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카메라를 엄마한테 맡기고 언니랑 조용한 숲길을 걸었다. 평소 언니는 직장 때문에 혼자 살고 있어 주말에나 한번씩 보곤 했다. 오랜만에 생긴 여유라 언니와 나는 기다란 길을 따라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었다. 한참을 얘기하다보니 엄마를 깜빡 잊고 있었는데 엄마는 한참 뒤에 나타나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우리에게 카메라를 보여줬다.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으신 모양이다. 평소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엄마는 종종 내 디카를 빌려 가까운 산에 가서 사진을 찍으시곤 하는데 이번에도 사진 찍는 재미에 푹 빠지신 것 같다.
그래놓고는 우리보고 여기 서봐라, 저기 앉아봐라 하시면서 까다로운 사진사처럼 여러 가지를 주문하신다. 사진 찍는 걸 귀찮아하는 언니는 대충 찍으라면서 성의 없는 표정을 짓고, 그러면 엄마는 누구 딸 아니랄까봐 제 아빠랑 어찌 그리 똑같냐고 하시는데 그리고는 다같이 배꼽이 빠지도록 웃는다.
상림공원을 빠져나와 지리산으로 향했다. 한 시간 정도 달리니 국립공원이 나왔다. 날이 어두워져 국립공원 안에서 숙소를 잡고 저녁을 먹었다. 처음 맞는 세 모녀만의 밤을 축하하기 위해서는 소주가 빠질 수 없었다. 내일은 노고단까지 가보기로 하고 우리는 소주잔을 높게 부딪쳤다.
다음날. 꼬불꼬불한 길을 초보자에게 맡겨두고는 언니는 뒷좌석에서 연신 잔소리를 해댄다. "핸들을 너무 크게 돌리잖아!" "앞에 차 가는 거 안 보이나!" 구박 받는 게 싫어 잘한 것 없는 나도 신경질을 내면 엄마만 중간에서 고생이다. '어휴, 길이 왜 이런 거야'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30분가량을 달려 성삼재 휴게소에 도착했다. 거기서 노고단 정상까지 40분정도 걸어가면 된다. 벌써부터 지리산 자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아~ 지리산은 지리산이다.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다. 험한 산행길로도 유명하지만 나는 지리산에 오면 알 수 없는 포근함을 느낀다. 마치 엄마 품 같은. 위압감을 주는 거대함이 아니라 부드러움을 주는 거대함. 늦가을 바싹 마른 나무들을 보아도 따뜻해 보이는 이유다.
노고단을 둘러보고 국립공원을 빠져나왔다. 들어올 때는 산청 쪽에서 왔지만 나갈 때는 구례 쪽으로 빠졌다. 화엄사를 둘러보고 나와 차를 섬진강 쪽으로 돌리기 전 최참판댁도 들렀다. 2년 전에 왔을 때는 드라마 <토지>의 세트가 한창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었는데 지금 와보니 완성되어 제법 그럴 듯한 민속촌이 되었다. 세트장에 들어가기 전에 진짜 마을을 지나가는데 얼핏 보면 두 개가 구분이 잘 안 간다. 진짜 마을도 민속촌처럼 토속적이고 민속촌도 진짜 마을 같이 리얼하다.
최참판댁을 나서서 19번 국도로 접어들었다. '아~ 드디어 그 유명한 19번 국도를 타는구나' 19번 국도는 벚꽃길로 유명하다. 박해일이 선생님으로 나왔던 모 아이스크림 광고의 배경도 바로 이 도로다. 비록 지금은 벚꽃은 없지만 대신 이 도로의 진짜 매력은 다른 데 하나 더 있다. 바로 섬진강이 흐르는 길을 따라 달릴 수 있는 것이다. 이윽고 섬진강이 눈에 보이더니 언니가 갑자기 활기를 찾았다. 그동안 누구 딸 아니랄까봐 잔소리와 귀차니즘의 진수를 보여줬던 언니가 너무 좋아하는 것이었다.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워두고 세 모녀는 한달음에 강가로 달려갔다.
고운 모래바닥엔 새 발자국이 촘촘히 찍혀있었다. 가까이 가야 들리는 물줄기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언니는 모래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갑자기 얻게 된 이 짧은 행복에 다들 즐거운 표정이다. 생천 처음 떠나는 여행이라고 뭐 거창한 것도 없이 왔는데 오히려 지극히 소박한 여행에서 우리는 더 즐겁고 아늑한 기분을 얻을 수 있었다. 소녀처럼 기뻐하는 엄마, 아저씨처럼 귀찮아하는 언니, 두 사람한테 늘 구박받는 나.
나는 섬진강에서 우리 세 명이 정말 사실은 친구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 세 모녀의 여행을 그동안 가자 가자 하면서 한 번도 성사하지 못한 가족여행에 대한 예행연습이라고 하면 될까. 우리는 내년엔 정말 엄마 아빠 결혼 30주년을 기념해 꼭 가족여행을 가자고 다짐했다. 집 떠나는 걸 귀찮아하는 아빠를 설득시키는 데 꼭 성공하자고 기약하면서.
일요일 오후라 오는 길은 차가 엄청 막혔다. 특히 진주에서부터 꽉 막혀 시속 10km의 속도도 못 내며 엉금엉금 기어갔다. 우리는 고속도로에서 해지는 걸 보고 차 안에서 저녁을 때워야 했다. 라디오에선 퇴근길 청취자들의 노래자랑이 한창이었다. 세 모녀는 우리처럼 도로에서 꼼짝 못하는 사람들이 부르는 태진아, 송대관 노래를 목청껏 따라 부르며 하동에서 부산까지 5시간이 넘게 걸린 긴 여정을 웃음꽃으로 채우면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