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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선행

다른 욕심은 모르겠는데 '엄마표 김치'만은...

염치없는 일이긴 하지만 해마다 친정어머니가 담가주시는 김장김치를 먹고 있습니다. 김치를 가져 올 때마다 친정아버님은 한결같이 "올해만 해주지 내년에는 못 담가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저도 해마다 똑같은 대답을 하고 옵니다. "알았어요. 내년에는 제가 담글게요." 대답은 하지만, 천년만년 부모님이 살아계실 것 같고 언제나 또 김치를 담가주시겠지 하는 속마음입니다. 건강이 예전같지 않다며 이곳저곳 아픈 곳을 말씀하실 때면 부모님의 건강이 염려되면서도 어느새 잊어버리곤 합니다.

올해는 배추 값이 비싸다느니 김치는 사서 못 먹겠다느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김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믿는 구석이 있어서인지 그다지 우리집 김치 걱정은 없었습니다.

며칠 전 아버님 생신이라 친정에 갔는데 김장을 담글 거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김치는 못 담가주신다는 말씀도 덧붙여 하셨습니다. 친정어머니 건강이 안 좋아 보여 내심 '내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김치를 가져다 먹나' 자책을 했습니다.

친정아버님이 아파트 모델하우스 지을 공터에 콩을 심었는데 비둘기가 씨앗을 먹어버려 낭패를 당하셨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배추 몇 포기 심었는데 잘 자랐다며 나누어 줄 정도는 안 되고 두 분이 잡수실 양밖에 안된다고 하십니다. "사서라도 해 줬으면 좋겠지만, 엄마 건강이 예전 같지 않다." 아버지의 말씀에 올해는 내 손으로 김장을 담아 보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친정에 다녀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너희 집에 총각김치 보내려고 하는데 먹을래?" 얼마나 반가운지 얼른 대답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요."

전화를 끊고 후회하긴 했습니다. 건강이 안 좋아 부석부석한 엄마 얼굴도 떠오르고 맛있는 김치생각도 났습니다. 이래서 딸은 도둑이라고 하나 봅니다. 다른 욕심은 모르겠는데 엄마표 김치만은 욕심을 부리게 됩니다.

이틀 후 김치가 택배로 왔습니다. 일에 쫓겨 김치냉장고에 얼른 넣으라는 당부 말씀도 잊고 있다가 이제야 짐을 풀어 보았습니다. 꼼꼼하게 포장한 김치 통을 여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총각김치를 조금 보내셨나보다 생각했는데 배추김치까지 이것저것 넣어 주신 정성이 보입니다. 아마도 몇 포기 안 된다고 말씀하신 직접 키운 배추로 담근 김치를 딸 생각에 다 보내셨음이 분명합니다.

매운 걸 좋아하는 내 입맛에 맞춰 청양고추를 섞어서 했는지 매콤한 김치 맛에 밥맛이 저절로 납니다.

"아휴! 매워라. 맛있다. 그치?"
"이만하면 김장 안 해도 되겠네." 남편의 안도하는 말투에 몇 해 전 생각이 납니다.

김치를 버무리다 말고 '탈출' 시도

평소 고혈압 약을 드시긴 했지만 별다른 증세가 없이 건강하게 지내시던 친정 어머니가 갑자기 앞이 안 보여 입원하셨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고혈압으로 생긴 일시적인 현상이라곤 했지만 식구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해는 입원해 계신 엄마도, 지켜보는 가족도 김장을 잊었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건강을 회복하셔서 퇴원하시긴 했지만 우리 집 김장김치는 제 몫이 되었습니다. 안하던 일을 하려니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무엇부터 해야 할지 일의 두서가 없습니다. 절여 놓은 배추를 씻어 속을 반쯤 넣고 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휴일인데 점심이나 같이 하자는 지인의 전화였습니다.

김장을 버무리다 말고 마치 탈출이라도 하는 양 도망치듯 집을 빠져 나왔습니다.

배추 열 포기 중 다섯 포기 속만 더 넣으면 되는데 지루하기가 짝이 없던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표현을 빌리자면 지레김치도 안 되는 양이라고 하셨지만 제게는 엄청 많은 양이었습니다.

지인에게 "나 김치 담그다 말고 나왔다"고 하니 깜짝 놀라는 표정을 합니다. "놀라긴. 불러내서 고마워요. 나 혼자 김치 담그느라 죽는 줄 알았어."

그 날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많은 양의 김치를 한 역사적인 날이었으며, 김치 담그다 말고 팽개치고 나갔다 온 날이기도 했습니다. 김치 담그다 말고 점심 먹고 차 마시고 놀다 온 사람은 없을 거라며 그날의 일은 두고두고 지인의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그 날 밤늦게까지 김치를 담그긴 했지만 중간에 바람을 쏘이고 와서 그랬는지 김치 담그는 손놀림이 한결 빨라졌습니다. 김치 담그느라 애쓰던 제 생각을 하니 친정에서 보내 주신 김치가 더 귀하게 여겨집니다. 팔순에 가까운 부모님이 보내주신 이 김치야 말로 그 어느 김치에 비교가 될까요?

아이들도 팔 걷어 부치고 김치 담근 이야기

요즈음 부쩍 김치에 관심을 갖는 유치원 아이들이 많습니다. 뉴스를 보았거나 어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은 녀석들의 아는 척하는 모양이 귀엽습니다. 그동안 김치를 잘 먹던 아이들인데 왠지 김치를 덜 먹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 엄마가 김치 먹지 말랬어요"
"이 김치는 직접 담가서 괜찮지요?"

꼭 짚고 넘어가는 애어른 같은 유치원생도 있습니다.

마침 유치원에서 김장을 담그는 날이라 잘 됐다 싶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머리 수건과 앞치마를 가져오라고 했더니, 아침부터 교실이 소란스럽습니다.

"오늘 우리가 김치 담그는 날이지요?"

제 딴에는 김치를 얼마나 많이 담그려고 하는지 몰라도 아이들의 기대가 대단합니다. 전날 절여놓은 배추를 씻으며 아이들에게 절이는 것도 보여주었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김치 담그는 몫은 양념해 놓은 속을 배추에 넣어 보는 일이 고작입니다.

하지만 녀석들은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양 관심이 대단합니다. 그 조그만 손에 일회용 비닐장갑을 끼워주고 흘러내릴까 노란 고무밴드를 손목에 채워 주었습니다.

일회용품을 쓰지 말자고 했었는데 아이들 손이 매울까봐 어쩔 수 없습니다. 벌써부터 고춧가루 매운 냄새가 난다며 코를 막으며 들어서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김치 속 넣는 시범을 살펴보던 아이들은 제법 잘 따라합니다. 아예 팔을 걷어붙이고 열심히 하는 모습이 의젓합니다. 아뿔싸! 교실은 김치 양념이 이곳 저곳에 떨어져있고 아이들의 소매자락이며 옷에는 어느새 고추물이 빨갛게 들었습니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미있는 듯 자기가 만든 김치를 먹어 보겠다고 야단입니다. 한 잎씩 떼서 아이들 입에 넣어 주는 선생님의 손길이 바빠졌습니다. 녀석들! 매운 기색 하나 없이 척척 잘도 받아먹더니 물을 연거푸 마십니다.

순식간에 배추 스무 포기 속 넣기가 끝났습니다. 유치원 뒤뜰에 항아리를 묻고, 꼬마들의 정성으로 담근 김치를 꼭꼭 묻었습니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아이들은 김치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한 모양입니다.

"재미있어요" "또 해보고 싶어요" 말하는 아이들이 우리 전통 음식인 김치를 잘 먹고 쑥쑥 자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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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부터 시작되는 일상생활의 소소한 이야기로부터, 현직 유치원 원장으로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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