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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에서 양평행 버스를 타고 가는 37번 도로는 은행나무 가로수들로 온통 노란색이다. 가을도 표현하기에 따라서 봄 같은 화사함도 보여주는가 보다. 30분쯤 풍경 읽는 재미에 빠져 있다가 대신면 천서리(川西里)에서 내린다. 이포나루가 있었고, 지금은 이포대교가 있는 천서리. 폐위된 단종은 광진나루를 출발하여 이곳 이포나루에서 잠시 뱃길을 멈추고 물을 마셨다고 한다. 여주와 양평의 곡물들은 이곳을 거쳐 한양으로 갔다.

▲ 파사성 장대에서 내려다 본 복원공사를 마친 서북쪽 성축. 성 아래 남한강이 보인다.
ⓒ 이용진

그 강가의 천서리 사거리, 분명 딸 이름을 따서 지었을 은영슈퍼에 들러 캔커피 하나를 사들고 파사성(婆娑城) 가는 길을 물어본다.

"성 찾아다니는 사람인가? 요 앞 파사장여관 앞을 지나 언덕을 넘어가면 가건물이 나오는데, 그 건물 옆길을 따라 올라가면 쉽게 찾아갈 수 있을 거요."

주인은 길을 알려는 주는 것 외에도 능선을 따라 올라가서 산 저쪽 편이 사진 찍기 좋을 거라는 둥, 아직 해가 중천인데도 날 저물기 전에 얼른 올라갔다 내려오라는 둥 한다.

▲ 성벽 위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
ⓒ 이용진

파사성 오르는 길은 네 군데인데, 오래 걸려야 30분이면 족히 성에 닿을 수 있다. 이 땅의 수많은 산성에 비하면 얼마나 쉬운 길인가. 그러나 산이란 얕잡아보아서는 안 되는 법. 숲에 들어서니 나무들이 해를 가린다. 날 저물기 전에 얼른 다녀오란 말이 괜한 잔소리가 아니다 싶다. 혼자 오르는 산길은 나뭇가지 밟는 소리에도 쉽게 놀란다. 도시생활에 익은 몸이 땀과 거친 숨을 가쁘게 내뱉는다. 마침내 소로를 덮은 잡목림이 끝나고 허물어진 석축이 보인다.

남한강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요충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파사성에 대해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약 1800m이고, 성벽 중 가장 높은 곳은 6.25m, 낮은 곳은 1.4m이다. 한강에 연하여 있어 성 일부는 강기슭에 돌출되게 자리 잡아 상·하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요충을 이루고 있다. 당초에는 삼국시대의 것이었다고 여겨지는데, 그 후 수·개축을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다. 현재 동문지(東門址)와 남문지(南門址)가 남아 있으며, 동문지에는 옹성문지(甕城門址)가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 승려 의암(義岩)이 승군을 모아 예성을 수축했던 것이 오늘날의 성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 5~6미터로 높게 쌓은 파사성 서북쪽 성벽(왼쪽), 정비된 동북쪽 성벽 바깥에 난 길을 따라 성을 둘러볼 수 있다.(오른쪽)
ⓒ 이용진
파사성의 이름에는 두 가지 얘기가 따라붙는다. 하나는 옛날 이곳이 파사국(婆娑國) 자리였기 때문이라는 것, 또 하나는 신라 제5대 왕인 파사왕(재위 80~112)이 축성하여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는 것. 파사성은 여러 번에 걸쳐 수축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일찍이 진흥왕(재위 540~576)은 553년에 경기도 지역을 점령하고 지방 군사행정조직인 10정의 하나로 골내근정(骨乃斤亭)을 이곳에 두었으며, 대규모의 석성을 쌓았다. 다시 그로부터 약 천 년 후,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의 건의에 따라 승병장 의암이 승군을 동원하여 3년에 걸쳐 옹성과 장대, 군기소까지 갖춘 성으로 수축하였다. 지금은 산성 곳곳이 무너져 내렸지만 이 산성이 여러 시대에 걸쳐 쌓은 성임을 확인하기에는 어렵지 않다." <답사여행의 길잡이 7, 돌베개刊>

▲ 파사성에서 내려다본 이포대교. 저녁노을로 남한강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다.
ⓒ 이용진
장대에 오르면 여주, 이천, 양평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남한강 상류와 하류 지역 교통로를 장악하기에 매우 유리한 지점이다. 파사산은 그리 높지 않지만 조망이나 방어선으로 볼 때 축성지로는 최적임을 알 수 있다. 다만 다른 성에 비해 물이 부족한 것이 흠이다.

성은 현재 서북구간과 동북구간만이 복원되었다. 서북구간 성벽은 옛돌과 새돌을 섞어 쌓아 마치 체스판 무늬 같다. 아직 복원되지 않은 성벽들은 허물어진 모양 그대로 현재를 지탱하고 있었다. 원래의 것에서 많은 것을 잃은 모습들이다. 잃어버렸다는 것은 본래는 소유했음을 뜻하고, 소유했다는 것은 소유 가치가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조선후기에 들어 남한산성에 대한 비중이 높아지면서 파사성에 대한 중요성은 감소하였고, 이제 그 용도는 사라졌지만, 석성은 여전히 과거의 존재 가치를 그 자리에서 스스로 지키고 있어 보였다.

▲ 복원된 서북쪽 성벽(왼쪽), 북쪽 성벽은 능선을 따라 높이 5~6m로 높게 쌓았다. 성벽 일부가 무너져 있다(오른쪽)
ⓒ 이용진
남문 앞 안내표지판에는 파사성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고 적어 놓았다.

"신라5대 파사왕 때 남녀 두 장군이 내기를 하였다. 남장군은 나막신을 신고 중국을 다녀오고 여장군은 파사성을 쌓기로 하였는데, 여장군이 성을 다 쌓기 전에 남장군이 먼저 중국에서 돌아왔다. 여장군은 개군면 석장리까지 가서 돌을 치마폭에 담아오던 중 이 소식을 듣고 놀라 치마폭이 찢어지면서 돌이 떨어져서 그 마을에 돌담이 만들어졌고 그 때문에 파사성은 미완상태라고 한다."

사실이라고 믿을 만한 얘기는 아니지만, 이 전설에는 '온달과 여동생이 하루아침에 성을 쌓았다'는 온달산성 전설과 같은 묘한 매력이 있다. 적당히 과장된 이 두 전설에는 당시에 사회 활동을 넘어서, 군사적으로도 남녀 활동이 동등하였거나 적어도 여성의 활동이 활발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 양평 상자포리 마애여래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1호). 파사성 북쪽 200여 미터 지점의 큰 암벽에 선각되어 있다.
ⓒ 이용진
장대에 앉아 바라보는 저무는 해

성을 다 둘러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책을 뒤적거리듯 성벽 안팎을 나갔다가 들었다가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산정에서 내려다보는 남한강과 강이 이룬 벌판이 보기 좋다.

성축에 앉아 강 건너 산정으로 저무는 해를 바라보는 맛은 일품이다. 서쪽하늘이 붉게 물들고, 단풍든 산에 들어앉은 석성도 저녁놀에 붉게 물들어간다. 도시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시계를 통해 확인했지만, 이곳에서는 해의 이동과 서쪽하늘의 노을과 사방에 조금씩 밀려드는 어둠, 그리고 몸에 스미는 저녁공기에서 알 수 있다.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하산길이 쉽지 않을 걸 알면서도 오래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고 싶었더랬다. 그리하여 우화(羽化)까지는 아니더라도 몸속 자잘한 생각 따위를 맑게 헹구어내고는 싶었다.

▲ 복원된 서북쪽 성벽. 옛돌과 새돌을 섞어 쌓았다.
ⓒ 이용진
서둘러 하산한다. 마음 급한 걸음은 자주 헛디뎠고, 그만 강 쪽으로 난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그것도 행운이었던지 길은 강가, 주인이 마당을 쓸고 있는 음식점에 닿았다. 대비에 쓸리는 낙엽이 맑은 소리를 냈다. 올갱이 해장국을 시킨다. 청양고추 종종 썰어 넣은 뜨거운 국물을 들이키자 잔뜩 굳었던 뼈마디가 그제야 긴장을 푼다.

저녁을 먹고, 어느 쪽에서 서울행 버스를 탈까 망설이다가 내렸던 자리로 다시 가보기로 한다. 은영슈퍼 주인에게 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은영슈퍼 바깥주인은 어디가고 안주인이 대신 가게를 보고 있다. 남편은 그곳에서 나서 자랐고, 이제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고 했다. 자신은 28년 전에 서울에서 이곳으로 시집왔다고 했다. 남편이 산성길을 가르쳐 준 것처럼 아내도 쉬운 몇 마디 말로 내외가 지나온 길을 알려주었다. 나도 굳이 은영슈퍼 이름 내력을 물어보지는 않았다.

덧붙이는 글 | <파사성 가는 길>

서울에서 양평을 거쳐 여주로 가는 37번 국도를 따라 이포대교 사거리 200m 못 미처 안내 표지판이 있다. 
동서울에서 시외버스로 여주까지 간 다음, 양평방면 버스로 30분, 대신면 천서리에서 내린다. 상봉동에서는 양평을 거쳐 여주로 가는 버스 이용, 천서리에 내리면 된다. 
문의 : 031-887-3566 (여주군청 문화재팀)

* 이 글은 한국토지공사 사외보 <땅이야기>에도 송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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