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해의 로마, 에페소
잊혀졌던 도시 에페소가 세상 밖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896년 오스트리아 고고학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발굴 작업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이 발굴작업으로 그동안 버려진 도시 에페소는 찬란한 문명을 지닌 '에게해의 로마'로 재탄생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보이는 유적 또한 에페소 전체의 10% 정도밖에 안되는 발굴성과라는데 그저 놀라울 뿐이다. 전체를 모두 발굴하려면 앞으로도 300년 이상 걸린다고 하니 그 규모의 어마어마함이란….
그러나 땅의 역사와 민족의 역사가 다르기 때문일까? 오스만 투르크의 후예인 지금의 터키인에게 있어서 조상의 역사가 아닌 고대 에페소의 문명은 케말 파샤의 흔적보다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자신의 땅에서 발굴되는 유적에 대해 입장료 수입 외에는 애착이 없고 오히려 헬레니즘 문명의 영향을 받은 타국의 고고학계가 더욱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제 3자의 입장에서 왠지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이는 이곳의 유물을 포함한 다른 유적지의 유물이 터키가 아닌 타국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 또한 잊혀졌던 도시 에페소의 또다른 운명이라는 생각을 하며 에페소 유적의 입구로 서서히 들어갔다.
멧돼지와 물고기의 도시
에페소라는 도시가 건설되기까지의 과정은 진위 여부는 정확하지 않지만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신전에 조각으로 새겨진 안드로클로스의 전설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안드로클로스라는 사람이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길을 떠나기 전에 아폴로 신전에서 멧돼지와 물고기가 있는 곳에 도시를 건설하라는 신탁을 듣고 길을 나섰다.
그 후 안드로클로스와 일행이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어느 한곳에 머물러 물고기를 잡아 요리를 하다가 실수로 물고기가 숲으로 튀는 바람에 물고기를 줍기 위해 숲으로 가니 그곳에서 멧돼지가 뛰쳐 나왔다. 이 광경을 보고 신탁의 내용을 떠올린 안드로클로스는 신탁대로 멧돼지와 물고기가 있는 이곳에 도시를 건설했는데 그곳이 지금의 에페소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전설은 매우 즉흥적이지만 지금 내 앞에 보이는 에페소라는 도시는 철저한 계획 하에 오밀조밀하게 세워진 계획도시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이유는 상하수도시설이 되어있는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 보면 곧 알 수 있다. 곳곳에 늘어서있는 아고라(시장), 오데이온(소극장), 물탱크, 상가거리(아르카디안 도로), 시청, 공중목욕탕과 화장실, 도서관, 대극장 등의 공공시설들은 현대의 어느 도시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짜임새를 갖추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밖에도 이러한 공공 시설을 축으로 해서 바닥에 장식되어 있는 아름다운 모자이크가 인상적인 부자촌 거리와 브로델이라는 소위 홍등가의 존재 또한 그 당시 에페소라는 도시 전체를 떠올릴 때 빠질 수 없는 곳이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셀수스 도서관과 바로 앞의 홍등가였다.
셀수스 도서관은 2세기 초 로마 제국 시대에 아시아 지역을 관할하고 집행하던 셀수스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이 아버지를 기리며 지은 도서관으로 무려 1만2000여권의 장서가 과학적인 구조에 의해 최적의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며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남아있는 16개의 코린트식 기둥이 세워진 웅장한 2층 건물 정면에 있는 3개의 출입구 양쪽 벽에는 아름다운 여성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각각 지혜, 사색, 학문, 미덕을 상징하는 이 여신상은 애석하게도 원본이 아닌 복제품이다.
원본이 있는 곳은 짐작했던 대로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에페소 박물관이다. 에페소를 처음 발굴한 팀이 오스트리아 고고학회이고 일종의 발굴의 대가(?)라고 본다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그런데도 난 왜 이리 심기가 편하지 않은 것일까?
독일에 있는 히타이트나 페르가몬의 유물, 독일에 있다가 러시아로 옮겨진 트로이 유물들, 영국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의 유물들과 세계 곳곳의 도시 광장에 세워진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처럼 남의 땅에서 행하여진 이러한 형식의 발굴 대가나 도굴 등으로 인해 원래의 땅을 떠나 낯선 타국을 전전하는 유물들의 신세를 생각하니 프랑스에 반환을 요청했으나 아직도 지지부진인 우리의 외규장각도서가 문득 생각난다.
아무리 터키라는 땅과 민족의 역사가 달라 로마시대 유물의 보존에 소홀하다 하더라도 독일 땅의 터키유물이나 프랑스 땅의 한국 유물이 절대 독일이나 프랑스 것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유물은 원래 자리로 되돌려주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유물은 본래 있던 자리에 존재할 때 그 존재가치가 더욱 빛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 최초의 광고는 홍등가 광고
또 한가지 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대리석 바닥에 새겨져 있는 홍등가의 광고이다.
여인의 모습과 발 그리고 동전모양의 홈이 새겨진 이 광고는 대략 "아름다운 여인을 보러 오시려면 동전(현금)을 가지고 발바닥이 표시하는 방향으로 오세요. 단 이 발자국 크기보다 큰 발을 가진 사람(성인)만 오세요" 라는 뜻이란다.
이런저런 의미를 빼고라도 사업(?)으로서의 매춘이 지닌 끈질기고 기나긴 잡초같은 역사에 대해 놀라기도 했지만 말로는 세계 최초의 광고라고 하는데 그 최초의 광고가 하필이면 대극장도 아니고 시장통도 아닌 도서관 가는 길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흥미롭다.
그렇다면 당시 마케팅의 주요 고객이 공부하러 가는 지식인층 남자일 거라 추측해 볼 때 당시 홍등가가 정치적인 목적의 살롱 구실을 하지 않았을까? 상상만으로도 꽤 흥미로운 가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에페소 사람들의 또다른 흥미로운 생활상을 보기위해 발길을 돌리니 그곳에는 공중화장실과 목욕탕이 있었다.
대리석 좌변기 아래로 물이 흐르게 만든 화장실은 칸막이가 없어 민망한 느낌은 들지만 구조상으로 지금 당장 써도 별 문제 없어 보이는 천연 수세식 좌변기이다.
이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에페소 남자들은 소정의 입장료를 내야하고, 여러 개의 변좌에 여러 사람들이 느긋하게 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하니 민망함은 그렇다고 해도 냄새 때문에라도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여간 로마시대의 화장실은 만남의 장소와 같은 역할을 한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이밖에도 2만4000명 정도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극장이나 1400여명의 수용이 가능한 소극장 오데이온은 모두 집회나 강의, 음악회의 용도로 사용된 곳이다. 규모는 오데이온이 대극장은 물론이고 파묵칼레에서 보았던 히에라 폴리스의 원형극장보다도 훨씬 작은 규모이지만 나름대로 좌석에 정교하게 조각되어있는 사자발 조각이 아기자기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대극장에서 특이한 것은 아직도 잘 이해되지 않는 음향기술이다. 확성기가 없었던 시절 에페소 사람들은 중앙의 공명판을 통해 나간 소리를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에 실어올려 위쪽의 관람석까지 그대로 전달하는 구조라는데 실제 가운데에서 마이크없이 소리를 내도 이에서도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리는 것이 신기했다.
뜨겁게 햇볕에 달궈진 대리석들이 내뿜는 열기가 서서히 견디기 힘들어질 무렵 대리석 돌조각에 앉아 이리저리 쓰다듬으니 조각 하나하나에 따스한 온기가 배어나온다. 그새 정들었던 탓일까? 아니면 익숙해진 것일까?
현대인보다 오히려 훌륭했던 에페소 사람들의 지혜에 감탄하다 보니 아쉽게도 에페소와의 작별의 시간이 점점 가까워졌다.
덧붙이는 글 | 터키 7박8일 여행기16번째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