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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는 색의 미학이 어우러진 작품이다
김치는 색의 미학이 어우러진 작품이다 ⓒ 유성호
김장을 하는 날은 새벽녘부터 수선스럽다. 전날 절여 놓은 배추를 씻어 물을 빼야만 양념과 버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배추를 절이기 이레 전부터 재계(齋戒)를 했다 하니 대단한 경외가 아닐 수 없다. 그만큼 먹을거리에 정성을 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올 김장은 절임배추를 주문해서 느긋하게 시작할 수 있었다.

충북 괴산에서 재배한 배추를 씻고 절여서 보내 왔다. 겉보기에도 배추는 싱싱하고 속이 노릇한 게 여간 실하지 않았다. 더 이상 손댈 것도 없이 소금물만 적당히 빼고 양념소를 버무리면 그만이니 김장 제조공정의 절반 이상이 절약된 셈이다. 그래도 김장을 대하는 마음은 변함없이 긴장이다. 긴장의 강도는 맛을 좌우하고 겨우내 식사 시간의 행복지수까지 쥐락펴락하기 때문이다.

올 김장은 절임배추를 주문해서 느긋하게 시작할 수 있었다
올 김장은 절임배추를 주문해서 느긋하게 시작할 수 있었다 ⓒ 유성호
절인 배추를 커다란 채반에 받쳐 두고는 양념에 들어갈 재료들을 준비한다. 이 과정은 쉬워 보여도 가짓수가 많아 때때로 빠트리는 경우가 있어서 꼼꼼함이 요구된다. 대표적인 재료로는 땅위 채소군으로 무, 대파, 쪽파, 미나리, 갓 등이 있으며 땅속 채소로는 마늘, 생강이 있다. 바다에서 난 것 중 동물성으로는 새우, 멸치, 까나리, 황석어 등의 젓갈과 생새우, 생굴, 어린 조기, 그리고 식물성의 청각이 있다.

50포기 김장에 들어갈 양념소를 손질해서 모아 두니 큰 양푼 두 개에 그득하다.
50포기 김장에 들어갈 양념소를 손질해서 모아 두니 큰 양푼 두 개에 그득하다. ⓒ 유성호
준비한 재료들은 다듬고, 씻고, 썰고, 채치고, 갈고, 어떤 것은 끓인다. 대지의 작가 펄벅이 1960년 한국에 처음 왔을 때 경주 관광 도중 한 음식점에서 무채를 썰어 놓은 것을 보고 기계로 썬 것이 아니냐고 동행자에 물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만큼 정교한 칼질을 하던 옛 시절을 보내고 이제는 채칼이 그것을 대신한다. 대파는 어슷하게 얇게 썰고, 쪽파와 미나리 등 나머지 채소는 새끼손가락 길이로 적당히 자른다.

아이들도 한 손 거들고 나섰다
아이들도 한 손 거들고 나섰다 ⓒ 유성호
50포기 김장에 들어갈 양념을 손질해서 모아 두니 큰 양푼 두 개에 그득하다. 어머니는 한쪽에서 김장 맛을 좌우하는 고춧가루 양념소를 따로 만드신다. 고춧가루에 갖은 젓갈과 마늘, 생강, 찹쌀풀을 눈대중과 손끝으로 계량하면서 버무리신다. 그 손끝에 달린 계량기는 70여 년 동안 단 한 번의 고장도 없이 정교하기 그지없다. 절묘한 계량은 곧 가족의 행복이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는 향기가 싸한 가루를 한 주먹 털어 넣으신다.

제피가루다. 이국적 향을 가진 천연향신료인 제피는 맛도 맛이지만 선도 유지와 기생충을 없애는 효과까지 있다고 하니 어찌 보면 한약의 감초 같은 존재다. 제피를 섞자 양념소의 향이 알싸하게 집안으로 퍼진다. 고춧가루 양념소를 손질한 야채와 섞어 버무리면 속은 완성이다. 이쯤 되자 어느덧 소금물을 빼고 있던 배추도 잎이 살아 오르기 직전이다. 배추와 속을 버무릴 시간이다.

배추의 노란 속에 양념소를 적당히 올리고 생굴 두어 개를 보태 휘감아 먹는 시식.
배추의 노란 속에 양념소를 적당히 올리고 생굴 두어 개를 보태 휘감아 먹는 시식. ⓒ 유성호
배추의 양과 양념소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게 하는 것 역시 김장에서 중요하다.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양념소가 남으면 큰 문제가 없지만 모자라면 맛과 관계없이 그 김장은 실패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속 버무리기가 시작되자 어머니는 몇 번이고 속을 아끼라고 다그치신다. 어림 눈대중으로 대충 맞아떨어질 것 같은데도 같은 소리를 계속하신다. 관록 앞에서 자식들과 며느리, 사위는 명령에 따를 뿐이다.

아이들도 한손을 거들고 나섰다. 반쪽이던 배추를 다시 반으로 잘라 버무리는 팀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아이들 몫이다. 조막만한 손으로 배추를 움켜쥐고 둘러앉은 어른들 등 뒤로 연신 왔다 갔다 하는 아이들은 어느새 경쟁이 붙어 힘든 줄도 모른다. 아이들도 한몫했으니 김장 김치를 먹을 자격은 충분하다.

1년마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밥도둑
1년마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밥도둑 ⓒ 유성호
배추의 노란 속에 양념소를 적당히 올리고 생굴 두어 개를 보태 휘감아 먹는 시식은 그 해 김장의 맛을 품평하는 의식과도 같다. 짜다, 맵다, 싱겁다 등의 반응에 따라 양념들이 보태진다. 그러나 이번 김장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맛이라는 평가들이 터져 나왔다. 특히 제피가 절묘하게 섞여서 맛이 좋다는 평가다. 제피가 이번 김장의 일등공신이 되는 순간이다. 손끝 계량기의 건재함을 확인하셨던 것일까, 어머니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한쪽에서는 김장 담그는 날이면 어김없이 준비되는 특별한 저녁상이 준비되고 있다. 소고기무국과 돼지고기 삶은 것이 그것이다. 과거에는 야외에서 김장을 담근 후 언 몸을 녹이기 위해 먹었음직한 메뉴다. 삶은 돼지고기를 새우젓에 찍어서 갓 버무린 김장 김치에 보쌈을 해 먹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다. 1년마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밥도둑의 날에 모든 식구들은 참 많이도 밥을 훔쳤다.

김치는 시각기호와 미각기호를 동시에 창출하는 아름다운 밥도둑이다. 오방색의 시각 효과와 오미(五味)로 미각까지 충족 시키는 종합예술작품이다. 게다가 김장 김치를 담글 때는 여러 손과 마음의 일치와 합심을 요구하는 주술적인 요소까지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의 주술은 먹을거리를 통한 가족공동체의 건강과 안녕이다. 내년 이맘때도 가족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둘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맛있는 김장을 담그는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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