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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얼음이 얼고 서리가 두텁게 내리는 요즘. 중 2년생인 아들과 나는 어김없이 새벽 6시에 일어나 뒷산 계곡에 올라간다. 캄캄한 새벽길을 가 본 사람은 알리라. 도시의 새벽길은 잘 모르겠지만 깊은 산 속 새벽길을 가다보면 마주치는 여명에 일종의 신비감과 사명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어느 시인은 '콩 이파리 같은 새벽'이라고 노래했는데, 콩 이파리 같은 색깔은 영락없는 영의 세계다.
우리는 일주일 째 계곡물에 발가벗고 들어가 30분씩 하반신을 담그고 묵상을 하는 '물수련'을 하고 있다. 얼음장 같은 새벽 계곡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신비감도 사명감도 줄행랑을 치고 이빨이 덜덜덜 떨려올 뿐이다.
처음에는 새끼 손가락만한 물고기들이 허벅지를 물기도 하고 자지를 건드리기도 하지만 곧 감각이 없어진다. 바늘로 온몸을 찔러대는 냉기에 몸을 꼿꼿이 세워 단전에 숨을 모으고 온갖 명상법을 동원하여 추위와 맞서지 않으려고 하는데, 순간순간 의념을 놓치면 추위를 뒤집어쓰곤 한다. 몰아의 시간은 짧고 추위는 길다.
어제는 쏜살같이 내달리는 짐승의 발자국 소리에 산돼지가 내려 온 것으로 알고 나는 아들을 보호해야겠다는 마음에 눈을 번쩍 떴었다. 수련하다가 사람 잡겠다 싶어 꽁꽁 언 벗은 몸으로 어떻게 맞서 볼 계산도 없었지만, 바짝 긴장하고 눈을 떴더니 멧돼지가 아니라 개를 데리고 산행에 나선 낯선 사람들 한 무리가 계곡을 타고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수련하는 동안에 절대 눈을 뜨면 안 되는데 눈을 떠 버렸으니, 아들과 나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눈 뜬 상대를 통해 자신을 위로했다.
"아빠. 어떡할까요?"
눈을 뎅그랗게 뜬 아들이 오돌오돌 떨면서 물었다. 산돼지보다야 사람들이 훨씬 안전한지라 안도의 숨을 쉬고 있던 내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우리를 발견한 사람들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봐봐. 수도하나봐. 조용히 해."
"저쪽으로 둘러가자. 조용히 해라."
주의 깊은 이 분들 덕분에 우리는 예정대로 물수련을 잘 마칠 수 있었다. 물 속에 담궜던 손도 꽁꽁 얼어서 양말을 제대로 신을 수가 없다. 그러나 옷을 입으면서도 내게는 찜찜하게 남는 것이 있었다. 손에 제대로 잡히지도 않고 발가락에 걸려 꿰어지지 않는 팬티처럼 머릿속에 찜찜하게 남아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고 개의 발자국 소리에 그렇게 놀라 명상이 깨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물질세계의 번잡한 작용들을 넘어서서 한결같은 얼의 세계에 접근하고자 하는 나의 공부가 개 발자국 소리에 산산조각이 났다는 사실이 용납되지 않는다. 십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라더니 이게 무슨 꼴인가 말이다. 의심이 불같이 일어난다.
사물에 대한 분별력은 마음 공부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가? 분별을 놓으라고 하는데, 놓아지지 않는 분별시비가 있으면 그냥 무시하라고 하는데, 무시되지 않고 끈질기게 달라붙으면 그냥 그것을 바라보라고 하는데, 그냥 바라보는 게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놔두나? 내버려 두나? 에라 모르겠다 하고 팽개쳐 버리는 게 '무시'하라는 그 '무시'인가? 역사와 시대를 통찰하는 지성과 마음공부의 상관관계는 어떻게 되나? 세속적 도덕률과 자아의 자유로움은 어떤 식으로 공존할 수 있나 등등….
최근 들어서는 존경하는 선배의 권유로 특수한 분야의 책을 서너 권 정독을 하게 되었는데 그동안의 마음공부와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어서 크게 매료되어 있는 상태다. 의식의 차원에 대한 책과 동이족의 고대사에 대한 책이다. 어떤 친구가 그 책에 대해 혹독하게 비판을 하기에 나는 시치미를 떼고 듣기만 하였다.
그런데 그 책에서 말하는 의식의 차원과 관련 된 것으로 여겨지는 어느 집단에서 보인 상식밖의 황당한 소식을 들었다. 경상도 어느 산골마을 작은 폐교에서 세계정부를 설립하고 내각을 구성하였다는 소식이었다. 우주정부는 왜 구성하지 않았을까? 우주정부의 지구담당 차관보. 뭐 이런 직책은 왜 만들지 않았을까?
물수련을 하기까지 올해만도 내가 시도하거나 참여했던 수련이 여럿이다. 올해가 갓 시작 될 때 나는 녹색대학에서 하는 새해 단식수련에 갔었다. 처음부터 가지는 못하고 뒷날 참석하여 한 해를 시작하는 경건한 의식에 동참하여 공부를 했다. 그리고 1월 말에는 충남 벌곡에 있는 삼동원에서 동사섭 고급수련과정 4박5일을 했고, 3월경에는 서울의 어느 선원에 1주일간 들어가서 수련을 했었다. 8월에는 완주군 어느 산골짜기 단식원에 역시 아들과 같이 가서 이틀 간 수련을 했다.
제일 정성들여 했고 한 소식 했다고 여겨지는 수련은 지난 9월 부산에 있는 선원에서 간화선공부를 했던 일이다. 1주일 기간으로 진행된 이 공부를 5일만에 화두를 깨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여운이 하도 커서 여러 날 동안 시원한 청정수를 뒤집어쓰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떤 분은 나에게 "아가부처의 탄생을 축하한다"고까지 했다.
간화선 수련에서 모든 의심의 덩어리가 뿌리 채 뽑혀 나갔다고 했는데 이후에도 내 의심은 계속되었다. "당분간 경전을 읽지 말라"는 지도스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을 놓지 않았고 내가 들었던 책에서 '마음'의 실체에 대한 복잡한 설명을 봄으로 해서 내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내 수련은 결국 일상성을 획득하는 것으로 모아진다. 생활 속에 안착되어 삶이 수련이고 수련이 곧 삶인 상태. 모든 것이 공부의 대상이고 모든 시간이 공부의 과정인 것. 새로운 출발점이지 결코 원점은 아니라는 것. 이것이 반복되는 의심을 대하면서도 체념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물수련의 원리와 방식은 지리산 계시는 '청운선사'님에게 가서 배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