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두 가지 모습이 있다. 하나는 풍요로움의 상징, 수확의 계절. 다른 하나는 락(落)이라는 이미지. 쓸쓸함, 고독의 계절. 그 중에서도 락이라는 이미지가 들어맞는 건 가을의 여러 달 중에서 11월이라고 한다.
저녁 늦바람이 쌀쌀해 서둘러 집으로 향하고 싶어지는 요즘. 단풍 구경 한번 제대로 못해 본 가족들을 위해 큰 맘 먹고 짐을 꾸렸다. 새벽에 일출을 보는 곳이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단잠에 빠져 있는, 이제 갓 두돌이 지난 아들 녀석과 부모님을 모시고 싸늘한 밤공기를 가로질러 달렸다. 어디로 가면 좋을까를 두고 아내와 의견 충돌도 있었지만 나의 고집대로 여수로 방향을 잡았다.
여행을 위해 이렇게 밤중에 운전을 해보긴 정말 오랜 만이었다. 결혼 후 제대로 여행을 가보지 못했던 아내는 신이 났던지 평소 차만 타면 수면제를 먹은 듯 조용해지지만 오늘만은 예외였다. 졸음운전이라도 할까 여수를 가는 내내 재잘 재잘 수다를 떨어준다.
여수는 몇 년만에 처음이다. 처음 갔을 때 향일암이 좋다는 얘기에 거기만 훌쩍 다녀왔는데 이번에는 무작정 나섰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내와 부모님 그리고 이제 갓 두 살을 넘긴 아들 녀석 모두 신이 났다. 그러는 사이 돌산대교가 보인다. 사실 돌산대교라는 이정표가 나올 때 내심 '아직도 조명이 켜져 있었으면' 했는데 아쉽게도 조명은 없었다.
가까운 사천-남해 연륙교의 조명이 돌산대교에서 힌트를 얻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돌산대교의 야경은 감상하는 것은 다음 번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거의 새벽 두 시가 가까운 시각이라 해돋이를 볼 요량으로 시계를 맞추고 일찍 잠을 청했다.
설렘 때문일까? 아침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아내를 깨워서는 무슬목(무술목이라고도 함)으로 향했다. 처음 가는 길이라 조금만 헤매다가는 일출을 놓칠지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달렸다. 가는 길 중간에 혹시 하는 마음에 어떤 아주머니께 여쭸더니 코앞이란다. 주차장에 차를 대기 무섭게 아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치듯 일출을 보기 위해 뛰어 갔다. 다행히 일출 전이다.
이리저리 렌즈를 바꿔 끼우며 구도를 잡다가 해가 솟아오를 무렵 정말 장엄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오메가(Ω) 해돋이'를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오메가 해돋이'라는 것을 보기가 그렇게 어렵다고들 이야기하는데, 이렇게 무슬목에서 가족을 모두 데리고 온 해돋이 여행에서 보게 되다니 '난 참 행운아다'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결혼 전 지금의 아내와 친구 둘 이렇게 해서 겨울 지리산에 다녀 온 적이 있다. 그 때 천왕봉을 오르기는 처음이었는데 멋지게 내려앉은 운해와 황홀한 일출을 보게 되었다. 아내는 여러 수십 번을 지리산으로 다녔지만 그런 날은 정말 처음이라며 나를 정말 행운아라 했었다. 그렇게 보기 힘든 것을 보게 된 것이 행운이 아니면 또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난 정말 억세게 운이 좋은 놈이다!
사실 무슬목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실망이었다. 사진으로 본 무슬목은 신비롭다는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무슬목 사진은 몽돌에 파도가 안개가 깔린 것처럼 부서지는 사진이 대부분이었는데 우리가 간 때는 물이 많이 빠져서 그냥 백사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선물로 기분이 좋은 하루를 맞게 되었다.
이제 '여수'하면 향일암과 돌산 갓김치만 생각나던 것이 새로운 항목을 하나 더 추가해야 할까보다.
감이 좋은 오늘, 이젠 향일암으로 향한다. 역시 돌산에서 갓김치를 빼면 싱거운 일이 되고 만다. 입맛이 없는 때 갓김치 하나만 있으면 금방 입맛이 살아난다.
향일암으로 가는 길, 보이는 밭에는 죄다 갓이다. 잠시 차를 세우고 한창 수확중인 할머니께 여쭈니 대부분 공장으로 간단다. 올 해는 갓이 풍년인지 쉬엄쉬엄 일하는 동네 할머니들의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향일암에 가기 위해서는 가파른 길을 올라야 한다. 아주머니와 눈만 마주치면 갓김치 맛을 봐야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집에서든 갓김치를 사야 한다. 돈 만원으로 며칠 동안 입안이 즐거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행복한 일이다.
향일암하면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진주에 엘리자베스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엘리자베스는 한국 문화에 아주 관심이 많아 시간만 나면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곤 했었다. 그녀가 어느 날 여수에 다녀오더니 결국 향일암 문턱에서 좌절하고 돌아왔다는 얘기를 했다. 이쯤 되면 향일암에 다녀온 적이 있는 사람들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산 중턱에 있는 향일암을 오르는데 몸매가 안 따라주면(?) 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주문을 통과하고 조금 더 오르면 두 바위 틈으로 아주 좁게 난 통로가 있는데 엘리자베스의 몸은 통과하기가 여의치 않았던 것 같다. 우리 웬만한 사람도 배낭이라도 하나 짊어지고 간다면 바위에 닿지 않고는 못가는 그런 좁은 곳이다. 수행하는 스님들의 게으름을 막고자 함이었을까? 아니면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이제 갓 만 두 돌을 넘긴 아들 녀석은 욕심이 얼마나 많은지 어른들도 쉬엄쉬엄 오르는 계단을 빨리도 오른다.
향일암은 서기 644년 원효대사가 창건했으며 원통암, 영구암, 금오암으로 불리다가 지금은 향일암이라 불리고 있다. 향일암 대웅전 앞마당에서 보면 시원하게 뚫린 남해바다가 모든 잡념을 잊게 해준다. 향일암에서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소원이 이루어질 것 같다.
돌아오는 길 다시 무슬목에 들렀다. 전라남도 수산종합과학관이 있는데 볼거리가 꽤 많은 전시관이었다.
들어가기 전 집사람이 시큰둥해 하더니 아들 녀석이 좋아하는 고기들이 많이 보이자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이곳에는 처음 보는 고기들도 많고 익살스럽게 생긴 고기들도 꽤 있는데 심지어 꼭 멧돼지 얼굴을 닮은 쥐치 종류도 보인다.
2층 전시실에는 트롤어선의 모형이며 수산업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입체적인 모형까지 있으니 정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이에게 줄 가장 큰 재산은 행복한 기억이라고 하는데 이제부터라도 이 녀석에게 조금씩 그 기억을 심어줘야겠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끔 이렇게 가족들과 여행하는 것을 잊고 살지는 말아야겠다. 모처럼 가족과 떠난 여행이지만 돌아오는 길은 항상 아쉬움이 남는다. 이 아쉬움도 여행의 또 다른 맛이리라.
덧붙이는 글 | *도로안내
순천IC → 여수방면 4차선도로 → 36km → 여수시
*현지교통
여수 시외버스공용터미널에서 향일암행(0640-1900)시외버스 이용, 1일6회운행,40분 소요 여수시외버스공용터미날 건너편에서 시내버스 111번, 1일 10회운행/1시간
*추천 관광 코스
관광코스 : 유람선/ 돌산대교 - 장군도 - 진남관 - 오동도 - 쇠머리등대 - 무술목전적지 - 방죽포해수욕장 - 향일암
*주변관광지 : 이충무공전적비, 돌산대교, 오동도, 흥국사, 만성리해수욕장, 방죽포해수욕장, 전남수산종합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