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을 이을 특별한 아이들
나는 옥이의 손가락이 다시 궁금했다. 성장기의 영양결핍이 손가락을 몽당하게 한 것일까. 몽골인의 피가 섞인 것일까. 혹시 다운증후군은 아닐까? 그러나 두만강가에서 아버지를 그리며 넋두리를 하는 것을 보면, 언어 표현력이 대단했다. 텔레비전 화면 속 소녀 옥이의 울먹이는 말에 나는 감동했다.
“처음에 저도 좀 놀랐어요. 근데 옥이 손가락이… 정말 귀엽지 않던가요?”
교통사고로 화상을 입은 ‘선영이’는 시련을 이겨낸 아름다운 처녀, 손가락이 네 개뿐인 피아니스트 이희아씨도 정말 멋있는 처녀다. 최 총무도 그런 영혼의 눈으로 옥이의 손가락을 보았던 걸까. 옥이를 보러 갈 수 있는지 물었지만, ‘지금 옥이네에 여러 개인적인 문제가 있어 곤란하다’는 답이었다.
남과 북을 잇는 다리 구실을 하고 싶다는 ‘다리공동체’의 이영석 대표는 중국에서 소위 ‘꽃제비’ 아이들을 위한 쉼터를 열었고, 수백 명의 아이들을 얼마간 쉬게 한 뒤 여비를 줘서 고향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러다 중국 공안의 단속과 탈북자 송환이 강력해지는 때에 북으로 갈 수 없는 아이들을 거둬 한국에 데려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하나 같이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을 꺼렸다. 행여 북의 친척이 남한행을 준비하고 있으면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이 대표의 걱정도 있었다. 아이들은 스스로가 사진 찍히거나 자기 이야기가 남의 글 속에 나오는 것을 싫어했다.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의 자존심, 대체 어떤 성질의 것일까. 국내외 기자들이 많이 왔었고, 기사에서 자신이 어떻게 그려졌나를 보고 그 어떤 일방적인 시선에 화가 났을 것 같다. 방송의 다큐멘터리도 가명과 모자이크를 한다고 했는데 막상 얼굴이 깨끗이 나갔다고 아이들은 불만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취재 나왔거든, 하니까 “인권위도 우리 인권 침해하네!”라고 바로 반발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자존심은, 수구초심과 비슷한 ‘생태적 본능’도 작용하고 있지만, 떠나온 나라와 고향, 그리고 아직도 거기 사는 2000만 북한 동포를 대신하고 대표해야 하는 상황이 강제하는 자존심이다. 그러니 아이들이 감당할 수 없는 너무 거대한 자존심이다.
나는 박일한테서도 그런 자존심의 일단을 감지할 수 있었다. ‘박일’은 이 글을 쓰면서 임시로 지은 이름이지만, 19세 청년인데, 고등학교 2학년이다. 박일의 아버지는 의사였고, 어머니는 시멘트화학 엔지니어였다. 박일은 앞으로 간호대학교에 진학할 계획이다.
“중국에 있을 때, 선교사가 되겠다거나 어려운 사람들 돕는 일을 하겠다 하지만, 남한에 와서 살아 보고는 ‘돈이나 벌겠다’로 생각이 바뀌는 애들이 많아요.”
다리공동체는 4층 빌라건물에 세들어 있는데, 2층은 도서실과 컴퓨터 학습실이고, 3층은 301호 302호의 벽을 터서 최경숙 총무 부부 가족과 여자 아이들이 살고, 4층에 이영석 대표와 차승만 사무국장, 남자 아이들이 산다. 한쪽 방에 있는 박일의 책장에는 사십여 권의 책이 알뜰하게 꽂혀 있다.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 한나 아렌트의 <혁명론> 등 한 권 한 권씩 사 모은 듯 저마다 당당한 책들이다. 고교 2학년의 독서목록으로 믿기지 않는다. 지난 여름, 다니는 교회에서 베트남 의료선교활동을 다녀왔는데, 박일은 처방전이 나오면 약을 봉지에 넣고 환자들에게 주는 간단한 일을 했을 뿐이지만, 그때의 경험이 간호대학에 진학하겠다는 의지에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박일은 간호대학보다 사회과학 전공이 맞지 않을까.
박일과 이야기를 나누면, 금방 논쟁판이 된다. 대단히 열정적인 친구이기 때문이다. 영화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를 봤느냐는 물음에, “한국이란 나라도, 북한보다 우월해 봤자 얼마 안 된다는 거죠. 한국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의 것을 북한 사람들도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아셔야 해요”라는 말에 한국영화가 결국 유치할 뿐이었다는 이상한 질책감이 느껴졌다. 북한사람을 만날 때면, 자꾸 이모저모를 우리와 비교하게 되는데, 박일은 불리할 때면 북한이 아닌 다른 나라와 한국을 재기도 했다. 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를 많이 보는 그는 관심도 다양하다.
“한국도시의 간판을 보면 지저분하다는 생각 밖에 안 들어요. 한 번은 텔레비전에 간판에 대해 나오던데, 외국에서는, 블록마다 구석에 지도 표지판을 세워놓아요. 지도에 이 집은 어떤 집, 표시를 해서 사람들이 찾아가게 해요. 근데 한국은 니네가 큰 거 걸면 난 더 큰 거 건다, 이렇잖아요. 선진국에는 백화점에 간판도 없어요. 조그만 딱지 하나 붙어 있을 뿐이에요.”
간판의 글씨는, 침묵 속의 아우성이랄까, ‘진짜 맛있습니다!’ ‘제품 좋습니다!’ ‘어물 싱싱합니다!’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 귀에다 24시간 고래고래 외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폭력이다. 청각장애인들은 특히 스트레스가 심할 것이다. 간판공해만 봐도 알 수 있는, 피말리는 생존경쟁이란 지금 한국의 현실, 박일은 우리 사회의 핵심을 선명하게 짚고 있었다.
절망 속에 피어나는 꽃들
20여 명이 다리공동체에 사는데, 대개 스무 살 아래의 얼마 살지 않은 인생이지만, 아이들은 방대한 삶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나이가 열여덟, 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김선태는 한 쪽 발이 없다. 북에서 다친 것이었다. 옥상에 올라가 같이 담배를 피우며 그 이야기를 들었다.
“교통편이 부족하니까 사람들이 열차 지붕까지 올라가잖아요. 밀려 떨어져 죽는 사람도 있고, 전깃줄에 걸려 죽기도 하고요. 저는 터널을 지나다가 다쳤는데, 쇠에 쓸린 부위가 아물지 않으면 염증이 자꾸 올라와서 잘라야 되는데, 발가락을 다쳤는데 허벅지까지 자른 사람도 있었어요.”
자기는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이다. 새로 맞춘 의족이 잘 맞아 그가 걸을 때 나는 눈치를 챌 수 없었다. 축구나 농구도 가볍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운동을 할 수 있다고, 의족이 잘 맞다고 김선태는 이리 부드럽게 자기 아픈 사연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까.
중국에서 처참한 형편으로 떠돌 때, 죽음의 위기를 수없이 경험하고 통과한 데서 오는 어떤 진정한 자유의 마음이 김선태에게 깃들었기 때문일까. 나는 나보다 열여섯 살이 어린 그가 어른처럼 다가왔다. 그렇지만 김선태는 엄연한 장애인. 한국 사회의 생존경쟁을 어떻게 헤쳐 나갈까. 그도 대학 진학을 희망하고 있을까.
“저는 가축에 관심이 많고, 축산을 하고 싶어요. 북한에 있을 때 소를 키웠죠. 송아지도 있었고. 밤 아홉 시가 지나면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자거든요. 아침 일찍 일어나면, 잔디밭에 이슬이 좍 내려요. 소 끌고 가서 풀 먹이다가 발 다치기 전에는 등에도 타오르고 그랬어요.”
그가 진학하고 싶은 대학은 농업대학이다. 지금은 자기들한테 특례입학 제도가 있지만, 자기가 대학진학을 할 때 혹시 탈북 학생들의 수가 지금보다 몇 배 많아져 지금의 제도가 그대로 있어 줄지, 그는 걱정하고 있었다. 다들 자연 연령과 학령의 격차가 심한데, 탈북 청소년이 한국 제도교육에 편입할 때 최대 고민은 역시 학과 성적이었다. 박일과 친하게 지내는지, 괜히 물어보았다.
“일이는 잘난 체를 해서 좀 그래요.”
박일 이야기를 다시 하고 싶다. 박일은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중국에 나와 있었다. 그런데 공안 당국의 검속에 걸린 그의 부모는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박일은 검속 때 집 밖에 있었고, 그후 남한 선교사의 집과 교회에 머무르다가 남한행을 택했다. 의사와 엔지니어 부부는, 북으로 송환될 경우 별달리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경제유민’과는 상황이 다르다. 송환되고 나서 상당한 고초를 겪었을 것 같다.
그래도 부모가 북한으로 갔고, 박일도 뒤따라 갈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앞으로 네 삶에서 많은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주변 사람들의 강한 권유가 있었고, 박일은 결국 남한행을 택하였다. 자신의 평생에 따라다닐 엄청난 결단을 어린 나이에 해야 했으니, 그만큼 대견하고, 대단한 일이다. 뚜렷한 생각과 판단력을 가진 것에 믿음이 생겨, 나는 그의 정면사진을 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거절한다.
“제가 한국의 학교에 들어갈 때, 3월이었어요. 다른 한국 애들과 같이 입학한 거예요. 자연스럽게 서로 다 새로 사귀는 친구들이니까, 제가 북한에 살았다는 것을 아무도 몰라요. 지난 1년 반, 고교시절을 잘 보냈어요. 근데 이제 와 갑자기 신분이 알려지면, 어떻게 남은 시간을 지금처럼 무난하게 보낼 수 있겠어요. 앞으로 대학입시도 있고, 공부에 더 집중해야 하는데요.”
친구들이 안다고 해서 왜 생활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일까. 그러나 적지 않은 수의 한국 학생들이 북한이라는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에 대해 냉소적이고 비하적인 말을 하는 것을 많이 들었고, 그 엉뚱하고 과장된 말을 들으며 박일은 하루에도 몇 번씩 욱 하는 마음을 참아내야 했다. 자신의 정체가 알려지는 순간, 그간의 모든 일이 서먹하게 될 뿐아니라 공격적인 몇몇 친구들과는 피곤한 싸움의 시간이 시작된다.
“대학에 들어가면, 제가 북에서 왔다는 것을 떳떳하게 밝히고 살 겁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말에도 나는 아무래도 섭섭했다. 남한 친구들이란, “엄마가 밥 주는 것 먹고 돈 주는 것 받고, 그러나 나는 걔들이 평생 경험하지 못할 어려운 생활을 해봤고, 그동안 내가 속했던 사회와 사회, 집단과 집단, 이 모든 사회 경험이 내 몸과 마음에 있으니, 다른 애들보다 경험은 무지 많은 거죠”라고 말했듯이 그는 이미 어른스럽고 뚜렷한 지견을 가지고 있다. 편협하고 유치한 인생을 살고 있는 남한 친구들을 깜짝 놀라게 해주라! 그러나 그는 끝까지 거절한다.
지금의 고통은 기다리면 극복되는 시간과 같을 뿐
북에서 왔다는 것 자체가 지금까지(앞으로도) 박일의 삶을, 아니 다리공동체 모든 아이들의 삶을 특수하게 만들고 있다. 남한에서 자라 정규교육 받고 또 주류 이데올로기에 매일 노출당하며 사는 이들은 죽다 깨어나도 탈북자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부모님께 편지 한 장 쓸 수 없고, 부모도 지금 아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전쟁과 분단으로 생이별을 많이 했지만, 최근까지 부모는 북으로 끌려가고 아들 하나는 남한으로 왔으니, 박일네는 새로운 형태의 이산가족인 셈이다. 군대에 아들 보내놓고 남한의 부모들은 몇 날 며칠 잠을 못 잔다고 하지만, 그 몇 백 배의 고통을 박일의 부모는 지금 겪고 있으리라. 그와 나눈 마지막 대화도 바로 그런 이야기였다. 혹시 북의 부모님이 피해를 볼까봐 사진을 피하느냐고.
“아뇨, 그건 아녜요. 저는 부모님께 피해나 불이익이 간다는 생각 안 해요. 제가 여기서 나쁜 짓만 안하면, 좋은 일만 하고 살면, 거기서 굳이 나를 나쁘게 볼까요? … 북에 계신 부모님에 대한 제 생각을 말해 본다면요. 솔직히 사람이 살다 보면 마땅히 부모님을 떠나야 되고, 부모님은 언젠가는 죽게 돼 있고, 남는 건 자신뿐인데, 지금이나 미래나 과거나 부모님은 언제나 떠날 수 있는 분들이고, 그러니까 결국 자기가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느냐에 모든 것이 따르는 것이지, 내가 지금 부모님이 옆에 없다고 너무 슬프게 생각하면, 스스로를 불행하게 하는 짓이에요.
결국 제가 열심히 살면요, 부모님이 바라는 것보다 몇 배 몇 십 배 열심히 살면요, 부모님의 몫까지 열심히 살면요, 혹 부모님이 북에서 고통을 당해도, 부모님이 제가 사는 걸 보고, 지금은 못 보시지만, 아주 후에 만나더라도, 그때까지 어떻게 되든 간에, 부모님이 알게 되시면, 지금의 고통은 그냥 하나의 시간으로 받아들여지는 거죠.”
제 속에서 얼마나 오래 다듬은 말일까. 내가 알지 못하는 엄청난 고통과 시련을 박일이 겪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났다. 자기와 가족의 고통이 온갖 사연이 끓어 넘치는 인간사의 하나일 뿐이라고 단호히, 그러나 물기 어린 눈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난다, 남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어한 옥이는 두만강 건너 고향마을을 두고 박일과 달리 드러내놓고 울먹거렸다.
“힘들 때는… 돌아가고 싶고, 집이랑 친구들이랑 보고 싶고… 그보다 엄마 아버지 산소에 가고 싶고. … 어릴 때 가 보고 오랫동안 못 가서 산소 가는 길도 지금 생각이 잘 안 나요. 그립지만, 아버지 얼굴도 생각이 안 나요. 어릴 때는 아버지가 어떻게 생겼었는지 궁금하지 않았지만, 지금 벌써 생각이 잘 안 나는데, 시간이 지나면 영영 떠올리지 못할 거 같아, 아버지 사진도 챙겨오지 못한 것이 너무 후회되고… 얼굴은 잘 안 떠오르고 아버지가 그냥 쓸쓸하게 앉아 계신 모습이 흐릿하게 머릿속에 있어요.”
북에서 나온 후 “한 번도 울지 않았다”고 박일은 말했지만, 옥이의 눈물이 결국 박일의 눈물이다. 옥이와 박일의 눈물은 전쟁과 분단 이후 수백만 이산가족의 밖으로 안으로 이미 흘렸던 눈물이기도 하다. 북에서 온 아이들을 남한에서 개인 가정 입양을 한 경우가 단 한 건도 없는 형편을 안다면, 그들의 눈물을 닦아 줄 한국 사람들은 없다.
오직 입북 과정과 연관된 종교단체와 다리공동체와 같은 사회단체의 헌신적인 활동가들만이 그들을 안았다. 그러니 그들의 눈물은 그들 스스로 닦아 내야 한다. “그래도 나를 받아 준 한국이 고맙고 언젠가는 보답할 것이다”라고 박일은 말하듯이, 그들이 우리에게 돌려줄 보답은, 그들이 흘린 눈물로 만든 삶과 자유와 지혜의 빛나는 보석 목걸이가 아닐까. 그러나 우리 중 누가 그 목걸이를 걸 자격이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인권>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