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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와 아베 고이즈미 총리는 10월 31일 3차 개각을 단행하면서 극우파 인물을 대거 내각에 진출시켰다. 사진은 대표적인 극우파 인물로 알려진 아소 다로 신임 외무대신(왼쪽)과 아베 신조 신임 관방대신.
ⓒ 연합뉴스

10월 31일 오후 고이즈미(小泉純一郞) 정권의 신내각명단이 발표되었다. 우정민영화사업의 계속과 공무원 정원감축 등을 담당할 우정민영화담당대신 겸 총무대신에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 전 대신을 중용하는 등 전반적으로 일본의 구조개혁을 계속 추진해가려는 인물위주의 기용으로, 지금까지의 '깜짝 인사'와는 다른 실용적인 배치를 하였다는 평이다.

이번 개각의 초점은 '포스트 고이즈미'로 유력시되는 4명의 당내인물 기용에 관한 것이었다. 그 중 타니가키 사다카즈(谷垣楨一) 재무상은 유임되었고, 아소 타로(麻生太郞) 전 총무상은 외무대신에, 아베 신조(安倍晋三) 자민당 전 간사장 대리는 관방대신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포스트 고이즈미' 후보로 거론돼온 4명 가운데, 그동안 총리의 신사참배에 신중한 태도를 취해온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전 관방장관을 제외한 3명이 내각의 주요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일본 국내에서 '실용주의 구조개혁내각'으로 평가되는 이번 개각은 아시아 주변국들의 커다란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31일 밤 아소 신외상은 외무성에서 가진 취임기자회견에서 대체추도시설 건설에 관해 "새로운 위령비가 생기면 야스쿠니 문제가 해결되는가", "죽은 분들은 야스쿠니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는데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겠는가, 이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다"고 하여 사실상 대체시설의 건설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였다.

아베 신 관방장관은 "종래의 방침을 견지하여 계속 참배"할 것을 명백히 했다. 고이즈미 총리의 전격적인 야스쿠니 참배를 비판해 방일일정을 취소했던 반기문 장관이 여론의 비난을 무릅쓰고 일본을 찾아 대체시설 건설을 촉구한 직후의 발언이니 만큼 더욱 외교적 무력감이 크다 할 것이다.

주변국 우려 철저히 무시

이번 내각의 진용을 보며 한 시대가 바뀌었음을 절감하며, 역사문제를 둘러싼 한·일의 근본적인 인식의 틀과 그 조건이 변화하였음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외교를 전담하는 외무대신, 내각을 대표하는 관방대신, 일본을 대표하는 총리대신이 이렇듯 당당하게 공식적으로 야스쿠니사상을 선동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망언각료는 내각에서 경질되는 것이 관례였다. 전후총결산을 부르짖으며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나카소네 총리 시절에도 그러했다. 1986년에 후지오(藤尾正行) 문부상이 한국병합에 대해 "형식적으로도 사실적으로도 양국의 합의에 의해 성립하였다"고 발언하였을 때, 한국정부는 즉시 엄중 항의하였고, 이에 따라 나카소네 총리는 사임을 거부하는 후지오 문부상을 파면해서까지 사태를 수습하였다. 1982년의 제1차 교과서파동, 86년의 제2차 교과서파동 때도 한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항의와 요구에 일본정부는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전후 50년에 해당하는 1995년이 분수령이었다. 그 해 6월에는 와타나베 미치오 외무대신이, 10월에는 에토오 타카미(江藤降美) 총무대신이, 12월에는 오자와 이치로(新進黨) 간사장의 망언이 난무했다. 에토오 타카미 총무대신 망언의 경우 사회당의 무라야마(村山富市) 총리마저 내각 내부의 처리를 주저했다. 한국의 공로명 외교부 장관이 이례적으로 에토오 대신의 경질을 요구하며 코오노(河野洋平) 일본외상의 방한을 거부하였음에도 일본은 듣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당시의 제1야당인 신진당이 에토 장관의 불신임안을 제출하고, 김영삼 대통령과 장쩌민 주석이 공동성명을 내어 비난하기에 이르러서야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당의 초안이 대폭 수정된 '전후50년 결의'조차 중의원을 간발의 차이로 통과한데 그쳤고, 각 지방의회에서는 이마저도 반대하는 결의가 잇따랐다.

이후 망언의 폭과 깊이가 체계화되고 확장되어 가는 가운데, 이시하라 신타로와 같은 우익 정치가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며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이제 망언을 일삼는 자는 더이상 경질과 비난의 표적이 아니라 추종과 찬사의 대상이다. 그래서 그는 망언을 추궁하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망언이란, 발언의 의미와 효과를 스스로 파악하지 못하고 뱉은 말이다. 나는 충분히 그 점을 인식하고 확신을 갖고 말한다. 그러니 나의 발언은 망언이 아니고, 굳이 표현하자면 폭언이다."

그렇다. 이시하라, 고이즈미, 아베, 아소 - 이들의 발언은 더이상 망언이 아니다. 대중적 기반을 가진, 아니 대중적 기반을 갖기 위한, 분명한 확신과 의도를 가진 '폭언'이다. 이번의 고이즈미 제3차 내각의 중요 각료의 구성은 21세기 일본에서 성공하기 위한 정치가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폭언 정치'야말로 대중적 지지를 획득할 수 있는 유력한 열쇠라는 것을.

순간 반발 아닌 지속 대응을

<아사히신문> 보도에 따르면, 개각 본부에서 아소 전 총무상이 "(신내각에는) 나나 아베처럼 매파가 많은데 괜찮은가"하고 고이즈미 총리에게 묻자 그는 "(매파색이 짙다고 한) 후쿠다(타케오) 내각처럼 의연한 태도를 취하는 편이 아시아 외교가 순조롭게 갈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망언'을 '의연한 태도'로 신념화하는 내각과의 사이에 과연 어떠한 외교적 해결의 가능성이 남아 있을까?

이제 순간적인 반발로는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 체계적이고 대중적인 '폭언'에 대해서는 장기적인 외교력의 결집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또 아베, 나카가와, 아소 등이 북한문제를 둘러싸고 강도 높은 발언을 되풀이 해온 점을 고려한다면, 이들로 인해 한반도에 우발적인 전쟁의 불씨가 뿌려지는 일이 없도록 참으로 신중한 대응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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