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극장이 돌아왔다. 지난 4월 잠정 중단됐다가 지난 29일 '태릉선수촌'을 시작으로 재개했다. 베스트극장은 14년간의 역사를 가진 장수프로그램이다. 이런 프로그램이 잠시 중단됐던 이유는, 참신한 소재를 발굴해서 완성도 높은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잠정 중단됐다가 6개월간의 장고 끝에 내놓은 베스트극장의 '태릉선수촌'은 태릉선수촌을 배경으로 유도, 수영, 체조, 양궁 등 네 종목 선수들의 사랑과 슬럼프, 진로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엘리트 체육인들의 일상을 통해 일반적으로 20대가 가질 법한 고민들을 재구성한 것.
그리고 기존 베스트 극장이 70분짜리 단막극이었던 것에 비해 이번 '태릉선수촌'은 4부작 연작극(한 부는 두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이다. 앞으로 베스트극장은 연작극뿐만 아니라 기존의 단막극, 그리고 텔레비전용 영화까지 다양한 시도를 할 거라고.
형식과 내용 면에서 변화를 시도하는 베스트극장의 출발은 순조롭다. 첫 단추를 잘 끼웠다고 생각한다. 연작을 기획한 것도 참신하고 신선한 소재를 택한 것도 좋았고 현실인지 거짓인지, 하는 의문을 가질 만큼 일상성을 확보한 것도 참신했다.
그래서 베스트극장은 시청률이 잘 안 나오는 시간대인 토요일 11시40분에서 다른 시간대로 옮겨달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미니 시리즈로 만들어 달라, 재방송해달라는 네티즌의 요구가 높을 정도로 호응을 얻고 있다.
'태릉선수촌'은 우선 소재가 참신했다. 태릉선수촌이라는 베일에 가려져 누구나 궁금해 하는 소재를 가져온 것도 좋았다. 소재가 참신하다고 다 재미있는 건 아니다. 참신한 소재로 흥미를 모았다가 막상 뚜껑이 열리자 형편없는 구성에 오히려 더 큰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프로그램도 있었기에, 소재의 참신함은 결코 전부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이 극은 캐릭터도 완벽했다. 기존의 단막극이나 드라마들은 상황이 바뀌면 성격이 변하기도 한다. 이랬다 저랬다를 반복하는 불분명한 캐릭터로는 결코 시청자를 잡을 수가 없는데 이 극의 캐릭터들은 정체성이 분명했다. '경기 출전 전 공포감에 시달리는 유도선수 '민기'를 비롯해 천재이기에 오만방자할 수밖에 없는 체조선수 '마루' 등 정체성이 분명한 캐릭터들이 드라마를 더욱 완성도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극은 일반적으로 젊은 사람이 가질 법한 고민을 담고 있다. 즉 현실을 반영했다. 네 명의 운동선수들이 겪는 좌절과 사랑 그리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 등 이런 문제는 일반적인 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감정이기에 보편성을 획득했다고 볼 수 있겠다. 시청자는 네 젊은이를 보면서 또 감정에 동화되며 공감대를 갖게 되는 것이다.
사실 내게 베스트극장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 프로그램이었다. 베스트극장을 보며 20대를 보낸 내게 베스트극장은 영화 대체품이었다. 베스트극장은 나의 문화적 갈증을 해소시켜줄 뿐만 아니라 인생을 경험시켜줬고 삶에 대해 알려준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베스트극장을 아끼는 시청자로서 베스트극장이 오래도록 살아남아 영화와 드라마의 가교 역할을 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베스트극장은 다른 드라마와의 차별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차별화 하냐고?
예를 들어, 드라마가 잘 쓰는 소재인 혈연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잃어 버렸던, 또는 생각도 않았던 언니와 동생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또는 생부와 생모를 만나기도 하고. 이런 경우 대체적으로 드라마들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가치관을 반영해 관습적으로 부둥켜안고 울고불고 난리다. 오매불망 그리던 혈육을 만났으니 피눈물을 흘리며 우는 건 당연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분명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내는 게 참신함이고 관습적 표현을 피하는 길이다. 그리고 다른 드라마와 차별화 되는 이유다.
10여 년 전에 방송됐던 베스트극장 '지하철 2호선'은 '혈육상봉 장면에서는 당연히 울음바다가 돼야 한다'는 드라마의 관습을 비켜갔다는 면에서 매우 참신했고 아직까지도 수작으로 기억되고 있다.
오빠는 고아원에서 자랐고 어른이 돼서는 달동네에 살면서 지하철에서 구두를 닦으며 살았다. 반면 여동생은 어렸을 때 부잣집에 입양돼 대학생이 됐다. 그렇게 다른 삶을 걸어온 오누이가 다시 만났다. 이런 경우 일반적인 드라마라면 부둥켜안고 울고불고 할 게 당연하다.
그런데 이 극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동생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아온 오빠에게 동생은 오매불망 그리운 존재였지만, 동생에겐 그렇지 않았다. 부잣집에서 예쁜 옷 입고 맛있는 음식 먹으면서 친절하고 교양 있는 양부모 아래서 자라온 동생은 오빠 같은 건 잊고 살았었다. 그러니 오빠에 대한 그리움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만난 자리에서 동생은 담담했다. 예의 바르고 친절하고 담담한 동생을 보면서 오빠는 더 큰 슬픔을 느꼈다.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나도 그냥 '안녕'하면서 지나가버릴 그런 사이가 돼 있다는 걸 오빠는 비로소 확인하고 지금에서야 동생과 완전히 헤어지게 됐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동생과 헤어진 슬픔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만두를 꾸역꾸역 먹는 장면은 정말 가슴에 와 닿았다.
일반적으로 드라마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은 무시한 채 오빠와 만난 동생은 의례 부둥켜안고 눈물콧물 흘려야 한다고 혈연의 정은 이렇다는 걸 보여 왔었다. 허나 이 극은 '지하철' 이라는 제목에서 암시하듯 점점 개인화돼가는 현대인의 삶을 그렸다. 혈연의 정조차도 그다지 의미를 갖지 못하는, 현대인의 그런 외로운 모습을 표현했다고 본다.
베스트극장이 드라마의 관습을 부정하면서, 일상 속으로 접근해 삶의 뒷면에 숨겨진 진실에 눈을 돌리고 문학이나 영화가 추구하는, '삶의 진실'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한다면 언제든 잘 만든 프로그램은 시청자의 반응을 얻기 마련이므로 베스트극장의 앞날은 맑으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