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얼마나 다정한 대화입니까? 홍성민(왼쪽)과 장진호(오른쪽)
이 얼마나 다정한 대화입니까? 홍성민(왼쪽)과 장진호(오른쪽) ⓒ 윤형권
가을을 재촉하는 비에 가로수 잎이 뚝뚝 떨어지는 11월의 첫째 주 일요일(6일) 오후 2시. 서울 남대문로에 있는 '강영월 감자옹심이'라는 식당 2층에서는 중년의 아주머니 아저씨들 60여명이 모여 서로의 이름도 잘 모르는데 반말을 해대며 왁자지껄 떠들며 정담을 나눈다.

"난 중리에 살았던 이철구다."
"나는 윤여필이야. 사월리에 살았었지."
"애들아 반갑다. 난 이양희야."
"야~ 너 용각이 아냐? 어어 너 석태지? 짜식 여전하구나."

30년만의 만남. 코흘리개 초등학교 동창들이 만나는 자리다. 논산시 광석면에 있는 광석초등학교 46회 졸업 동창들이 서울 한복판인 남대문 근처에서 만났다. 촌놈들이 서울에서 만난 것이다.

'빛나는 돌, 광석(光石)'은 금이라며 자부심을 지니고 다녔던 초등학교. 사람들이 도회지로 나가 사는 바람에 지금은 학교에 가 봐도 썰렁하다. 당시 한 학년에 4반까지 있었으니 동창생이 남녀 250여 명이나 되었다. 시골치고는 당시로서는 제법 큰 학교였다.

바람 빠진 고무공으로 공차기를 하는 남자아이들, 플라타너스 나무 그늘 아래에서 고무줄놀이하던 여자아이들, 검정 고무신을 던지며 달리기 놀이를 하던 아이들. 점심 시간이면 재잘대는 소리와 함께 운동장은 뽀얀 먼지로 뒤덮였다. 또 쉬는 시간이면 교실은 우당탕퉁탕 거리는 씨름장으로 변했다.

누가 싸우기라도 하면 와! 하고 몰려들어 구경을 하곤 했다. 코피가 터지면 그 애는 그날 싸움에서 진 것이다. 당시에는 그게 싸움의 규칙이었다. 만약 싸움에서 돌멩이나 몽둥이 등을 쓰는 애가 있다면, 이 아이는 싸움판에서 퇴출된다. 신사답지 않게 비겁한 녀석이라고 낙인 찍히면 싸움을 못한다. 왜냐면 싸움판에서 상대를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생각을 하면 아련히 떠오르는 얼굴들.
눈을 감고 생각을 하면 아련히 떠오르는 얼굴들. ⓒ 윤형권
5학년 때로 기억이 난다. 우리 반에 새로 전학을 온 전형철이라는 애가 있었는데, 도회지에서 살다 온 형철이는 옷차림새도 말쑥했고 눈과 코가 유난히 컸다. 하루는 반장인 김용각이라는 애하고 한판 붙었다. 체격은 비슷했지만 형철이가 도회지 아이라서 싸움을 잘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싸움은 의외로 쉽게 끝났다. 둘이 엉켰다가 떨어지면서 용각이가 형철이의 뺨을 때렸는데, 그만 형철이 코에서 뻘건 코피가 줄줄 터져 나왔다. 용각이의 판정승이었다. 형철이는 양쪽 볼에 피를 묻히고 흰색 남방이 벌겋게 물들었어도 자꾸 덤벼들었다. 아이들이 겨우 말려서 진정이 되었다.

이 싸움 후에 형철이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인데, 형철이는 원래 코피를 잘 흘린다고 했다. 또 형철이는 시골학교에서 벌어지는 싸움의 룰을 잘 모르고 자꾸 덤벼들었던 것이다. 싸움이 있고 난 후 용각이와 형철이는 사이좋게 지낸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싸움의 순위가 매겨졌다. 일단 키가 크고 덩치가 큰 아이들이 상위 순위를 차지했지만 간혹 몸집이 작아도 상위에 랭크된 아이들도 있었다. 이런 애들의 특징은 첫째, 코피를 잘 흘리지 않는다. 둘째는 여간해서 울지 않는다. 셋째는 끈질기다. 웬만큼 맞아도 도망가지 않는 스타일이다.

때로는 선배들도 싸움 잘하는 후배의 주먹을 무서워하기도 했다.

유지문이라는 아이와 4학년부터 5학년까지 한 반을 한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지문이는 당시 체격이 컸다. 얼굴은 하얗고 갸름한 미남인데 주먹이 좀 셌다. 웬만한 선배들도 지문이 주먹을 무서워했다.

이 친구는 일 주일에 한두 번은 주먹질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친구였는데, 그중에 절반은 선배들과의 결투였다. 선배들에게 맞을 일이 있다 싶으면 지문이를 앞세워 학교를 빠져나가기도 했다. 그래서 지문이는 의리가 있는 친구로 통했다. 서울에서 생활하는 지문이의 주먹은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도 가끔 쓰는 것 같았다.

"지문아! 주먹은 초등학교 졸업한 후로는 쓰는 게 아니다. 그 당시에는 싸움에 대한 룰이 신사적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

대전, 서울, 부천, 인천, 논산, 청주 등 전국방방곡곡에 살고 초등학교 친구들
대전, 서울, 부천, 인천, 논산, 청주 등 전국방방곡곡에 살고 초등학교 친구들 ⓒ 윤형권
싸움에 대한 추억은 여자애들 사이에서도 많다.

여자아이들의 싸움은 주로 머리채를 잡고 서로 당기며 넘어뜨리는 게 일반적인 결투방식이었다. 여자아이들 싸움의 세계에서는 먼저 우는 아이가 지는 거다. 여자아이들 중에서 싸움 잘하는 아이는 주로 집에서 부모님의 농사일을 잘 거들어 주는 성실한 효녀들이었다. 왜냐면 일을 하면서 단련된 팔뚝의 힘이 싸움에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여자아이들의 싸움의 순위는 남자애들과는 달리 체격하고는 비례하지 않는다. 여자 아이들 중 싸움을 잘하는 아이는 일단 독해야 한다. 서로 머리채를 잡고 흔들어대더라도 울지 않아야 진정한 승자가 되기 때문이다.

광석초등학교 46회 여자아이들 중 싸움을 잘한 애는 키가 매우 컸던 고현숙이었다. 이 친구는 웬만한 6학년 형들보다 키가 크고 덩치도 좋았다. 같은 또래 남자애들도 현숙이를 비켜갔다. 또 율리에 살았던 김인자와 조호순이가 싸움에 일가견이 있었다. 이 애들은 방과 후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많이 했던 아이들이다. 심성이 아주 착했는데, 이 애들을 잘못 건드리면 호되게 당했다.

농사일을 안 해도 순전히 깡으로 싸움을 잘했던 여자아이는 천동리에 살았던 윤여희라는 아이다. 키는 아주 작았는데, 참 악바리였다. 남자애들도 여희한테 걸리면 혼쭐이 났는데, 울면서도 자꾸 덤벼들어 기어코 항복을 받아냈다. 지금은 공주의 어느 학교에서 무용 선생님을 한다고 하던데, 이 기사를 보고 연락이나 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있다. 남자애들 중 싸움을 잘하는 아이는 남자들 세계는 물론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도 대접을 잘 받았지만, 여자애들 중 싸움을 잘하는 아이는 남녀를 불문하고 후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무슨 여자애가 그리도 독하냐? 또 힘은 왜 그렇게 세냐?" 싸움 잘하는 여자아이들에게 흔히 하는 말이다.

얼굴은 달라도 동심을 느끼는 마음은 같다.
얼굴은 달라도 동심을 느끼는 마음은 같다. ⓒ 윤형권
시골초등학교는 동네아이들끼리 한패가 되어 패싸움을 하기도 한다. 학교에서 어느 동네아이가 맞았을 경우, 그 동네에서 주먹이 가장 센 아이가 대장이 되고 힘깨나 쓰는 아이들 대여섯 명이 때린 아이가 있는 동네 근처로 원정을 간다. 싸움 장소는 주로 무덤가에서 이루어졌는데 평평하고 잔디가 잘 깔려서 싸움하기에는 딱 좋은 곳이었다.

"야! 성길이 네가 우리 동네 기형이를 먼저 때렸다며?"
"그래 어쩔래? 한판 할래?"
"먼저 코피 흘리는 사람이 지는 거다!"
"야 임마, 그런 것은 다 알아. 일대일로 할 거냐, 한꺼번에 할 거냐? 말해 봐."

본격적인 싸움에 앞서 서너 발짝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서 말싸움부터 해댄다. 이러다가 혹여 싸움판에 나온 아이들 중 '주먹'으로 이름난 6학년 형을 둔 아이라도 끼여 있으면 분위기는 금방 한쪽으로 쏠린다. 6학년 형의 '후환'이 두렵기 때문이었다. 이럴 땐 대개 말싸움으로 끝이 난다.

"한번만 더 기형이를 건들이면 그땐 죽을 각오해라! 알았냐?"
"야! 겁나면 겁난다고 해. 말로만 그러지 말고."

동네아이들의 패싸움은 이렇게 싱겁게 끝나기 일쑤다.

순박하다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인가 보다. 전운이 감돌았던 다음날 아침, 학교에서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키득키득 거리며 보자기에 담아온 감자와 옥수수를 나누어 먹었다. 이러면서 친구들은 정을 쌓았다.

추억의 보따리를 풀자면 아마도 초등학교 시절의 보따리가 중·고등학교 시절의 보따리보다 훨씬 크고 그 맛이 구수할 것이다.

서울의 한복판인 남대문로에서 모인 시골촌놈들인 광석초등학교 46회 졸업생들의 이야기보따리는 시간이 갈수록 자꾸 더 풀어진다. 30여명이 버스를 빌려 서너 시간을 달려 올라왔지만 자리를 뜰 줄 모른다. 세월이라는 주름살이 깊게 패인 얼굴들이지만 마주하고 있으니 열 살짜리 소년소녀가 된다. 재잘거리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 것이 깊어가는 가을 밤보다도 더 길고 긴 추억의 터널로 빠져들어 갔다. 애들아, 건강한 모습으로 내년 가을에 다시 만나자.

건강하게 지내다 다시 만나자.
건강하게 지내다 다시 만나자. ⓒ 윤형권
꿈은 하늘에서 잠자고 추억은 구름 따라 흐르고
친구여 모습은 어딜 갔나 그리운 친구여

옛일 생각이 날 때마다 우리 잃어버린 정 찾아
친구여 꿈속에서 만날까 조용히 눈을 감네

슬픔도 기쁨도 외로움도 함께 했지
부푼 꿈을 안고 내일을 다짐하던
우리 굳센 약속 어디에

꿈은 하늘에서 잠자고 추억은 구름 따라 흐르고
친구여 모습은 어딜 갔나 그리운 친구여

- 조용필의 노래 <친구여>

덧붙이는 글 | 이글을 읽은 광석초등학교 46회 친구들아! 선생님들께 안부 좀 여쭙자꾸나. 궁금한 사람은 기사 댓글이나 쪽지로 연락 주세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나무를 깎는다는 것은 마음을 다듬는 것"이라는 화두에 천칙하여 새로운 일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