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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가을 단풍 중에서 은행잎이 나는 제일 인상적이다. 샛노란 은행잎이 깔깔하게 부채살로 펴진 채 단 한 잎도 떨어지지 않고 은행나무를 온통 감싸고 있는 순간이 있는데 그럴 때는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하염없이 바라보게 된다.
아쉽게도 그런 상태는 채 이틀을 가지 못한다. 겨우 이틀을 버티다 은행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한 잎이 떨어지면 백화암의 궁녀들이 그랬을까 싶을 정도로 나머지 잎들이 소낙비처럼 떨어진다. 이 역시 이틀을 못가고 다 떨어져 버린다.
엊그제 아침에 들에 나갈 때는 분명 길바닥에 단 하나의 은행잎도 없었는데 타작한 콩 자루를 리어카에 싣고 집으로 오다 보니 길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노란 은행잎이 뒤덮여 있는 게 아닌가.
마치 노란 함박눈 같았다, 계속해서 길 위로 쏟아져 내리는 은행잎의 모습이. 바람이 불면 은행잎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지면 바람이 부는 격이었다. 나는 리어카를 받쳐 놓고 은행잎 소낙비를 한참 바라보았다. 은행잎이 땅 바닥에 닿는 소리가 "좌르륵 좌르륵" 했다. 땅바닥에서 떨어진 은행 이파리는 살짝 몸을 뒤채고는 착착 쌓여갔다.
발걸음을 조심해 가면서 집으로 가서 카메라를 들고 나왔다. 캠코더도 가지고 나왔다. 삼각대를 세워 놓고 녹화 단추를 눌렀다.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리어카를 끌고 캠코더 앞을 지나가 보기도 했다.
올 한해 참 가까이 지낸 은행나무다. 잎이 푸를 때는 믹서로 갈아서 석회 보르도액과 섞어 해충을 막는 유기농자제를 만들기 위해 장대로 은행잎을 따기도 했다. 작년에 모아 두었던 은행잎으로는 최근까지 재래식 뒷간에 똥을 눈 다음 덮어 주었다. 그러면 똥 냄새가 안 난다.
은행이 후두둑 후두둑 떨어질 때면 고약한 냄새를 조심해 가며 도랑물에 은행 껍질을 까기도 했고 그 덕에 손톱 밑에 스며든 은행 냄새가 며칠을 없어지지 않고 코를 자극했다.
양지 바른 곳의 은행이 먼저 익으면 순번이라도 정해 둔 듯이 그 다음 양지바른 곳의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간다. 곳곳에 은행나무가 하도 많아 동네에는 한 달 열흘은 족히 노란 은행잎의 잔치가 벌어진다. 마을 이쪽에서 노란 봉화를 올리면 다음날 마을 저쪽에서 노란 봉화가 오르는 식이다. 하루 이틀 동네에 노란색 전염이 멈추는가 싶으면 다시 저수지 옆 산기슭에서 은행나무가 노랗게 타 들어간다.
우리 집 앞의 은행나무는 중간이다. 앞서지도 뒤처지지도 않고 딱 중간이다. 이제 동네의 노랑 은행잎 잔치 행사는 딱 반이 지난 것이다. 서리가 와 버리면 잔치는 더 일찍 끝날 것이다. 잔치가 끝나면 나는 갈퀴로 은행잎을 모아 헛간에 쌓을 것이다. 작년처럼. 그리고 나는 다시 또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노란 은행잎 앞에서 잠시 피곤한 하루 노동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다 볼 것이다. 내년 이맘 때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