대 중반, 신호등맨의 상표가치를 간파한 구서독의 디자이너 헥 하우젠을 통해 디자인 도안으로도 변신했다. 헥 하우젠은 상표 도안자와의 일대일 계약을 통해 신호등맨을 디자인 콘셉트로 이용해 티셔츠, 가방 등 20여 가지의 기념품과 물건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의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초기 1인 업체에서 시작한 이 회사는 매년 2백만 유로(25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는 회사로 성장했다. 한편 동독시절 신호등맨이 들어 있는 신호등을 제작하던 구동독 츠비카우 지역의 교통설비회사도 신호등맨 도안을 넣은 머그컵, 연필, 맥주잔, 술병 등을 판매해 연간 5만유로의 매출을 올렸다.
통일 뒤의 수난... 사라질 위기를 넘기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신호등맨은 90년대 후반, 사라질 위기를 겪었다. 통일과 함께 유럽연합의 일원이 된 구동독의 신호등이 단일한 신호표지판을 설치해야 하는 유럽연합의 교통관련 법규에 어긋났기 때문. 이에 따라 1997년, 동독 지역에 남아있던 신호등을 서독산으로 교체하는 것이 추진되었다. 일각에서는 서독 관련 업체의 로비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러한 결정이 알려지자 구동독인들을 중심으로 '신호등맨구명위원회'가 결성되는 등 신호등맨을 구하자는 자발적 운동이 일어났다. 통일과 함께 하루아침에 새로운 체제를 받아들여야 했던 구동독인들에게 옛 시절의 기억이 서려있는 신호등맨을 없앤다는 건 자신들의 정체성에 또 한번의 상처를 입히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
1997년 당시 자발적으로 일어났던 신호등맨 구명운동 관련 웹 사이트에는 "살아 있어 말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만 신호등맨은 어디서든 항상 만날 수 있는 우리 마음속의 친구다. 그런 신호등맨을 꼭 그렇게 없애야 하나"라는 류의 견해가 많았다. 심지어 "신호등맨을 없애려면 차라리 베를린 장벽을 다시 세워라"라는 목소리까지 나올 만큼 신호등맨은 구동독인의 마음속 깊이 각인돼 있는 존재였다.
구서독인 가운데에도 많은 사람들이 구동독인에 심정적으로 동의한다는 견해를 보였다. 이러한 신호등맨 구명운동이 독일 내에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키자 결국 관계 당국은 신호등맨을 서독의 것으로 대체하려던 당초 계획을 바꿔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 이렇게 살아남기에 성공한 신호등맨은 2004년, 교통 당국의 승인을 받아 신호등으로서의 당당한 권리를 갖게 되었다. 또한 서독의 밋밋한 신호등보다 더 우수하다는 평가에 따라 2005년 1월부터는 구서독 지역에 설치되기 시작됐으며 앞으로도 구서독의 천여 곳에 신호등맨이 설치될 계획이다.
그 사이 신호등맨에게는 여자친구가 생기기도 했는데, 구동독의 신호등설비회사 대표 로스베르그씨가 1997년 신호등우먼을 개발한 것. 구동독의 츠빅카우와 드레스덴 지역의 횡단보도에는 신호등맨과 신호등우먼이 나란히 설치돼있다.
신호등맨을 둘러싼 인간들의 소송
그러나 위기를 넘기고 독일 전역에서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신호등맨을 둘러싸고 이번에는 사람들 간에 다툼이 일어났다. 신호등맨 도안을 둘러싸고 구서독-구동독 업체간 상표권 다툼이 불거진 것.
지난 봄, 신호등맨 디자인으로 성공을 거둔 구서독 디자인회사 대표 헥 하우젠은 사세확장을 계획하면서 역시 신호등맨 도안을 이용해 물건을 판매하는 구동독의 신호등설비회사가 갖고 있는 상표권 소멸을 법원에 신청했다.
디자인회사 대표 헥 하우젠은 "신호등설비회사가 1997년 다양한 유형의 상표 도안을 미리 등록해 놓긴 했지만 이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며 상표권자가 상표를 5년간 사용하지 않았을 경우 상표권이 소멸되는 법을 이용해 신호등설비회사의 상표권 소멸을 신청했다. 이와 함께 헥 하우젠은 "신호등설비를 제조하던 회사는 신호등맨 상표권과 관련이 없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반면 신호등설비회사 대표 로스베르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신호등맨 상표가 지난 수년간 디자인마크로 충분히 이용되어졌다고 반박했다. 특히 신호등을 만들던 회사가 당연히 신호등맨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
양측에 싸움에 대해 독일 사람들은 "상표권이 양쪽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분쟁은 이미 예견됐던 것"이라며 이번 사건을 동서독 분쟁이라기보다 일반적인 상표권 분쟁으로 평가하고 있다. 단일 품목에 한해서만 상표권을 인정하는 현행 법규상 유사한 물건에 대해 두 사람이 권리를 소유하고 있을 경우 갈등이 일어날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구서독 디자인회사는 의류, 기념품, 완구류 등의 제품에 대한 상표권을 갖고 있었고, 구동독 신호설비회사는 술병, 금속성 기념품 등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었지만 두 회사는 몇 가지 유사 품목에 대한 상표권을 함께 갖고 있기도 했다.
다행히 지난 6월, 양측이 법원의 합의권고를 받아 들이면서 각각 갖고 있는 상표권의 일부를 공동 사용하는 것으로 잠정 합의를 이뤘다. 양측은 잠정합의를 성사시키면서 "합의를 원만히 해결해 신호등맨이 독일통일의 새로운 상징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양측은 지난 6월 잠정 합의 이후 세부내용 조율에 실패, 법원이 정한 합의 시한을 몇 번이나 넘긴 지금까지 최종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구 동독인들의 정체성을 상징하던 신호등맨이 통일독일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여부는 오는 12월 법원에서 판가름 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