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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으로


“오래간만이오. 차선달!”

객잔의 헛간에 구금 되어있던 차예량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들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들은 두청과 서흔남이었다.

“귀인을 이런 곳에 모셔 놓다니! 어서 모셔서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 상을 마련하여라!”

두청의 호령소리에 객잔의 하인들이 신속히 차예량을 데리고 나가 미리 받아놓은 뜨끈한 목욕물에 들어가게 하였다. 차예량이 목욕을 마치고 나오니 하인들은 깨끗한 옷을 받쳐 들고 입힌 다음 정중히 객잔의 가장 큰 방으로 안내했다.

“그래, 그동안 생각은 해 보셨소?”

차예량은 두청의 기분을 상하게 할 작정으로 크게 코웃음을 쳤다.

“생각이라니? 역적이 되란 말인가?”

두청은 옆에 있는 객잔주인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소리쳤다.

“차선달에게 제대로 얘기를 드리지 않았느냐?”

두청의 질책에 객잔주인은 아무 말 없이 쓴 웃음만 지을 따름이었다.

“내 다시 말하리다. 우직스럽게 어리석은 조정에 목을 맬 필요가 무엇 있소? 우리와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힘을 합칩시다.”

“계화는 어디에 있소이까?”

차예량이 두청의 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딴소리만 하자 서흔남이 혀를 찼다.

“아까 의논한 대로 그냥 의주로 돌려보냅시다! 어차피 말을 들어먹지 않을 자요!”

두청이 서흔남에게 엄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자꾸 힘으로 억누르려 하니 장초관도 그렇고 차선달도 꺼리는 것이 아니냐! 자, 내 말을 잘 들어 보오 차선달.”

차예량은 아예 고개를 돌렸지만 이에 상관없이 두청의 말은 계속되었다.

“이미 조선에 왕은 없소이다. 임진년 때 왕은 도성을 버렸고 그 때 이후로 왕은 없는 것이오. 왕은 그 이름뿐이고 대신들은 가끔씩 왕의 비위를 맞추며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있소. 북인이 줄을 잘 대어 광해군이 왕이 되었을 때 국정을 휘어잡았지만 왕의 태도가 예학에 어긋남이 있어 서인이 들고 일어나 지금의 왕이 자리에 앉은 것이 아니오? 병자년에 청의 왕에게 무릎을 꿇은 건 진짜 왕이 아니라 결국 허깨비에 불과한 것이오. 서인이 아니라 남인도, 소북(小北), 대북(大北)도 나을 건 조금도 없소. 왕을 폐하고 다른 이를 세우는 정변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국정을 농단하는 대신들을 이용해 세력을 키우다가 사대부들을 모조리 쓸어 버리는 일이오. 그리고 난 뒤에 새로이 왕을 세워 위엄을 높인다면 그 누가 이를 그르다고 할 것이오? 우리가 아니래도 사대부들은 싸울 의지조차 없었소! 지금의 왕이 무릎을 꿇은 상대는 청의 홍타이지가 아니라 왕을 쥐고 흔든 사대부들이오! 국왕조차 아들을 심양에 보내었는데 그들은 대신 셋만 볼모로 보내고서 멀쩡하지 않소?”

차예량은 어느새 고개를 돌려 두청을 바라보며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을 두청은 꾀하고 있었고 차예량은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차선달이나 장초관 같은 이들이 이런 사정을 모르고 조정의 입지만 살려주니 나로서는 난감할 따름이외다. 군병을 모아 남한산성 앞에 이르러 몽고군과 싸울 때 순순히 물러나 준 이유는 차선달과 장초관을 따르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오! 우리로서는 수 십 년이 걸려도 이루어 내지 못한 백성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힘을 당신들은 가지고 있소! 장초관하고는 묘하게도 일이 꼬여 우리와 목숨을 걸고 다투게 되었지만 차선달은 우리와 싸울 이유가 하등 없소이다!”

두청은 자신의 앞에 놓은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키더니 소매에서 사금파리 하나를 꺼내어 차예량 앞에 놓았다.

“이 증표는 큰 그릇 하나를 산산조각 내어 만든 것이외다. 그 조각은 백 여 개에 이르지만 이를 가진 자는 아직 이십여 명에 불과하오. 우리는 이 증표들이 모여 다시 그릇하나를 이루는 나날을 고대하고 있소. 자, 어찌 하시겠소? 이 증표를 받으면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것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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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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