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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이나 바위 또는 나무줄기에 붙어서 자라는 담쟁이덩굴은 질긴 잡초 근성이 있다. (제주시 황새왓마을 가는 길에서)
돌담이나 바위 또는 나무줄기에 붙어서 자라는 담쟁이덩굴은 질긴 잡초 근성이 있다. (제주시 황새왓마을 가는 길에서) ⓒ 김동식
돌담이나 바위 또는 나무줄기에 붙어서 자라는 담쟁이덩굴은 질긴 잡초 근성이 있다. 한방에서는 지금상춘등(地錦常春藤)이라 부른다. 덩굴손 끝에 둥근 흡착근이 있어 담벽에 달라붙으면 웬만하면 떨어질 줄 모른다. 담벼락 아래로 축 늘어지는 미국담쟁이와는 격부터 다르다. 10m 이상 줄기가 뻗어 올라갈 정도로 보통내기가 아니다.

담쟁이덩굴의 붉은 몸짓이 왕성한 시기는 가을단풍이 낙엽이 되어 누운 11월이다. 마지막 혼을 사르는 모습이 부럽다. 우리 민초들의 삶이 이와 다르지 않다. 제 발로 가파른 언덕을 꾸준히 올라가는 모습이 우리네 인생살이를 많이 닮았다.

마지막 혼을 사르는 모습이 부럽다. 우리 민초들의 삶이 이와 다르지 않다. (제주시 황새왓마을 가는 길에서)
마지막 혼을 사르는 모습이 부럽다. 우리 민초들의 삶이 이와 다르지 않다. (제주시 황새왓마을 가는 길에서) ⓒ 김동식

세상과 교감하는 붉은 핏줄들

11월은 유난히 아픔이 많았던 계절이다. 신문의 사회면이 온통 잿빛이다. 그 질긴 생명들이 왜 이렇게 쓸쓸히 떠나갔는가. 덩굴 같은 삶의 인연을 끊고 홀연히 떠난 자리에는 슬픈 아우성만 남았다.

11월은 유난히 아픔이 많았던 계절이다. 담쟁이덩굴 같은 삶이 지나간 자리에는 슬픈 아우성만 남았다. (제주시 영평마을 가는 길에서)
11월은 유난히 아픔이 많았던 계절이다. 담쟁이덩굴 같은 삶이 지나간 자리에는 슬픈 아우성만 남았다. (제주시 영평마을 가는 길에서) ⓒ 김동식
정든 교실을 떠난 외로운 희망꽃도 있다. 11월 10일, 극도의 외로움 속에서 개에 물려 죽어간 아홉살짜리 소년의 이야기는 눈물겹다. 경기도 의왕시 권아무개(9·초등3년)군이 외가의 주거용 비닐하우스에서 혼자 지내다 도사견에 물려 숨진 사건이다.

11월 16일에는 지상 21m 높이에서 엘리베이터 점검 작업을 하던 한 실업계 고등학생이 지하 1층으로 떨어져 안타깝게 숨졌다. 생활보호 대상자로 큰아버지 집에서 살며 고된 노동을 마다하지 않던 김아무개(18·고3년)군의 인생은 그렇게 짧게 마감됐다. 가고 싶던 야간대학의 꿈도 함께 접었다.

암으로 숨진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고교생이 뒤따라 목숨을 끊는 일도 일어났다. 11월 22일 숨진 김아무개(16·고2년)군은 외아들로 지난해 1월 어머니가 자궁암으로 숨진 후 아버지와 단둘이 생활하면서 어머니의 죽음에 심한 충격을 받고 괴로워했다고 한다.

세상과 교감하는 붉은 핏줄이 예사롭지 않다. 정든 교실을 떠난 외로운 희망꽃들일까? (제주시 영평마을 가는 길에서)
세상과 교감하는 붉은 핏줄이 예사롭지 않다. 정든 교실을 떠난 외로운 희망꽃들일까? (제주시 영평마을 가는 길에서) ⓒ 김동식
어느 성매매 피해여성의 죽음도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11월 11일과 17일, 광주 송정리 세칭 '1003번지'라는 유흥업소에서 불이나 성매매 피해여성이던 김아무개(25)씨와 김아무개(31)씨가 각각 질식해 숨졌다. 불이 났던 유흥업소에는 희망의 비상구조차 없었다.

지난 10월을 눈물과 분노로 달구었던 고 노충국씨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11월에도 아픈 가슴을 달래야 했다. 11월 21일에는 노충국씨와 비슷한 처지로 전역 6주만에 위암말기 진단을 받고 병마와 싸우던 김웅민(23)씨가 끝내 세상을 떠났다. 다시 한번 우리나라 군 병원의 부실진료가 부른 화근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전역 37일 만에 위암 3기 진단을 받은 박상연(24)씨와 전역 45일 만에 췌장암 진단을 받은 오주현(22)씨 등이 실낱같은 생명의 끈을 붙잡고 투병 중에 있다고 한다.

유난히 담쟁이덩굴이 우리 마음 속에 불붙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위에 엉켜있는 모습이 우리네 인생살이를 많이 닮았다. (서귀포시 월라봉 가는 길에서)
유난히 담쟁이덩굴이 우리 마음 속에 불붙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위에 엉켜있는 모습이 우리네 인생살이를 많이 닮았다. (서귀포시 월라봉 가는 길에서) ⓒ 김동식

벼랑 끝에 몰린 덩굴 같은 삶

쌀 개방 반대 시위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농민들이 잇따라 목숨을 끊어 안타까움을 더 해 주고 있다. 벼랑 끝에 선 농민들의 서러운 죽음 앞에 세상 사람들은 눈물조차 말라 버린 듯하다. 11월23일, 농민들의 거센 저항에도 불구하고 쌀협상 비준동의안은 결국 국회를 통과했다.

11월11일에는 쌀협상 비준안 국회 본회의 상정을 앞두고 정용품(38·전남 담양군)씨가 우리나라 농업·농촌정책을 비판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대접받을 수 있는 사회"를 바라며 '농업인의 날'에 충격적인 죽음을 선택한 그는 10년 넘게 고향에서 딸기와 벼농사 등을 지으며 이장과 농협이사, 농민단체 회원으로 활동해 왔다.

그리고 11월17일, '성실히 노동하면 땅은 알아줄 것'이라고 믿었던 여성농민 오추옥(41·경북 성주군)씨가 귀농 6년 만에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남긴 것은 '쌀개방 반대' 유서였다.

11월24일에는 지난 15일 서울 여의도 농민대회에 참가했다가 머리를 다쳐 두 차례에 걸쳐 뇌수술을 받아 온 전용철(43·충남 보령군)씨가 끝내 숨졌다. 그러나 '공권력에 의한 사망'이라는 전국농민회총연맹측의 주장과는 달리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25일 사망원인으로 밝혀진 '후두부 충격'이 경찰의 강경진압 과정에서 나타났을 가능성에 대한 증거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공식 밝혔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잘 자라는 이 덩굴식물도 담장을 헐고, 짓밟으면 자랄 수 없다. (제주시 영평마을 가는 길에서)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잘 자라는 이 덩굴식물도 담장을 헐고, 짓밟으면 자랄 수 없다. (제주시 영평마을 가는 길에서) ⓒ 김동식

"담쟁이덩굴은 혼자 담을 넘지 않는다"

담쟁이덩굴처럼 질긴 게 사람의 목숨이라 했던가. 그것은 우리 사회가 제몫을 다 했을 때 가능한 말이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잘 자라는 이 덩굴식물도 담장을 헐고, 짓밟으면 자랄 수 없다.

민초들의 삶도 위태위태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곳에서 붙잡고자 하는 행복의 의미는 무엇인가. 가난한 백성의 아우성은 이 나라의 미래를 지탱하는 희망의 지렛대다. 그래서 국가와 사회는 이들에게 무한책임이 있다.

가난한 백성의 아우성은 이 나라의 미래를 지탱하는 희망의 지렛대다. 그래서 국가와 사회는 이들에게 무한책임이 있다. (서귀포시 월라봉 산기슭에서)
가난한 백성의 아우성은 이 나라의 미래를 지탱하는 희망의 지렛대다. 그래서 국가와 사회는 이들에게 무한책임이 있다. (서귀포시 월라봉 산기슭에서) ⓒ 김동식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더 이상 어린 생명들을 방치해서도 안 된다. 그늘진 구석에서 멸시를 받으며 삶의 위험한 곡예를 타는 일하는 여성들의 인권도 지켜 주어야 한다. 우리 군대의 전반적인 개혁 없이는 불행한 이 시대의 죽음에 종지부를 찍을 수 없다. 농업·농촌·농민의 문제에 대해서는 뼈를 깎는 자세로 근본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외국인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인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권익보호도 해를 넘기지 말고 해결해야 할 숙제다.

'마지막 잎새'에 희망을 건 어느 병든 소녀가 민초들이라면 국가와 사회는 삶의 희망을 만들어야 할 화가이다.

담쟁이덩굴은 혼자 세상을 넘지 않는다. 외롭지도 않고, 천대받지 않는 세상,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향해 날아 간 덩굴손을 기억하는가. (제주시 황새왓마을 가는 길에서)
담쟁이덩굴은 혼자 세상을 넘지 않는다. 외롭지도 않고, 천대받지 않는 세상,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향해 날아 간 덩굴손을 기억하는가. (제주시 황새왓마을 가는 길에서) ⓒ 김동식
11월이 간다. 담쟁이덩굴 앞에서 끈질기게 살다가 간 아름다운 영혼을 생각한다. 외롭지도 않고, 천대받지 않는 세상,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향해 날아 간 덩굴손을 기억한다. 담쟁이덩굴은 혼자 담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11월을 헤쳐 나가는 사람들에게 '접시꽃 당신'의 시인 도종환의 희망시를 드리고 싶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 도종환의 시 '담쟁이'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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