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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보물 1호인 음매소입니다. 송아지는 황송아지인데, 아버지는 암소보다 밥을 훨씬 더 많이 먹는다고 사료값 걱정하시면서 밥 줄때마다 덜 움직이고 조금만 먹으라고 농담을 하십니다.
우리 집 보물 1호인 음매소입니다. 송아지는 황송아지인데, 아버지는 암소보다 밥을 훨씬 더 많이 먹는다고 사료값 걱정하시면서 밥 줄때마다 덜 움직이고 조금만 먹으라고 농담을 하십니다. ⓒ 장희용


'음매~ 음매~.'

이른 아침부터 소 세 마리가 합창하듯 목청을 높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도시보다 한두 시간은 일찍 눈이 떠지는 시골의 아침인데, 음매소까지 일찍 일어나라고 한 몫을 하니 더 이상 잠을 청하기가 어렵습니다.

음매소 울음소리에 잠을 깬 건 나 혼자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혹여 자식들 깰까 봐 안방에서 소곤소곤 대화를 하시는 아버지와 어머니, 조심스러운 마음에 작게 이야기하시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속삭임은 적막한 새벽공기를 뚫고 그 어떤 목소리보다 더 크게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할아배 소니께 할아배가 주유

"어제 저녁에 소 밥 안줬슈?"
"줬는디."
"그럼 재들이 왜 저렇게 운댜?"
"내가 좀 들줘서 그런가?"
"아, 왜 들줘! 있는 지푸라기 워따 쓸려고. 얼른 가서 줘유 시끄러워서 애들 깰라."
"아 왜 늙은 나만 시키고 그랴, 할매가 가서 좀 줘."

"소 팔면 나는 한 푼도 안주면서 내가 왜 밥을 준댜, 할아배 소니께 할아배가 주유."
"나는 그럼 줬남? 내가 할매 마늘 까준 것만 해도 솔찬히 되는디, 마늘 깐 거 돈 찾으면 나 줬남?"
"내가 왜 안 줬슈! 할아배 지금 먹는 사탕, 그거 누가 사 준 건디? 할아배 돈으로 샀슈?"
"그놈의 사탕 한 봉지 사 주고는 유세네 유세. 사탕 한 봉지가 얼만디? 돈 2천원밖에 안하는 거, 내가 마늘 2천원어치밖에 안 갔남?"
"사탕만 사 줬슈. 저번에는 내가 빵도 사주고, 땅콩차도 사 줬잖유. 먹을 때는 아무 소리도 않더니 이제 와서 잔소리유."

추수가 끝나면 시골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음매소의 겨울 식량을 준비하는 겁니다. 특별한 것은 없고 볏짚을 잘 말린 다음 비 맞지 않도록 비닐을 잘 덮어 둡니다. 그리고 조금씩 꺼내서 집으로 가져오곤 하지요.
추수가 끝나면 시골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음매소의 겨울 식량을 준비하는 겁니다. 특별한 것은 없고 볏짚을 잘 말린 다음 비 맞지 않도록 비닐을 잘 덮어 둡니다. 그리고 조금씩 꺼내서 집으로 가져오곤 하지요. ⓒ 장희용

ㅋㅋ, 두 분이서 나누는 대화가 너무 재밌습니다. 잠은 이미 다 달아났습니다. 다음은 아버지 차례인 것 같은데, 아버지가 답변이 궁한가 봅니다. 한참이나 아버지 말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하긴 어머니 말씀이 하나도 틀린 게 없으니 당신께서도 하실 말씀이 없긴 없을 겁니다. 예전부터 송아지를 팔면 이삼백만원 정도를 손에 쥐시던 당신인데도 아버지는 다 쓸 데가 있다면서 (어머니 증언에 따르면) 어머니한테는 돈 만원만 주시고는 더 이상 주시질 않았답니다.

당시 어렸던 저는 소를 사러 오신 아저씨 옆에 바싹 붙어서는 졸졸 따라다니던 생각이 납니다. 그렇게 아저씨를 따라다니다 보면 아저씨가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옛다 학용품이나 사 쓰거라"하시면서 그 당시에는 거금이었던 만원을 주시곤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아저씨한테 돈을 받으면, 샘이 나셨는지 우리 어머니는 아저씨한테 "아, 왜 나는 안주유"하시면서 아저씨한테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럼 "아, 송아지 한 마리 팔고 집안 식구가 다 돈 달라고 하면 어떡한대유"하시면서 사람 좋은 웃음만 지으시고는 끝내 돈은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어느 해인가는 어머니가 거금 3만원을 받았던 기억이 제 기억 속에 있습니다.

음매소도 매일 짚과 사료만 먹으면 입맛을 잃는 답니다. 그래서 콩깍지를 잘 두었다가 아버지가 기분 좋으면 솥에 삶아서 주시고, 좀 귀찮으시면 그냥 주기도 합니다^^
음매소도 매일 짚과 사료만 먹으면 입맛을 잃는 답니다. 그래서 콩깍지를 잘 두었다가 아버지가 기분 좋으면 솥에 삶아서 주시고, 좀 귀찮으시면 그냥 주기도 합니다^^ ⓒ 장희용

"소를 팔유! 그런 소리 당체 하질 말유

"아, 안 나가유?"
"어허, 왜 이리 재촉하고 그런댜."
"애들 깰까 봐 그러쥬. 빨리 나가서 주고 와유."
"이제 소 밥 주기도 힘든디, 어미소 한 마리 팔을까?"
"소를 팔유! 그런 소리 당체 하질 말유. 저것들 우리한테 얼매나 잘했슈. 저것들 에미들이 있어서 자식들 공부시키고 결혼도 시키고, 지금도 저것들이 농사짓는 거 보다 낫잖유. 그렇잖유? 그리고 겨울 되면 하루 종일 누워 있는 양반이, 저것들 밥 줄 때나 몸 움직이는디, 저것들마저 없으면 종일 잠만 잘 거 아니유. 잔소리 말고 얼릉 가서 여물 주고 오유."
"아이구 꼼짝하기 싫구먼."

어머니의 장황한 말씀을 듣고 나더니 우리 아버지 더 이상 누워 있기가 그런지, 꼼짝하기 싫다고 하시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옷 입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머니의 성화 탓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자식이 혹여 깰까봐, 그리고 그 자식보다야 못하겠지만 자식 이상인 음매소에 대한 사랑에 못내 일어나기 싫으신 몸을 일으키신 것이겠지요.

음매소야 고맙다! 네 덕에 누나, 형, 나 공부하고 결혼했단다

예전에 '소 팔아 자식 가르친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거 진짜랍니다. 농사지어야 일 년에 삼백만원 조금 넘게 남으니 일 년 생활비 하기에도 부족했습니다. 그러니 자식들 공부시킬 돈이 남을 리가 없었지요.

지금은 송아지까지 세 마리 키우지만, 어렸을 때는 암소 어미소가 네 마리 있었습니다. 어미소들이 새끼 낳으면 조금 키우다 팔아서 그 돈으로 공부를 시켰는데, 분명한 제 기억으로는 고등학교 때 하숙을 했던 형 뒷바라지 하던 돈은 다 송아지 팔아서 모은 돈으로 했습니다. 물론 제 공부에 필요한 돈도 송아지 판 돈에서 나왔습니다.

우리 큰 누나 시집 갈 때는 송아지가 아니라 어미소 하나를 팔았습니다. 말 그래도 소 팔아서 그 돈으로 시집간 셈이지요. 작은 누나 때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소 외에는 별다른 수입원이 없었으니 아마 우리 작은 누나도 소 판 돈으로 시집을 갔을 겁니다.

아무튼 농사지어야 남는 것도 없는 빠듯한 시골살림에 새끼를 낳아 판 돈으로 자식들 가르치고 살림살이에 보태니, 예나 지금이나 소는 시골에서는 보물 1호랍니다. 그래서인지 열심히 논 갈고 밭 갈던 시절이야 말할 것도 없었지만, 일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도 배고프다고 "음매~"하고 울면 밥을 갖다 바치는 팔자 좋은 지금이나 소는 시골에서 가장 큰 '어른(?)' 대접을 받습니다.

지난 번 시골에 갔을 때 논에 있던 볏짚을 소가 보름정도 먹을 만큼 비닐하우스로 옮겨 놓았습니다. 옆에 있는 작두를 이용해 적당한 크기로 썰어 사료와 함께 주면 아주 잘 먹습니다.
지난 번 시골에 갔을 때 논에 있던 볏짚을 소가 보름정도 먹을 만큼 비닐하우스로 옮겨 놓았습니다. 옆에 있는 작두를 이용해 적당한 크기로 썰어 사료와 함께 주면 아주 잘 먹습니다. ⓒ 장희용

손주 돌잔치보다 소 밥 주는 게 중요(?)한 아버지

제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렇지만 시골에 계신 분들이 소를 얼마나 애지중지 하시는 지 딱 하나만 예를 들겠습니다.

둘째 돌잔치 할 때 주무시고 가라고 그렇게 말씀드려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형 차를 타고는 밤길을 달려 시골로 가셨습니다. 저야 어느 정도 이해했지만 아내는 세린이 때도 그렇고, 둘째도 그리하시니 못내 서운했던가 봅니다. 눈치를 채신 아버지가 그러시더군요.

"에미야! 서운해 할 것 없다. 이놈들 없었으면 아버지가 무슨 수로 너희들 공부 시키고, 결혼 시켰겠느냐. 손주들이야 건강한 것 봤으니 됐고, 또 언제든 볼 수 있고, 또 애비 에미가 있으니 내가 걱정할 일이 없지만 말 못하는 소는 누가 돌본다니. 아버지도 오랜만에 왔으니 자식 집에서 하룻밤 자고 싶지 왜 안자고 싶겄냐. 하지만 내가 네 집에서 자도 소 걱정 때문에 마음이 편치를 않으니 가야 쓰겄다. 아버지 마음 편하게 해준다고 생각하고 너무 서운해 말거라."

저야 어느 정도 이해를 하지만 아직도 가끔은 아내는 서운하다는 말을 비칩니다. 제 경우만이 아니라 저희 시골 어른들은 다 이러십니다. 자식들이 도시에서 생활하니 대부분 돌잔치도 자식들이 있는 도시에서 하는데, 소 점심 굶을까봐 점심 주고 출발해서는 돌잔치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 도착해 돌잔치가 끝나자마자 다시 밤길로 시골로 내려가십니다.

처음에는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 서운한 마음도 들었지만, 어찌 손주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리하셨겠습니까? 그리고 사실 말이야 바른 말로 매일 속만 썩이는 자식보다야 음매소가 아버지 어머니한테는 진짜 효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나보다 효자인 우리 집 음매소야,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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