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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들판에 서면 잘 여문 곡식만 보이는 게 아니다. 세월이 보이고 무상함도 보인다. 땀과 결실의 인과관계도 보이고 보람도 있고 아쉬움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늘'이 보인다는 것이다. 농부가 기울이는 노력과 정성이라는 것은 하늘이 내려주는 은총(?)을 잘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지혜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제 고등학교 1학년생이 비어가는 가을 들판에서 뭘 보랴마는 나는 딸을 데리고 들에 나갔다. "한 달만에 집에 오는 딸을 만날 농사 일 부려 먹을 궁리만 한다"는 딸의 비난을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한다.
"옥수수 잔챙이 남은 게 있는지 따라. 콩밭에 떨어져 있는 콩알 주워라. 서리가 온단다. 호박 다 따라. 마늘 종자 소쿠리에 놓고 6쪽 마늘은 따로 놔라."
작업 지시를 하는 나는 가을 들판의 진짜 주인이 된다.
쫑알대던 딸도 어느새 들판의 싱그러운 기운에 물들어 간다. 농업고등학교에 다니는지라 농사일이 익숙하기도 하다. 점점 일에는 흥이 붙고 신바람이 난다. 날짐승이 쪼아 먹던 옥수수 한 통을 발견하면 우리는 야구선수처럼 던지고 받는다. 마늘 심을 골을 타고 있는 내 눈에 호박 세 덩이가 보였다. 잘 익은 누런 호박을 양 허리에 끼어들고 낑낑대며 굴러오는 호박덩이 하나는 바로 딸내미 전새날이었다.
속옷은 삐져 나오고 '추리닝' 바지는 엉덩이께로 흘러 내린 채 호박이 떨어질까 봐 엉거주춤 걸음으로 어기적어기적 걷는 모습이 걸작이었다.
"가운데 호박이 제일 못 생겼다. 그건 버려라. 못 쓰겠다."
"아빠. 이것 좀... 이것 좀... 어서요오~"
가운데 못생긴 호박만 안전하고 양 쪽의 잘 생긴 호박이 불안했다. 소리치는 새날이를 세워두고 나는 사진기를 들이댔다.
일이 힘에 부쳤는지 아니면 카메라에 대한 복수인지 새날이는 카메라하고 놀기 시작했다. 내 똥구멍을 찍는다고 졸졸 따라 다녔다. 잠잠해지나 했더니 삼각대를 세워 두고 혼자서 별의별 표정을 지어가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너는 오늘 가을 들판에서 뭘 봤느냐?"
집에 돌아오는 길에 딸에게 물어 봤다.
"잼 없어요. 아빠가 본 거는 나도 다 봤어요."
"내가 뭘 봤는데?"
"그건 아빠가 알잖아요."
호호, 요즘 호박은 제법 재치도 있구나 싶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잘 말해 봐. 새날아, 오늘 뭘 봤냐?"
새날이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정말 말해 볼까요?"하는 것이었다. 그러라고 했더니 새날이는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쏜살같이 도망부터 갔다.
"나를 봤어요. 우하하하~ 이 말 아빠가 제일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진짜예요. 카메라로 나를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