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 7일 아침 서울 프레스센터. 중견 언론인들의 연구 및 친목단체인 관훈클럽의 토론회가 한창이다. 초청된 인사는 황우석 서울대 석좌교수.
장내는 어느 때보다도 더 북적거렸다. 약간의 흥분마저 감도는 분위기였다. 기자들의 취재열기도 과거 어느 대통령 후보에 대한 검증 토론회 못지않을 정도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지정 토론자인 한 언론사의 과학 전문기자가 질문했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황 교수의 연구에는 왜 그렇게 보안이 강조되고 있는가. 줄기세포 연구의 성과를 세계학계가 신속하게 나누어 가져야 더 큰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황 교수는 또박또박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답변했다.
"학문이나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는 말을 잘 안다. 그러나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중요하다. 나는 내 연구 결과를 '메이드 인 코리아'의 이름으로 발표하고 싶다."
"과학에 국경 없다지만 과학자에겐 조국이 중요"
순간 장내에 침묵이 흘렀다. 자신의 연구를 대한민국 상표로 내놓고 싶다는 과학자의 의지에 감동했으면 했지 다른 둔사가 나올 수 없었다. 애국주의가 과학을 누르고 있다는 식의 지적도 나오지 않았다.
황 교수는 이날 언론인들로부터 '언어의 마술사'란 애칭을 얻었다. 그가 결코 달변은 아니었지만 매우 적절한 언어를 구사한다고 모두 탄복했다.
그로부터 반년 후, 한국 언론은 다시 황 교수에 대한 보도로 달구어졌다. 이번에는 연구에 필요한 난자를 얻은 과정에 윤리문제가 있었다는 폭로와 비판이 단초를 열었다.
그 주역인 MBC의 < PD수첩 > 제작진은 진실을 파헤쳤다고 내세운다. 일부 논객들도 황 교수의 난자 입수 등 연구 과정이 국제 기준에 어긋났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여러 국민 여론조사를 보면 절대 다수는 황 교수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균 80% 이상의 국민이 난자 기증의 윤리 문제보다도 연구 성과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절대다수의 국민이 황 교수의 연구를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여론 조사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MBC에 항의하는 촛불시위가 터졌다. 누리꾼들은 < PD수첩 >의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가했다. 그 기업제품에 대한 불매운동도 불사하겠다고 나섰다. 이 때문인지 < PD수첩 >에 광고한 12개 기업 중 12곳이 광고를 포기했다고 한다.
'국가주의나 애국주의'라는 비판의 허구
일부 언론은 이같은 누리꾼들의 움직임에 대해 국제 기준에 걸맞은 진실을 호도하려는 국가주의나 애국주의라고 비판했다. 진보성향의 매체들일수록 그랬다.
애국주의란 본래 세계1차대전 당시 독일과 러시아의 진보진영이 쓰던 용어다. 다수 국민들은 자국 정부의 전쟁 수행을 추종했다. 객관적 진실에 상관없이 전쟁에서 이겨야 살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을 포함한 진보세력은 그것을 비난했다. 민족 국가의 승전과 번영을 최고 가치로 생각하는 애국주의가 결국 평화를 짓밟는다는 내용이다. 국수주의나 제국주의와 비슷한 말이다.
그렇게 역사적으로 한정된 애국주의라는 용어가 과연 황 교수를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들어맞을 수가 있는가. 흔히 인용하는 <뉴욕타임즈>가 미국 국방성 기밀문서를 폭로한 보도는 애국주의에 대항한 진실 추구라고 할 만하다. 황 교수의 연구 과정에 대한 문제 제기가 어떻게 그것과 같을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황 교수와 그 지지자들에게서 국가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주의의 정을 더 느낀다. 장애우와 난치병 환우들, 그리고 아직도 약소국인 조국에 대한 애틋한 사랑. 이것이야말로 과학자가 걸을 수 있는 진정한 인간애의 길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 애국주의의 난관을 해소할 수 있는 단서를 나는 우연찮게 국회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서 발견했다.
11월 29일 아침 국회 21세기 동북아평화포럼 토론장이다. 20여 의원들과 함께 관심있는 인사들이 참석했다. 초청 연사는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른 원로 시인 고은 선생.
시인은 남북 문화교류에 관해 말하는 중에 이렇게 토로했다.
"나는 지금도 민족을 얘기한다. 그러나 외국의 시인들은 '민족은 반드시 패권과 전쟁으로 가기 때문에 안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민족 얘기는 문학의 과제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
'민족' 정서 : 국제 기준과 한반도의 진실
이른바 국제 기준 문제에 대해서도 시인은 매우 유용한 의견을 제시했다.
"통일만 되면 우리도 민족 얘기를 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러면 나도 산천을 돌아다니며 막걸리나 마시고 세계 너희들, 구라파 너희들보다 훨씬 더 민족주의의 티를 벗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얘기를 황우석 교수의 연구에 대한 비판자들에게 꼭 해주고 싶다.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언론인 <뉴욕타임즈>, <파이낸셜 타임즈>, 주간지 <타임>, 그리고 과학학술지 <사이언스>가 모두 그의 연구 성과를 그대로 인정하고 올해의 최고 뉴스로 삼았다. 이른바 국제 기준의 원천인 그들도 공인하는 판에 국내에서 더이상 시비하는 것은 진실 추구에 해당하지 않는다.
덧붙이는 글 | 김재홍 시민기자는 동아일보 기자-논설위원과 경기대 교수를 거쳐 현재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으로 국회 정치커뮤니케이션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