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요즘 뭐하냐?"
같은 처지에 놓인 친구를 만나면 궁금한 나머지 미안해 하면서도 습관적으로 묻는 말.
"뭐하긴? 공부하고 있지."
"공부? 무슨 공부?"
"뻔하잖아? 토익! 넌 안하냐?"
안했다. 한 해 170만 명이 토익에 응시한다지만 '나 하나쯤이야'하는 생각으로 도망다녔다. 수능 이후 영어를 마음에 품은 적도 없었고, 대학 와서 1학년 때 필수 과목만 대충 이수한 기억이 있을 뿐이다.
토익 시험 한 번 치지 않았다고?
내년 2월 대학 졸업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아직 토익 한 번 치지 않았다고 얘기했더니 '미쳤단다'. 그것도 단단히! 공무원 준비하는 사람 빼고 지방 대학에서 토익은 필수고 내년 5월부터 더 어려워지는 판국에 지금 한창 점수를 올려야 하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모르냐고 친구는 다그친다.
"야! 우리 과 전공 점수 10% 안에 토익 성적 포함되어 있는 거 알고 있냐?"
"어?"
"4학년은 적어도 600점 이상 받아야 점수가 반영되는데, 어쩔래?"
하기로 했다. 전세계 응시자 중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많고 미국의 한 사설기관이 해마다 수십억 원의 로얄티를 챙겨 가는 게 싫어도! 온 국민을 영어 콤플렉스에 빠트리고 토익 못하면 영어도 못한다는 '이상한' 사회 분위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그렇게 공부를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영어'라는 언어를 제대로 학습해 보자는 마음으로 임했다. 친구는 말렸다. 그러면 단기간에 점수를 올리기 힘들다는 것이다. 토익만을 위한 영어 공부 방식, 즉 '요령'이 따로 있단다. 유형을 익히고 반복된 연습을 하면 성적은 충분히 오를 수 있다고 한다.
"토익은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점수를 따기 위해서 하는 거야."
친구에게 개인 교습을 받고나자 모의고사 점수는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슬슬 진짜 실력을 확인하고 싶어 정기 토익 시험에 접수했다. 실시간 계좌이체 확인 버튼을 누르자 통장에서 3만4천 원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내 인생 첫 토익 시험... "시험지에 낙서하지 마시오"
지난 11월 27일 일요일, 부산의 한 중학교. 좀 일찍 도착한 나는 이름과 좌석 위치를 확인했다. 의자와 책상은 각 다리의 나사를 돌려서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2시간 동안 앉아 있어야 하기 때문에 5분 넘게 열심히 높이를 맞춰 봤지만 썩 만족스럽진 못했다. 내 앞자리에 앉은 덩치 큰 남자는 나사를 돌리다 열이 받았는지 책상을 발로 차버리고 다른 자리와 슬쩍 바꾸기도 했다.
안내 방송이 나왔다. 시험지는 답안지와 함께 반납해야 하니 낙서를 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토익은 저작권 침해를 문제 삼아 문제(지)의 일부 또는 전부를 유출하거나 인쇄 또는 배포하는 행위를 할 경우 4년간 응시 자격을 제한하는 '벌'을 주고 있다. 답안지는 아예 한 술 더 떠 서약란까지 만들어 유출하지 않겠다는 내용에 반드시 서명하도록 지시한다.
이 '무서운' 호령 때문에 토익 관련 사이트에서도 기출 문제가 함부로 돌아다니지 못하고 '기출 변형 문제'가 등장한다. 시험 문제를 독점하려는 이러한 방침에 수험자들이나 강사 모두 불만이 많다. '낙서 금지'도 상당히 짜증이 나는 주문이다. 비싼 응시료에 '본전도 못 찾아가는' 기분이 든다.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겨? "찍고 빠져라"
이윽고 시험이 시작되고 낡은 스피커에서 뜻 모를 대화가 쏟아져 나온다. 잘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일단 찍고 빠져야 한다. 기억을 더듬다 보면 문제를 따라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듣기 평가 45분을 보내고 한 숨 돌릴 틈도 없이 남은 100문제에 집중했다.
늘 시간에 쫓겨 제대로 풀지 못했던 긴 지문부터 손댔다. 많은 문제들을 그동안 암기했던 '얍삽한' 방식으로 풀었다. 이런 눈치 실력이 내 영어 실력으로 비춰진다는 사실에 마음이 조금 뜨끔하기도 하다.
대리 응시 방지를 위해 독해 시간 동안 2차 신분 확인을 거친다는데 감독관이 조용하다. 1차에서 확인 사인을 받았기에 더 이상 신경을 쓰진 않았지만 좀 찜찜했다. 시험이 끝나는 방송이 나오고 다들 답안지에서 손을 뗐지만 한 명은 계속 마킹 중이시다. 시간이 더 걸릴 모양인지 "5분만 시간을 달라"는 뻔뻔한 부탁까지 하신다.
'부정행위자 처리 규정'에는 시험 개시 전 혹은 종료 후 답안을 마킹하는 경우 2년간 응시 자격을 제한하지만 그날 감독관은 사정이 딱해 보였는지 눈치를 보다가 4분 뒤 답안지를 걷어갔다. 실제 한 토익 전문 사이트의 토익 시험 후기에는 감독관이 시험에 대해 잘 모르거나 오히려 방해를 했다는 수험자들의 불만이 올라오기도 했다. 어쩌면 대리 응시를 하더라도 허술한 감독관만 만난다면 무사히 넘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성적표는 우편으로 한 번 발송될 뿐, 재발급을 원할 경우 장당 3천원의 비용을 더 지불해야 한다. 방문 신청으로 즉석에서 받을 수 있는 곳은 전국에서 서울, 부산, 대전, 대구, 광주 각각 1곳 뿐이고, 온라인으로 신청하면 4∼5일 정도 걸린다. 빨리 받고 싶으면 신청자가 택배비를 부담한다.
성적표 한 장에 3천원? 인심이나 쓰듯 온라인 신청은 두 장부터 천 원씩 깎아 준다지만 장삿속이 다분해 보인다. 취업 면접을 볼 때 사본을 제출하는 경우도 있지만 원본을 내라는 곳이 많기에 별 도리 없이 '피 같은' 돈을 갖다 바쳐야 한다. 보통 취업이 한 방에 끝나는 것도 아니고 매달 시험을 봐서 점수를 올려야할 형편이기에 토익과의 '악연'은 쉽사리 끊을 수가 없다.
"그래서? 학점 안 딸 거야? 취업 안 할 거냐구!"
나는 잔뜩 열 받아서 시험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친구에게 늘어놓았다. 동조해 주기를 내심 바랬던 친구는 이 철없는 대학 졸업예정자에게 잔소리를 쏟아냈다.
"그래서? 학점 안 딸 거야? 취업 안 할 거냐구! 야, 니가 토익을 안 쳐도 될 정도로 점수가 그렇게 많이 나왔냐? 토익 성적 안 보는 데만 원서 넣을래? 학점 제한 없는 곳만 골라서 면접 볼래? 잘나가는 대기업들은 그렇다 쳐도, 아직 영어 면접 볼 형편이 되지 않는 지방의 중·소기업들은 사람 뽑기 편한 그 놈의 점수를 보고 있단 말이야. 정신 좀 차려라!!"
그래, 대학생에게 토익은 마치 군대처럼 피해갈 수 없는 단계였다. 토익 따윈 하찮게 여길 만한 배짱과 뚝심도, 또 든든한 '빽'도 없으니까. 나보다도 점수가 훨씬 높은 내 친구는 여전히 불안하단다. 어학 성적을 요구하지 않는 곳이 늘어났다 해도 이러저런 눈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서류전형 자격만 더 열어 놓은 것 같고, 그 중 토익 성적이 나쁜 사람은 면접도 못 볼 것만 같단다. 채용에서 각종 신체 조건을 없애도 결국 '준수한 외모'를 뽑는 것처럼 말이다.
토익 900점을 넘고도 취업이 안되었다는 소식이 들려 오고 600점도 안되는 나는 공포에 떨며 '공부'도 아닌 공부에 꾸역꾸역 몰입한다.
| | 전공보다 많이 투자하는 '부전공 토익' | | | 채용에선 무용론 제기, 대학에선 여전히 '대세' | | | |
| | ▲ 한 고등학교의 '3학년 수능 이후 지도계획'. 입시 설명회가 없는 날은 '토익시험준비'로 채워져 있다. | ⓒ김수원 | 최근 인력 채용에 토익시험 무용론이 제기되면서 점차 하한선을 낮추고 가산점을 없애는 기업이 늘고 있지만 토익은 여전히 대학에서 '귀하신 몸'으로 대접받고 있다.
애초 토익이 비즈니스 영어 능력을 평가하기 위해 만들어졌음에도 대학은 신입학(특별전형), 학점 인정, 졸업 요건, 장학금 지급 등 각종 평가 기준으로 이용하고 있다.
한국토익위원회에 따르면 신입학(특별전형)에 성균관대(900점 이상), 중앙대(900점 이상), 세종대(880점 이상) 등 94개 대학교가 토익을 활용 중이고 그 수는 2000년부터 매년 증가 추세다. 토익 점수만 가지고 학점으로 인정하는 대학교도 경상대(600점 이상), 한양대(760점 이상) 등 30개나 된다.
현재 졸업 요건(필수)으로 전체 또는 일부학과에서 토익을 활용하고 있는 대학교도 전남대(730점 이상), 목원대(800점 이상, 06년도 졸업생부터) 등 41개. 졸업영어시험과 졸업논문으로 토익을 인정(선택)하는 대학교도 인제대(500점 이상), 배재대(700점 이상) 등 19개에 이르며 이들 대학은 낮게는 270점에서 높게는 900점까지 하한선을 두고 있다.
그동안 제도를 마련하지 않았던 서강대도 2008년 졸업생부터 인문계는 900점, 자연계는 800점 이상의 토익점수를 졸업자격요건에 포함할 예정이고 경성대는 내년 신입생부터 토익점수 졸업인증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토익졸업인증제도가 반강제적으로 이뤄지고 토익이 대학교육의 대체수단으로 쓰이다 보니 학생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서울의 한 대학에 재학 중인 박모씨는 "이미 취업을 했지만 졸업 때문에 억지로 시험을 보고 있다"며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기준을 정했다면 취업한 사람은 제외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며 불만을 나타냈다.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는 최모씨도 "아직도 토익 점수면 어디든 취업할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다"며 "전공 과목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정도로 토익은 일상이 되어 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한편, 토익졸업인증제를 도입했던 경희대, 이화여대 등 몇몇 대학들은 학생들의 끈질긴 요구로 제한점수를 폐지하거나 필수에서 선택으로 바꾸는 등 제도를 수정하기도 했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