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제 장소는 송담 큰 스님이 계신다는 인천의 '용화선원'. 오며가면서 나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10년의 세월이 가슴 아픈 듯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먼저, 윤동화 여사가 오빠와의 옛일을 회고한다.
"오빠가 어렸을 때 악보를 그리고, 작곡한다며 뭔가 골똘히 생각하곤 했다는데 그때 어른들이 '너 무엇이 되려는고?' 하고 물으면 그 어린 나이에 '음악가가 될 겁니다'라고 말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런 오빠가 30대 때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 형사들에게 끌려갔는데 일제는 오빠의 손톱을 뽑고, 거꾸로 매달아 고춧가루 물을 코에 붓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문을 수없이 가했어요. 고문받은 뒤 오빠 얼굴을 보았을 때 얼굴의 색깔이 흑갈색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처참했습니다. 그 뒤 수없이 도망 다니는 도중 어머님 임종을 못 보았고, 나중에 묘소에 간 오빠가 통곡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납니다.
6·25전쟁 직후엔 부산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고아들을 키웠어요. 그렇게 마음이 따뜻한 분이며, 사상은 잘 모르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오빠에게 빨갱이란 누명을 씌운 것은 너무나 억울하고 통분한 일입니다. 또 그런 과거를 단절시키고 오빠를 조명하는 행사들 그리고 책들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어요. 과거가 없는 오늘은 없는 거잖아요?
나는 오빠에게 죄를 지었어요. 돌아가시기 얼마 전 내가 많이 아픈 나머지 소매를 부여잡고 가지 말라던 오빠를 뿌리치고 온 게 큰 죄를 지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 내가 아프더라도 오빠 곁에 있었으면 그렇게 돌아가시지는 않았을는지도 모르는데……."
윤 여사는 말을 잘 잇지 못한다. 가슴에 맺힌 회한이 쏟아져 나오는 탓일 것이다. 나는 윤 여사에게 윤이상 선생이 왜 불교에 귀의했는지 또 윤 선생의 넋을 용화선원에 모시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어디 가나 윤이상이라고 할 날이 올 것이다"
"처음엔 오빠가 불교를 별로 알지 못했어요. 그런데 오빠가 너무 괴로워하시는 것을 보고 송담 스님에게 말씀드려 스님의 목탁과 염주를 보내드렸어요. 이후 오빠는 목탁과 염주에 의지한 탓인지 많이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오빠를 위해 한국에서 토속적인 물건들을 준비해서 컨테이너에 가득 담아 보내드렸습니다. 그때 컨테이너엔 족보도 같이 담겨 있었지요.
한번은 오빠가 송담 스님과 통화를 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 스님은 '너무 괴로워하지 마라. 모든 것은 네 마음 안에 있다. 어디 가나 윤이상이라고 할 날이 올 것이다'라며 위안을 주셨습니다.
오빠가 구속돼 있을 때 나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갔습니다. 끌고 간 그들은 내게 다짜고짜로 '빨갱이에게 난수표 받은 일 있지? 누구에게 받았나? 조총련을 통해서 받았지?'라며 다그쳤습니다. 그때 남편이 미8군 부사령관 부관이 아니었다면 나는 풀려나지 못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돌아가신 조상을 잘못 모셔 오빠가 잘못된 것 아닌가'라는 생각에 조상의 위패를 용화선원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하나 있었어요. 조상님을 용화선원에 모신 날 오빠에게 전화를 해서 '오빠 조상님을 잘 모셨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오빠가 '이상한 꿈을 꾸었다. 조상님이 서둘러 신을 거꾸로 신고 가시면서 - 용화선원에 간다 - 라고 하셔서 -어머니 나도 갈래요 - 했더니 - 너는 나중에 와라 - 라고 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빠가 돌아가신 뒤 용화선원에 조상님들과 같이 위패를 모시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윤 여사는 윤인숙 교수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인다.
"오빠는 아프기만 하면 늘 '인숙이는 왜 안 오나?'라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오빠가 빨갱이로 몰려 고초를 당하고 있을 때 남한 사람 어느 누구도 가까이하지 않았지만 윤인숙 선생만은 고통을 감수하면서 오빠에게 지극정성을 다해 받들고, 공부를 했습니다. 어느 누가 이런 제자를 아끼지 않겠습니까? 이런 윤 선생을 경계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또 성악으론 유일한 제자인 윤 선생을 빼놓고 추모음악제를 하는 것은 정말 아쉽습니다."
이어서 윤 여사의 남편 석용영씨가 덧붙여 의견을 말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처남 윤이상 선생은 빨갱이가 아닌 정말 민족을 사랑한 사람이며, 남북화해의 물꼬를 튼 장본인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윤이상의 철학이 맨 먼저 표출된 것은 '통일음악회'입니다. 그런데 모든 행사에서 이 과정은 빼버립니다. 아무도 시도하지 못했던 남북화해를 처음으로 끌어내기 시작한 이 공을 묻어버리는 것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또 윤 선생의 어릴 적, 그리고 청년 시절이 묻히지 말고 새롭게 조명되기 바랍니다. 곧 윤 선생에 대한 영화도 만든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 과정이 제대로 담긴 작품으로 태어날지 지켜볼 것입니다."
윤이상 넋이 지켜보고 있는 듯
10시에 시작하는 추모회에 겨우 시간을 맞춰 도착한다. 처음 참석하는 불교식의 추모제에 좀 낯설기도 했지만 윤이상 선생을 추모한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경건해진다. 송담 큰 스님의 법문을 들을 수 있었다.
"패를 갈라 싸우고, 쇠고랑을 차며, 죽이는 일들은 부질없다. 사바세계에 인연이 있다면 돌아가신 분들도 금방 환생하여 올 것이다. 무상을 철저히 깨닫고 재산, 부귀, 공명을 탐하지 마라. 항상 '이 뭐꼬?'를 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법당 안은 목탁과 죽비 소리에 따라 '금강반야바라밀경'을 낭랑한 목소리로 모두 같이 염송한다. 향내음이 그윽이 퍼지면서 윤이상 선생의 넋이 감응하는 듯하다. 윤인숙 교수가 추모음악회 때 맨 앞자리에 윤이상 선생의 넋을 위한 특별석을 마련해 놓았는데 여기서는 굳이 특별석이 필요없다. 법당 안이 모두 특별석일 따름이다.
일행을 안내하고, 모신 윤동화 여사의 아들 석철진 경희대 교수는 조심스럽게 한 마디 건넨다.
"저는 여기만 오면 신기하게도 조상 특히 외삼촌께서 '너 왔니?' 하신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외삼촌이 분명히 여기 계셔서 저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믿음을 저는 갖습니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시조시인이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나 외삼촌은 어렸을 때부터 외할아버지의 시조를 들으면서 자라셨을 것입니다. 그런 영향으로 외삼촌이 음악을 하셨고, 외삼촌의 음악에서 은연중 그것이 표출되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어머니도 그런 영향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편안해질 수 있었을 터고, 조상 그리고 외삼촌의 위패를 모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외삼촌과 관계를 짓고 있었던 모든 분들이 이젠 함께 모여 외삼촌을 기리는 일에 나섰으면 합니다."
윤인숙 교수는 별 말이 없었다. 윤 여사의 말씀에 가슴이 북받치는 듯했다. 그리고는 헤어지기 전 윤이상 선생과의 마지막 만남을 회고한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선생님이 많이 아프실 때의 일입니다. 제가 선생님 댁을 방문했을 때 선생님은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에 앉으셔서 먼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고향이 너무나도 그리우셨을 테지요. 그러다가 갑자기 '라라라~ 라라라~' 하시면서 노래를 읊조리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생님 그거 진주조개잡이 아녜요? 라고 여쭈니까' 그래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거 아니냐?' 하시면서 계속 부르셨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노래가 끊겼어요. 그래서 왜 그럴까 하고 선생님 얼굴을 살펴봤더니 목이 메어 더 부르지를 못하시는 겁니다. 그러다 일어서서 한발 한발 발을 떼놓으셨어요. 선생님께서는 제게 뭔가 말씀하시려는 듯했었고, 손을 잡아주기를 바라시는 듯했지만 제가 손을 미처 잡아드리지 못했는데 그만 엎어지셨습니다. 그것이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래서 11월 17일 단국대 난파음악관에서 열리는 추모음악제에 테너 이영화씨에게 그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한 다음 윤 교수뿐 아니라 아무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내 가슴에도 슬픔이 미어져 오는데 윤이상 선생이 끔찍이도 사랑했던 동생과 매제, 그렇게 아끼던 제자 그들의 심정이야 오죽할까? 날씨가 화창한 윤이상 선생의 서거 10주기를 맞아 우리는 선생의 제대로 된 복권과 재조명을 간절히 염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