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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상영돼 큰 인기를 얻었던 <매디슨카운티의 다리>.
일본에서 상영돼 큰 인기를 얻었던 <매디슨카운티의 다리>. ⓒ Warner Bros.
일본인, 특히 일본여성들은 좋아하는 영화의 무대를 찾는 데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춘천의 한적한 길을 걸으며 <겨울연가>의 자취를 좇는 것은 최근 들어 생겨난 의식이 아니다. 그들은 15년 전 이맘때 비버리 힐스의 로데오 거리를 걸으며 <프리티 우먼>의 리차드 기어를 생각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 후 5년 뒤 즐거운 마음으로 더 험난한 여정을 떠났다. 도로포장도 되지 않은 미국 아이오와의 오지마을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 작은 마을은 한 유부녀와 사진작가의 가슴 아픈 사랑을 그린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무대가 된 곳이다.

매디슨 카운티는 작은 개천을 가로지르는 몇 개의 다리 이외에는 별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 만한 것이 없는 평범한 시골마을이다. 그러나 일본의 중년 여성들은 아름다운 사랑의 주인공들이 섰던 그 다리에 올라보는 것만으로도 태평양을 건너올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다리 난간 위에 일본어로 "사랑해요"라고 쓰고 이스트우드가 식사를 하던 작은 간이식당에서 밥을 먹은 후 행복한 마음으로 일본으로 돌아갔다.

영화에 등장했던 다리 가운데 하나인 '로즈맨'교. 영화에 열광한 일본인들은 이 다리 하나를 보기 위해 아이오와로 몰려들었다.
영화에 등장했던 다리 가운데 하나인 '로즈맨'교. 영화에 열광한 일본인들은 이 다리 하나를 보기 위해 아이오와로 몰려들었다. ⓒ 강인규
그리고 다시 10년 뒤, 매디슨 카운티를 찾았던 그 여성들이 남이섬으로 몰려들고 있다. 그들은 리차드 기어와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대체할 '새 연인'으로 배용준을 고른 셈이다. 이 변화 혹은 다양화는 남성에 대한 새로운 취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한국문화가 일본을 포함한 많은 아시아인들에게 미국문화를 대체하는 새로운 대안문화로 부상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미국문화에 매료되었던 그들이 한국문화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즉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한류'가 갖는 의미를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 자신에게 한류가 갖는 의미를 먼저 생각해 보기로 하자.

한국사회의 '경제 광신'과 한류 담론

다리 안쪽에 들어서면 사랑을 고백하는 글들이 가득하다. 이들 가운데 작지 않은 수가 일본팬들에 의해 남겨졌다.
다리 안쪽에 들어서면 사랑을 고백하는 글들이 가득하다. 이들 가운데 작지 않은 수가 일본팬들에 의해 남겨졌다. ⓒ 강인규
한국인들은 사물을 돈으로 환산하는 데 익숙하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근대화 과정의 빈곤하고 불우한 경험들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국인들의 삶은 과거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으나, 오늘날에도 '경제적 가치'는 한국을 움직여가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 나라에 군대를 파병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의 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국익' 혹은 '이라크 효과'라는 경제담론이었으며, 재벌총수의 비리와 범죄 역시 '경제위축'이라는 경제적 담론 속에서 처벌의 수위와 방식이 결정되고 있다.

한국에서 경제에 대한 관심은 종교적 숭배에 가깝다. 문화 역시 예외가 아니다. '문화콘텐츠' 만큼 한국인들의 경제 중심적 가치관을 잘 드러내 주는 말도 없다. 문화를 삶의 일부나 개인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방식으로 보기보다는 상품의 외피에 '집어넣어' 팔아야 할 어떤 '내용물'로 보는 것이다. '한류'에 대한 우리의 태도 역시 '문화콘텐츠'의 관점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에 대한 집착이 반드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지는 못하는 법이다. 오히려 경제에 대한 근시안적인 집착으로 지혜와 돈 모두를 잃은 사례를 한국사회는 드물지 않게 목격해 왔다. 여타의 종교가 그렇듯이 '뜨거운' 것이 언제나 미덕일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경제적 관점을 잠시 벗어나 한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은 그 현상을 가능케 해 준 조건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 그 '돈'이 계속해서 흘러들어오도록 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줄 것이다.

한국에서 대중문화와 한류는 경제중심적 관점에서 파악되고 있다. 정부부처의 '문화콘텐츠' 관련 인터넷 웹사이트와 홍보물.
한국에서 대중문화와 한류는 경제중심적 관점에서 파악되고 있다. 정부부처의 '문화콘텐츠' 관련 인터넷 웹사이트와 홍보물. ⓒ 강인규
한류의 토대는 '표현의 자유'

한 나라의 문화에 대한 관심은 그 나라 자체에 대한 관심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80년대 후반 올림픽을 전후해서 한때 일본 내에서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 바 있다. 그러나 이 관심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 문화적 열기는 '한국사회 자체에 대한 관심'이라는 현실적 토대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류의 역사가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의 역사와 시기를 같이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류는 한국에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기 시작되었을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도래는 문화상품이 다룰 수 있는 사회적 소재에 대한 제한이 사라졌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민주사회는 그보다 더 근원적인 조건, 즉 자유로운 사고와 창의력을 가능케 해 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검열철폐는 감독과 제작자들의 창의성을 배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어 군부독재 하에서 신음한 경험담이며, 이념에 의해 남북으로 갈려야 했던 민족의 고통을 담은 영화도 만들어졌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첫 성공작 가운데 하나가 <쉬리>다." - "우리 곁으로 다가온 한국영화" <월스트리트 저널> 2003. 10. 31

군부독재 시절에 남녀관계는 영화가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소재가 되었고, 80년대까지 지배적인 장르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군부독재의 서슬 퍼런 시기에도 한국의 감독들은 제한된 자유와 자원을 가지고 탁월한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70년대에 제작된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
군부독재 시절에 남녀관계는 영화가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소재가 되었고, 80년대까지 지배적인 장르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군부독재의 서슬 퍼런 시기에도 한국의 감독들은 제한된 자유와 자원을 가지고 탁월한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70년대에 제작된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 ⓒ 화천공사
60년대는 한국영화산업의 전성기로 불린다. 한국에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영화가 만들어진 시기였으나, 당시 한국영화는 국제적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당시 한국영화가 다룰 수 있는 소재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사회적 소재에 대한 금기는 70~80년대의 군부독재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결국 한국영화는 '멜로영화'의 동의어가 되었다.

독재시절 남녀관계는 영화나 음악이 다룰 수 있는 유일하게 '안전한' 소재였다. 그러나 혹독한 억압의 시기에 한국인들의 민주적 열망이 강화되었듯, 표현의 자유에 대한 갈망은 문화상품에 사회적 메시지를 결합시키는 한국 특유의 대중문화를 낳았다. 한국의 대중문화가 미국문화에 대한 '대안문화'로서 각광받기 시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의 대중음악이 미국 힙합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한국화 하는 과정에서 미국대중문화 특유의 폭력성과 선정성은 순화되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아시아 젊은이들이 공감할 만한 사회이슈들이었다. 한국음악은 사회적 소외, 보수적인 학교교육에 대한 반감, 과잉보호 부모에 대한 저항을 담음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 "한류에 휩쓸리다" <파이스트경제리뷰> 2001. 10. 18

패배의식으로 가득 찬 무조건적 폭력과 저항이 아니라, 사회의 문제 자체를 구체적으로 다루는 한국의 영화와 음악, 그리고 드라마는 아시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애정에 대한 가족의 개입, 성차별과 여성의 열악한 사회적 지위, 청소년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비정상적 교육열, 급속한 경제적 성장이 몰고 온 비인간화와 부패, 그리고 이데올로기가 갈라놓은 우정과 사랑 이야기는 곧 그들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런 공감대는 이전의 미국문화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한국의 인기상승은 미국의 인기를 잠식하는 면이 있다. 일본 공영방송 NHK의 오가와 준코는 (한국대중문화의 인기를) 미국대중문화에 식상한 일본대중들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선 결과로 본다. 배용준의 팬 가운데 한 명인 다케우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전에 저는 그랜드캐니언에 갈 생각만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행선지를 서울로 바꿨습니다.'" - "한국의 낭만적 배우, 일본을 사로잡다" <유에스에이 투데이> 2004. 12. 4

한류는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겨울연가>는 한국 멜로물의 전통을 계승하지만, 개인적 애정에 대한 가족의 개입과 '혈통'에 대한 억압과 신화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갖는다. 아시아 여러 나라의 시청자들이 동일시할 수 있는 현실적 요소는 한국 드라마의 주된 성공요인으로 꼽힌다. 사진은 일본공영방송의 웹사이트.
<겨울연가>는 한국 멜로물의 전통을 계승하지만, 개인적 애정에 대한 가족의 개입과 '혈통'에 대한 억압과 신화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갖는다. 아시아 여러 나라의 시청자들이 동일시할 수 있는 현실적 요소는 한국 드라마의 주된 성공요인으로 꼽힌다. 사진은 일본공영방송의 웹사이트. ⓒ NHK
한류는 프로그램 제작자나 배우 몇 명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정부 관료들의 기획서가 가능케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사실 한류는 누가 만들어 내거나 조장한 것이 아니라, 마땅한 시기에 우리에게 찾아온 것이다.

90년대 후반부터 아시아 일각에서 일기 시작한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은 한국사회 자체에 대한 존경심을 내포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한국사회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관심을 갖기에 충분한 여건을 갖추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 나라 자체에 대한 관심 없이 오직 그 나라의 대중문화에만 관심을 갖는, 그리고 그 관심이 지속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일본보다 뒤늦게 시작했지만 이미 그 나라를 멀찌감치 따돌린 한국의 시민사회의 발전은 여러 나라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수십 년 간 외세에 시달리고, 다시 외세의 의해 분단되고 전쟁의 잿더미로 덮였던 한국은 거듭 된 독재체제를 물리치고 민주국가를 제 손으로 이루어가고 있다.

한류의 영향력은 유럽과 미국에서도 서서히 확대되어 가고 있다. 사진은 미국에서 개봉돼 관객들과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은 <태극기>와 <올드보이>. <올드보이>는 매디슨시에서 전체 비디오 대여순위 3위에 오르기도 했다.
한류의 영향력은 유럽과 미국에서도 서서히 확대되어 가고 있다. 사진은 미국에서 개봉돼 관객들과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은 <태극기>와 <올드보이>. <올드보이>는 매디슨시에서 전체 비디오 대여순위 3위에 오르기도 했다. ⓒ Tartan/SONY Pictures
한류를 상품, 혹은 '문화콘텐츠'로만 파악하는 입장은 '사회 자체'라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놓치고 있다. 한류는 매끈하게 만들어진 문화 상품만이 아니라, 한국사회가 발현하는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매력의 총체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당연한 귀결이지만, 한류를 경제적으로 파악하든, 문화현상으로 보든 이 현상을 지속시키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한국사회를 호감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한 개혁 작업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진정한 '문화국'이 되려면

우리에게는 아직 더 싸워가야 할 반민주적인 (따라서 '반한류적인') 요소들이 있다. 지난 달 열린 2005 프랑크푸르트 국제 도서전에 한국이 주빈국으로 결정됐을 때 독일 내에서는 한국의 '자격'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송두율 교수를 둘러싼 한국사회의 냉전적이고 반인권적인 태도를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 최장기의 양심수를 여전히 감옥에 가두어 두고 있고, 말 한 마디로 국민들을 잡아 가두는 법과 검찰이 있는 한, 한국은 '문화국'으로 불리기에는 여전히 부끄러운 나라다. 더욱 민망한 것은 정작 반민주적인 군부독재 시절에는 '민주'라는 말 한 마디도 못 꺼내던 언론과 정치인들이 이제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사회개혁을 흔들고 나섰다는 점이다.

<조선일보>의 진성호 기자는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을 '반미 친북영화'로 비난했다. 군사독재시절 정부가 맡았던 표현의 통제기능을 이제는 보수상업언론이 담당하고 있다.
<조선일보>의 진성호 기자는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을 '반미 친북영화'로 비난했다. 군사독재시절 정부가 맡았던 표현의 통제기능을 이제는 보수상업언론이 담당하고 있다.
그들은 군부독재시절에 멀쩡하던 민주주의가 최근에 와서 흔들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들은 공교롭게도 한국이 민주주의를 이룬 이후 사라져가는 것들을 되살리는 것이다. 그것은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고 지식인과 학생을 구속하는 것이다. 그 '운동'의 선두에 선 한 언론은 국민과 세계여론의 호평을 받은 '한류영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웰컴 투 김일성 왕국."

흥미로운 것은 그들조차 한국의 민주주의가 일구어 놓은 한류를 자랑스러워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정작 그 영예를 누려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온 평범한 국민들이다. 그들의 희생은 한국을 존경받을 만한 나라로 일구어 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갈채를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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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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