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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버지.

짙은 초록빛을 자랑하던 버즘나뭇잎이 녹슨 철판처럼 얼룩지더니 슬며시 스치는 가을바람에도 맥없이 떨어집니다. 이글거리는 땡볕을 떡하니 막아내어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던 여름날의 청청함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나뭇잎은 알고 있겠지요, 자연의 때를. 흙에서 양분을 얻었다가 낙엽이 되어 다시 땅으로 떨어진 나뭇잎을 쓸며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문득 아버지가 떠오르면 저도 모르게 시야가 흐려집니다. 손발이 왜 그리 찬지요! 살아 있는 사람의 손발이라고는 여겨지지가 않습니다. 평소 손이 따뜻하다고 자랑하시던 당신께서, 이제는 막새바람조차도 춥다고 방문을 닫으라고 하시는 까닭은 어인 일인지요! 지난 주에 아버지를 뵙고 다시 올라올 때, 당신 앞에서 겉으로는 웃었지만 뒤돌아서 속울음을 삼켜야만 했습니다.

▲ 이번 추석때 벌초하시는 아버지
ⓒ 박종인
당신의 모습이 너무도 낯설게 느껴집니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하시는 말씀도 예전 같지 않으십니다. 우리와 이별하기 위해 준비하시는 것인가요? 얼마나 더 핼쑥해지고 마르셔야 우리 곁을 떠나시나요!

주변 사람들은 말합니다. 암이라는 놈은 병치레로 고생 다하고 환자의 기력이 다 빠지면 그때야 숨을 앗아간다고. 힘겹게 기침을 하시는 당신의 모습을 생각만 해도 저는 코끝이 찡한데, 매일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봐야 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오죽하겠습니까. 당신이 말씀하셨듯이 어머니 앞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도 행복입니다. 씹지 못하시는 당신을 위해 수저로 배를 긁어 배즙을 먹이시는 어머니를 보며, 깊을 대로 깊은 미운정과 고운정이 생각납니다.

아버지! 왜 당신은 어머니에게 그리고 자식들에게 그렇게도 못하셨습니까. 제 어린 시절은 당신에 대한 두려움과 미움으로 가득했습니다. 나는 커서 아버지처럼 되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으로 이를 악다물던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우리 삼형제가 술을 멀리 하는 것은 당신에 대한 질림에서 비롯됨을 당신도 아실 겁니다.

아버지, 하지만 저는 어쩔 수 없는 당신의 자식인가 봅니다. 고릴라처럼 튀어 나온 입과 못생긴 발도 그렇지만, 이보다 더 닮은 것은 남을 이용해서 배부르게 살기보다는 오히려 떼일 줄 알면서도 빌려주는 우둔함입니다.

▲ 아버지랑 벌초하다가 잠시 쉬며
ⓒ 박종인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고 집안의 사정보다는 남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더 신경 쓰시던 당신의 노예근성을 원망했지요. 하지만 저도 어느덧 어른이 되어보니 당신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는 걸, 그게 당신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였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태어난 지 열 달만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열두 살이 되던 해에는 어머니마저 여의어 눈칫밥을 먹으며 남의집살이로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지요. 6·25전쟁 때 당신의 형이 동네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았고, 어린 당신은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빨갱이 취급을 당하며 흠씬 두들겨 맞으셨죠. 힘도 없고 의지할 데도 없는 어린 당신은 남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언젠가 큰형이 말하더군요. 아버지는 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전혀 배우지 못했기에 우리들에게도 아버지의 역할을 제대로 못한 것이었다고. 큰형도 이제 아이들이 셋이나 있어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애를 쓰지만 당신에게서 아버지의 본을 받지 못했기에 어렵다고, 그래서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더욱 노력을 한다고.

아버지, 지금의 두 형 말고도 형이 더 있었다는 것을 스물이 다 되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일찍 부모를 여읜 당신에게 첫아이는 그 무엇보다 의미 있는 아이였을 겁니다. 당신을 아버지로 만든 그 아이를 안고 동네방네 자랑하시며 좋아하셨다는 얘길 어머니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러기에 두 돌도 넘기지 못하고 첫아이가 세상을 떠나자 그 상심을 달랠 길 없어 술독에 빠지기 시작했다지요. 첫아이를 잃고 나서 어쩌면 당신은 아이를 너무 사랑하면 신이 시기해서 일찍 데려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우리들에게 애정을 쏟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 마을 뒷동산(한 달 반 전의 아버지 모습)
ⓒ 박종인
아버지, 당신 때문에 참 많이 울었습니다. 어려서는 무서워서 울었고 커서는 안타까워서 울었습니다. 그림자처럼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당신. 이해할 수 없는 당신을 보며 일찍 가셨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런 생각이 올무가 되어 나를 더욱 울리기도 했습니다.

61세 생신 때 기억나시나요. 당신의 회갑연을 해드리지 못해 가족들만 모여 식사를 하는 게 못내 송구스러웠는데, 당신은 공장에서 경비로 일하며 추운 겨울에 담요 한 장 덮고 덜덜 떨면서 밤을 지샌다고 말씀하셨죠. 술을 마시면 으레 하시는 주사였지만 저에게는 가슴을 찌르는 꼬챙이였습니다. 군대 제대 후 그렇게 펑펑 울어본 적이 이제껏 없었습니다. 자꾸만 당신의 지난 모습들이 떠오릅니다. 좋은 이미지보다는 그렇지 못한 부분이 더 많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것이 그립기만 합니다.

아버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서로 간에 말은 하지 않지만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당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빨리 나아서 고구마도 캐고 고추밭도 정리하겠다는 당신은, 달포 가량 남은 일흔 세 번째의 생신조차 기약하기 어려울 정도로 쇠약해만 갑니다. 보름 전에 뵐 때까지만 해도 거동을 하셨던 당신은, 이제 큰아들에 의해 씻김을 받아야만 하고 음식마저 드시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고 있습니다.

고향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을 제일 부러워하는 것을 당신도 아시지요. 비록 가장 가난했지만 자식들 모두 스스로 대학을 다 나오고 목사로, 문화사역자로, 공무원으로 있음을. 당신은 우리에게 돈을 주시지는 않았지만 누렁소처럼 우직함과 성실함을 보이셨습니다. 당신이 남에게 베푼 선행들이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축복이 되었음을 기억하세요. 당신은 좋은 씨앗들을 남기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죽어도 행복하다고 하신 그 말씀대로 당신은 참으로 행복하십니다.

죽음이란 이 세상에서 다시는 볼 수 없는 이별이기에 슬프지만 또한 우리 삶에 필연적인 과정임을 인정합니다.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어 다시 나비로 거듭나듯 아버지는 저 세상에서 새로 태어날 것입니다.

당신의 손은 당신의 마음처럼 늘 따뜻했습니다. 따스함을 다 나눠주시고 이제 차갑게 식어버린 당신의 손을 붙잡으며 마지막 인사를 드립니다. 이제껏 안녕히 계세요 라고 인사를 드렸는데, 이제는 이렇게 인사드립니다.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2005년 10월의 마지막 날

이천에서 셋째 아들이 아버지께 마지막으로 쓰는 편지

▲ 어딜 가시나요?
ⓒ 박종인

덧붙이는 글 | 부모님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처럼 아버지는 서둘러 가셨습니다. 당신께 보낼 마지막 편지가 정말 마지막 편지가 되어 버렸고, 결국 살아 생전에 읽어드리지 못하고 영정 앞에 바쳤습니다.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채 한 달도 못되어 가신 아버지는 이미 정리를 다 하신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천국에 대한 확신도 있었고, 어머니와 자식과의 관계에서도 맺혔던 감정들을 다 푸시었고, 가진 재산 하나도 없이 참으로 깨끗하게 세상을 정리하셨습니다.

아버지의 73회 생신(12월 3일)을 맞기 힘들 거란 생각을 했는데, 아버지는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하는 양력의 생신날 가셨습니다. 음력 11월 2일에 태어나신 아버지는 양력 11월 2일에 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비록 육신은 재로 변했지만 그림자의 여운은 한동안 내 곁에 머물 것 같습니다. 

불과 한달 반 전인 추석 때 찍은 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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