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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시골과 도심이 공존하는 산동네 입구
2005 시골과 도심이 공존하는 산동네 입구 ⓒ 김선호
이산 저산, 산을 다니다 보니 산이 더 좋아졌습니다. 올 봄부터였네요. 꽃이 피니 산에 가고 싶었고, 더위를 피해 계곡을 따라 여름산도 꾸준히 올랐습니다. 주로 주말에 아이들과 함께 산행을 하고는 했습니다.

가을은 숲이 가장 아름다울 때라서 당연히 산을 찾았습니다. 설악산과 오대산의 단풍은 듣던 대로 화려할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산을 찾았더군요. 가을이 무르익을 대로 익을 무렵, 우연히 주변을 둘러보니 창밖으로 보이는 주변 산들도 고운 단풍색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우리, 우리 동네 산들도 한번 돌아보면 어떨까?" 남편이 제안을 했습니다. 기온이 떨어지고 입동까지 맞이했으니 이젠 겨울준비를 할 때입니다. 그러니 아이를 데리고 멀리 가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겠다 싶은 차에 솔깃해지더군요. "그거, 좋은 생각인데?"라고 당장에 맞장구를 치자, 아이들은 "에이, 또 산이야?"라며 불평을 합니다.

그런 아이들을 우리가 사는 동네가 얼마나 산이 많은지, 그 많은 산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보는 것도 재밌지 않겠냐고 설득해 봅니다. 산에 가면 좋은 것들을 생각나는 대로 늘어놓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만만치 않은 '산타는 실력' 한 번 더 발휘해 보자고 꼬셔도 봅니다.

시골정경이 남아 있는 천마산 아랫마을
시골정경이 남아 있는 천마산 아랫마을 ⓒ 김선호

결국,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입니다. 날마다 기온이 떨어지고 있으니 우리의 계획이 예상대로 진행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올해 다 못하면 내년에 이어서 하면 되겠다 싶은 마음으로 시작할 생각입니다.

입동을 하루 앞둔 일요일(7일), 천마산에서 시작해 백봉산으로, 백봉산에서 고래산을 돌아보는 첫 번째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길이 어긋나지 않는다면 6시간 정도 걸릴 예상을 하고 집에서 천마산을 향해 걸었습니다. 되도록 차를 타지 않을 것도 계획에 넣었습니다. 천마산 까지 걸어서 30여분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항상 차를 타고 지나다니던 거리며 골목을 걸어 가보니 또 새롭습니다. 우리 동네도 요즈음 개발열풍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잠깐사이 새로운 도로가 생기기도 하고 못 보던 건물이 우뚝 서 있곤 합니다.

마을로 들어오는 소박한 길이 불과 1년 사이에 넓은 4차선 도로로 바뀌어 있습니다. 길이 커서 시원하긴 한데 어쩐지 정감이 없어 보입니다. 예전엔 말 그대로 기차골목길이었던 그 길에 마침 기차가 지나가는지 '땡강, 땡강' 신호가 들어옵니다. 춘천 가는 기차입니다. 눈앞에서 기차가 지나가는 것이 신기한 모양인지 아이들은 기차 꽁무니가 보일 때까지 오래 기차를 쳐다봅니다.

2005 마을 뒤란과 연결된 산자락에 물든 단풍
2005 마을 뒤란과 연결된 산자락에 물든 단풍 ⓒ 김선호
2005  마을 끄트머리께 은행나무 가로수
2005 마을 끄트머리께 은행나무 가로수 ⓒ 김선호

새로 생긴 4차선 도로는 읍내와 천마산 자락의 작은 산골마을을 둘로 갈라놓았습니다. 읍내는 제법 커다란 건물로 도시 못지않게 복잡한데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만난 작은 마을은 전형적인 시골 동네입니다. 다만 이곳도 머지않아 변하게 될 것이라는 예고처럼 마을 한가운데를 가르고 포장길이 번듯하게 놓였습니다.

길 양편엔 은행나무가 마침 노랗게 물들어 있어 작은 시골 동네를 밝게 비춰 주는 것 같았습니다. 가로수 너머엔 또 작은 채마밭들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작은 자투리땅도 그냥 두는 법이 없는 이곳 사람들은 분명 부지런할 것입니다. 김장용 배추며 무 등이 파랗게 잘 자라 있는 모습도 정겹습니다.

느티나무 아래 노부부가 나란히 앉아 콩을 까고 있네요.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집들이 끝나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무심히 올려다본 하늘이 파랬습니다. 마을 끄트머리 집 뒤란과 이어진 산자락엔 단풍이 한창 고운 나무들이 나란합니다. 그 빛깔이 어찌나 고운지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올 가을 단풍으로 유명하다는 산을 몇 군데 돌아보면서 단풍빛에 몇 번이나 반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 천마산 자락아래 깃든 작은 동네 뒤란에서 올 들어 가장 아름다운 단풍빛을 발견했습니다. 딱, 절정이었지요. 붉고 노랗고 연두빛나는 푸른잎들이 나란히 서서 가장 아름다운 가을빛을 조용히 강변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래 산밭엔 파랗게 배추가 여물어 가고 갓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어와 은행잎이 날리는 길도 걷습니다. 이 마을 참 아름답다고 감탄을 하면서요. 곧장 산으로 향한 길이 있겠지 싶었는데 길은 다시 차도로 끊겨 있습니다. 그 길이 아랫마을과 천마산을 떼어 놓았습니다.

2005 천마산 오르는 길
2005 천마산 오르는 길 ⓒ 김선호
2005 운무에 싸인 천마산
2005 운무에 싸인 천마산 ⓒ 김선호

매표소를 지나칩니다. 이동네 사람들한테는 입장료를 받지 않습니다. 계단길을 힘겹게 오릅니다. 계단 옆으로 또 길 하나가 생긴걸 보니 다른 사람들도 계단길이 싫은가 봅니다. 남편은 아들아이 손을 잡고 저만큼 앞서가고 딸아이와 저는 한참을 뒤처져 걷습니다. 야영장 만든다고 나무를 베어난 자리가 휑합니다. 간이휴게소를 지나 약수터에 닿습니다. 일요일이라 등산객들로 약수터가 꽤 붐빕니다.

약수터부터 깔딱 고개까지 본격적인 비탈길입니다. 쉽지 않은 길이지만, 그 길 끝엔 평평한 산길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기에 힘을 내봅니다. 어디선가 읽은 바로는 참나무가 많은 산이 건강한 산이라고 했는데 이 산에는 참나무가 참 많습니다. 벌써 잎을 다 떨구고 빈가지만 남아 앙상한 모습이지만, 참나무가 많은 천마산은 건강한 산입니다.

발아래 수북이 쌓인 낙엽이 '사스락' 소리를 내며 밟혀 오지만 아직 바스라지지 않는 걸 보니 떨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낙엽들인 모양입니다. 낙엽 밟는 재미에 힘든 줄 모르고 깔딱고개에 도착했습니다. 이름만큼이나 오르기 어려운 길, '깔딱고개'에 당도했으니 이젠 정상을 향한 걸음을 절반정도 한 셈입니다.

그러나 아직 쉴 때가 아닙니다. 마당바위까지 내쳐 올라 잘 따라와 준 아이들과 목을 축이며 다리쉼을 합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곳에서 또렷하게 보였을 정상이 오늘은 짙은 운무에 가려 있어 가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제 막 아침이 시작되고 있는 것 같다느니, 마치 우유를 풀어 놓은 것 같다느니 아이들은 운무에 싸인 산을 두고 말이 많아집니다.

2005 천마산 중턱에 가로 놓인 임도
2005 천마산 중턱에 가로 놓인 임도 ⓒ 김선호
2005  낙엽이 두텁게 쌓인 백봉산 능선에서
2005 낙엽이 두텁게 쌓인 백봉산 능선에서 ⓒ 김선호

안개 속에 헤쳐 정상에 닿았지만 역시 짙은 운무로 주변이 뽀얗게 보입니다. 운무에 싸인 정상은 바다위에 떠 있는 섬이 되었습니다. 천마봉(813m)을 내려와 '마치고개'라는 이정표를 따라 산을 내려갑니다. 점심을 먹고 외길로 이어진 비탈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어쩐지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미리 확인했던 바로는 좌측으로 능선이 나와야 하는데 길은 아래로 향한 외길만 보입니다.

경사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모르고 가파르게 이어졌고 그 길은 두꺼운 낙엽 층이 쌓여 있어 미끄럽기까지 합니다. 게다가 낙엽 층 속에 숨어있는 돌들이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어 위험한 길입니다. 그런 길을 얼마나 내려왔을까요. 저 아래 제법 너른 포장도로가 보입니다. 길을 잘못 든 게 확실 했습니다. 그 길은 호평동에서 천마산 청소년 수련원까지 포장도로였으니 도중에 좌측으로 꺾어 들어가야 했던 길을 놓쳤던가 보았습니다.

한 시간 이상을 다시 돌아가야 하게 생겼지만 다행히 포장도로를 따라가다 주능선으로 오르는 길을 지나가는 등산객이 알려 주었습니다. 다시 주능선을 올라 마치고개를 향합니다. 완만하게 이어진 능선이 끝날 줄 모르고 계속 됩니다. 등산객도 눈에 띄지 않고 바람이 많이 불어 낙엽들이 날리는 길입니다.

그 길이 원래 그렇게 바람이 많은지 쌓인 낙엽들이 바스락거리며 발밑에서 부서집니다. 능선 왼쪽으로 천마산 스키장이 보이네요. 스키장 부근엔 산림이 훼손된 현장이 곳곳에 눈에 띕니다. 얼마나 걸었을까, 천마산을 벗어났는지 도로가 보입니다. 경춘가도를 향해 나있는 그 도로는 또 천마산과 백봉산을 갈라놓았네요.

차들이 씽씽 달리는 길을 또 조심스럽게 건넙니다. 이제부턴 백봉산 입니다. 중간에 길을 잘못 들은 탓에 예상보다 시간이 더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백봉산은 기껏해야 509m 이니 다시 힘을 내 봅니다. 하지만 만만하게 보았던 백봉산을 오르는 길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이들도 그만 가자고 조르기 시작합니다.

아무래도 오늘 중에 고래산 까지는 무리가 될 것 같아 코스를 조정합니다. 백봉산만 오르고 다시 내려가자 하니 아이들이 다시 앞장을 섭니다. 그러면서 다음주엔 어디를 오를 것인지 묻네요. 백봉산 자락에서 건너다본 천마산이 멀고 높아 아이들도 스스로 그 길을 걸어 예까지 왔음이 자랑스러웠나 봅니다.

"저 산을 우리가 건너 온 거 맞아요?"

산과 산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모습
산과 산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모습 ⓒ 김선호

단풍이 아직 남아 있는 중턱을 지나자 백봉산에도 앙상한 나뭇가지만 가진 나무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잎이 진 숲 사이로 아랫동네 마을이며 주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백봉능선에서 본 주변 풍경은 그러나 따스한 느낌만은 아니네요. 한쪽은 리조트가 들어서 산이 깎이고 한쪽은 골프장이 들어서 산자락이 잘려 나갔습니다. 도심에서 가까운 탓인지, 백봉산에 유난히 상처가 많습니다. 바라보기 안쓰러울 정도입니다.

몇 개의 바위를 지나 정상을 앞둔 지점에선 갑자기 바람이 거세집니다. 리조트의 리프트 시설을 설치하기 위해 산 한쪽이 또 뭉텅 잘려 나갔습니다. 바람의 반대 방향은 비탈길이어서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을 내딛습니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하다 아이들이 뭔가를 발견한 듯 소리를 칩니다.

바위 위에 안테나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안테나를 고정시키기 위한 쇠파이프 아래 도룡뇽 한 마리가 누워 있습니다. 꼼짝하지 않은 도롱뇽이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대로 파이프 아래 죽어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처음 만나는 도롱뇽은 어쩌다 박제가 된 듯이 죽어 있었어야 하는지…. 파이프 아래였기에 어쩐지 어른들의 잘못만 같습니다.

2005 백봉산 정상께 쇠파이프 아래 박제된 도룡뇽
2005 백봉산 정상께 쇠파이프 아래 박제된 도룡뇽 ⓒ 김선호
백봉산 정상이고 뭐고 산행의 재미가 그만 싹 달아나 버리는 것만 같습니다. 백봉산 산봉우리까지 양철관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리프트 줄을 보호할 목적으로 설치한 것 같은데 이래저래 백봉산은 괴롭다 비명을 지르는 것 같습니다. 미안한 마음으로 얼른 산을 내려섭니다. 해가 설핏 기울었습니다.

오지 않은 버스를 오래 기다리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는 마을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의 차를 얻어 타고 편안하게 집으로 왔습니다. '우리 동네 돌아보기' 첫 걸음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고 상처로 얼룩진 산을 보며 가슴 아프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다음 걸음을 기대합니다. 또다시 길을 잘못 들어 헤매게 될지라도 또 가슴 아픈 풍경들을 마주하게 될지라도 말입니다.

 

덧붙이는 글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내가 사는 동네 입니다. 산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내가 사는 곳을 아이들과 한발 한발 걸어 보기로 하고 첫걸음을 뗐습니다. 특히, 아이들에게 의미 있는 걸음 걸음이 되길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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