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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세계 최고 강대국으로 군림하고 있는 미국, 그 정치의 심장부라는 워싱턴D.C.를 방문한 적이 있다. 학회 논문 발표를 위해 간 곳이었지만 20세기에 이어 지금도 지구촌을 이끄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단면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기회라 싶어 다소 기대가 되었던 터였다.

4일간의 학회가 끝난 마지막 날, 다음날 귀국 비행기를 타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그냥 돌아가기에는 아쉬웠던 터라 피곤한 몸을 이끌고 워싱턴 중심가로 향했다.

▲ 워싱턴기념탑에서 바라본 워싱턴DC. 전경(왼쪽이 링컨기념관, 오른쪽이 제퍼슨기념관).
ⓒ 장래혁
고전적 형태의 건물들을 지나 중심가로 들어서자 익숙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워싱턴기념탑을 중심으로 길게 뻗은 잔디 광장, 한쪽에는 아름다운 고전미를 갖춘 국회의사당이, 그 반대편에는 영화 속에 단골로 등장했던 링컨 기념관이 위치해 있다.

국회의사당과 워싱턴기념탐 사이 길다란 잔디 광장의 좌우엔 총 15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세계 최대 박물관인 '스미소니언 박물관(Smithsonian Museum)'이 늘어서 있고, 백악관이 저멀리 시야에 들어온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두 주인공의 아름다운 만남이 있었던 링컨기념관, 그 길다란 연못을 위시해 주변엔 베트남 및 한국전쟁을 기념한 공원이 자리해 있다. 워싱턴 D.C.를 가로지르는 포토맥강 주변에는 제퍼슨 기념관과 미 국방성인 펜타곤을 비롯해 한 번쯤은 다 들어보았음직한 건물들이 즐비하다.

▲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기념탑과 엘리베이터가 있는 기념탑 내부의 모습.
ⓒ 장래혁
도심의 맨 중앙에 위치한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기념탑(Washington Monument)에 오르면 동서남북의 모든 광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1884년 168m 높이로 지어진 기념탐 안에는 각종 유품과 사진들, 연설문 등을 관람객들에게 알리기에 바쁘다.

특히, 자연사, 항공우주, 역사, 공예 등 15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세계 최대 박물관 스미소니언 박물관은 그 규모와 전시물이 보는 이로 하여금 '미국'의 위상을 돌아보게 만들기에 충분할 정도다. 1846년에 창립된 이 박물관은 한 건물만 자세히 둘러보는 데 하루가 걸릴 만큼의 웅장한 규모이건만 모두 무료다. "워싱턴D.C.에 오면 미국의 지난 시간을 모두 느낄 수 있다"는 말이 틀리지 않을 정도.

▲ 세계최대박물관 스미소니언(아래 항공박물관에 있는 전시물들은 대부분 진짜 실물을 갖다 놓음).
ⓒ 장래혁
비록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도시 전체가 하나의 공원이자 박물관이었던 워싱턴 D.C. 200여 년의 짧은 역사를 가진 미국이 자국의 지난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아이들에게 알려가고 있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한국에 돌아온 지 2개월이 지나, 오랜 준비 끝에 국립중앙박물관이 개원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화려한 건물 양식과 조경, 잘 전시된 선조들의 발자취가 담긴 많은 유물들. 전쟁의 폐허를 딛고 불과 반세기 만에 12대 경제 대국에 오른 국가인만큼 그 규모와 양식 또한 아쉬울 게 없다는 보도도 심심찮게 들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화려함 뒤에 도사리고 있던 비뚤어진 역사 인식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절로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고고사관 연표에 고조선이 빠져있는가 하면, 고구려의 설립 연도 또한 다르게 표기되어 있어 관람한 시민들의 눈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고조선이 빠져 있고 고구려의 설립 연도가 잘못됐다는 시민단체의 지적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조삼모사식 눈속임'으로 대응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국학운동시민연합에 따르면 고고학관 입구 안내판의 연표에 고조선이라는 단어만 추가했을 뿐, 전시관 안내소 옆 대형 안내판 2개와 고고학관 안의 고고학연표 4개에는 아무런 수정을 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 국립중앙박물관 웹사이트 '고고관' 소개 내용(www.museum.go.kr).
ⓒ 국립중앙박물관 웹사이트
특히, 구석기 시대부터 발해까지의 역사를 담은 '고고관'은 우리 나라 선사 및 고대 문화를 담아 고고박물관의 성격을 알리는 곳이다. 하지만 총 10개관 중 한민족 최초의 국가 형태를 갖춘 '고조선'과 '단군'의 얘기는 홈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없다. 전시관은 구석기실, 신석기실, 청동기/초기철기실, 원삼국실, 고구려실, 백제실, 가야실, 신라실, 통일신라실, 발해실 총 10개 관이다. 10개관을 설명한 웹 사이트의 어디에도 '고조선'이란 단어를 찾아볼 수 없다.

더군다나, 고조선의 건국이념이자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이기도 한 '홍익인간(弘益人間)'은 웹사이트의 검색창에서 검색조차 되질 않는다. 단군, 단군왕검, 고조선 등의 키워드도 제대로 된 검색 결과가 나오질 않는다. 이것만을 보면 인터넷 세대인 우리의 아이들이 한민족의 첫 국가로 삼국을 꼽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실 고고관의 고조선 표기 수정을 이끌어 내었던 국학운동시민연합,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세계국학원청년단 등은 지난 16일 추가 성명서를 내어 전국 10여 곳의 박물관 역시 별 다를바가 없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또한, 이는 식민사관의 연장선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지하고 '식민잔재 국민고발센터'를 오픈, 전국 박물관의 실태조사에 앞장설 것임을 천명했다.

역사바로알기에 네티즌들의 참여도 적극적이다. 많은 네티즌들이 각종 게시판을 통해 고조선 표기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또, 지난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100만 고구려지킴이 서명운동'을 주도했던 '세계국학원청년단'도 전국 박물관의 역사바로찾기 사이버운동에 적극 나서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번에 문제가 된 고고관의 '고고학 연표'는 고고학적인 관점에서 정리된 것으로 역사관의 '역사 연표'에는 고조선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고 밝혔다. 또 "고고학적 시대 부분에서는 '고조선 시대'라는 학술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국립중앙박물관은 고고학 연표에서 고조선을 언급하지 않은 것"일 뿐 "고조선의 역사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 국학운동시민연합 등 시민단체의 기자회견 및 '식민잔재국민고발센터' 웹사이트.
ⓒ 국학운동시민연합
지난 2개월 남짓 사이 미국과 한국의 수도 워싱턴과 서울에서의 작은 경험은 내게 아쉬움과 부러움, 분노와 안타까움 등 복잡다단한 심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짧디 짧은 역사를 너무나 웅장하고 세련되게 포장하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도시 전체를 박물관으로 만들다시피한 타국가에서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반만 년 역사의 시간이 어찌 이렇게도 허황되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고고학적 연표이니 학문적으로는 틀린 것이 없다는 것이 어찌 들으면 이해할 만한 답변일지도 모른다. 대규모의 박물관을 개장하다 보니 그같은 실수가 있었다고 얘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역사가 해방 반 세기가 지났음에도 아직도 식민사관의 굴레를 벗지 못했음을 수많은 국민들이 느끼고 있다. 오늘날 인터넷상에서 접하는 지난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민족의식에 고취된 재야사학자들의 어설픈 역사 인식으로 되돌리기엔 그 정보의 질과 양이 적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중국의 사서를 통해 숱하게 나오는 고조선의 역사 앞에서도, 지난날의 수난사 동안 짓밟히고 왜곡되고 잃어 버렸던 우리의 역사를 알면서도, 반세기동안 이어온 식민사관의 굴레 안에서 우물안 개구리마냥 한반도 안에서만 고집스레 찾으려하는 학자들이 있는 한, 잃어 버린 우리의 역사가 바로잡히길 바라는 마음이 충족될리 만무하다.

우리의 아이들이 아직도 '단군신화' 속의 곰과 호랑이를 선조들의 역사로 받아들이며 성장한다면, 찬란했던 민족의 영광사는 축소하고 외면한 채 암울했던 지난 날의 수난사의 기억만을 역사의 장으로 인식할 때, 우리의 밝은 미래는 없을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고조선 표기 하나가 반세기 이어온 우리의 역사인식을 부끄럽게 만드는 요즈음이다.

덧붙이는 글 | * 국학운동시민연합 '식민잔재국민고발센터' www.kookhak-ngo.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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