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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최명희 '혼불' 문학공원 입구
눈 내린 최명희 '혼불' 문학공원 입구 ⓒ 박주현
"살아 있는 사람들한테는 누구에게나 혼불이 있다고 합니다. 혼불이란 정신의 불, 목숨의 불, 감상의 불, 또는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하는 정령의 불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최명희의 '혼불'은 그 안에 무수한 '작은 이야기'들을 섞고 있다. 노래의 한 대목, 풍속에 대한 문서자료, 물건의 유래, 고사와 민담, 때로는 방대한 사료까지도 서슴없이 인용된다. 때로는 '읽기'가 지겨울 적도 있지만, 정확하고 다채롭게 기술된 겨레의 숨결을 드러낸 풍속사로서 우리네 민족 문화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언어는 정신의 지문(指紋)인데, 혼을 어떻게 기계로 담아내느냐'며, 컴퓨터 키보드를 끝내 거부하고 수만 장의 원고지 칸을 또박또박 채워간 사람. 그 많은 수상들이 되려 무색한 진정한 장인 정신을 가진 아름다운 사람이기에 난 매일 아침 그녀를 찾는다.

매일 만나는 그녀의 혼불이지만 첫 눈 속의 만남, 더 설레

살짝 내려 앉은 눈으로 뒤 덮인 '눈단풍'
살짝 내려 앉은 눈으로 뒤 덮인 '눈단풍' ⓒ 박주현
매일 아침 걷는 산책로엔 늘 그녀의 글들이 새겨진 조그만 돌비석과 얼굴을 그려낸 석상이 나를 반긴다. 첫눈이 수북이 쌓인 일요일 이른 아침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깨워 하얗게 수놓은 건지산 자락을 산책했다.

집에서 30분 거리에 위치한 전주 덕진공원 인근에 자리한 최명희 혼불 문학공원은 도심에 위치해 있어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운동에 별 관심을 갖지 않았던 내가 아침 운동을 하게 된 배경은 언론계에서 활동 중인 40대의 또래 기자들이 최근 갑자기 건강을 해치거나 심지어 과로로 돌연사를 당하는 사례가 잦아지면서 주변에서는 헬스장이나 골프연습장에 나가길 권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명희 문학공원이 위치한 건지산을 마주하고 사는 나는 이른 아침 산책하면서 나름대로 사색에 젖어 보는 1시간 가량이 어느새 기다려지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 돼 버렸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면 불과 덕진공원을 끼고 도는 건지산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시간이 20~30분. 다시 능선을 타고 20~30분 가량 걷다 보면 최명희 문학공원을 비롯해서 세계 소리문화전당과 동물원, 체력공원 등이 기다리고 있다.

최명희 작가 묘지임을 알리는 비석과 석상
최명희 작가 묘지임을 알리는 비석과 석상 ⓒ 박주현
이처럼 하루를 상쾌하게 시작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건만 본격적으로 아침 운동을 시작하기 전인 4개월 전까지는 이러한 주변적 요건을 전혀 활용치 못했다. 불규칙한 생활과 잦은 과음 등으로 운동에 별 신경을 쓰지 못했던 그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너무 많은 변화를 맞이한 셈이다.

눈 내린 아침에 만난 그녀 "사랑한 이여, 아직 돌아오지 말라..."

게다가 출근 시간을 다투지 않아도 되는 일요일엔 특히 많이 걷는다. 만보기를 차고 1시간 30분 가량 걷다보면 최명희 문학공원에서 동물원, 덕진공원까지 거의 일주할 수 있는 거리인데 그래도 만보기엔 5천에서 6천보만 찍히기 일쑤다. 만보를 걷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절실히 느끼곤 한다.

어쨌든 여느 해와 달리 올 첫눈은 제법 분위기를 내며 한껏 자태를 뽐내려 든다. 고달픈 직장인들의 출퇴근 교통대란을 피할 수 있게 해줬다는 점에서 더욱 고맙고 낭만에 젖어 들게까지 한다. 눈 위를 걸으며 새삼 여러 가지 추억들과 사색을 즐겨볼 수 있었다.

최명희 문학공원 입구엔 어느새 많은 혼불들의 발걸음이...
최명희 문학공원 입구엔 어느새 많은 혼불들의 발걸음이... ⓒ 박주현
평상시와는 다르게 산책로가 미끄러운지라 속도를 좀처럼 낼 수 없다. 그래도 오늘은 일요일. 마음 먹고 설경을 담기 위해 카메라까지 지참했으니 첫 눈 쌓인 산책로를 따라 그녀를 만나러가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진다.

"사랑하는 이여 아직은 돌아오지 말라. 천지에 난만한 꽃 피어나 독하게도 휘황하여 아득한 어질 머리 일으킬지라도..."

그녀의 숨결이 느껴지는 문학공원에 도착한 시간이 평상시보다 2시간 가량 늦은 때문인지 평소 이른 새벽 중에 만났던 사람들은 찾아 볼 수 없었지만 그들의 발자국들은 이미 사방 눈 위에 흩어져 있었다.

하얀 눈 길은 혼불 문학공원으로 이어지는 길인 것을.
하얀 눈 길은 혼불 문학공원으로 이어지는 길인 것을. ⓒ 박주현
"인간의 본원적 고향으로 돌아갔으면..." 각박한 세태 일깨워 주는 듯

'혼불'작가 최명희는

1947년 10월 10일 전주에서 태어난 작가는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쓰러지는 빛'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등단 직후 '혼불'을 쓰기 시작해 이듬해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2천만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혼불'(제1부)이 당선됐다. 그리고 88년부터 95년까지 무려 7년 2개월 동안 월간 '신동아'에 '혼불' 제2~5부를 연재했다. 그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1년에 걸쳐 정밀하게 보완, 96년 10권을 완간했고 98년 12월 11일 암으로 별세했다.

올해는 타계 7주년이 되는 해이다. <혼불>은 30년대 전북 남원의 한 양반가문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쓰러져가는 종가를 지켜가는 3대 며느리의 이야기를 축으로 해 농민들의 치열한 삶을 서사적으로 그렸다.
<혼불> 10권을 미완으로 남겨 놓은 채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고 최명희(1947~1998)씨. 오는 11일이 마치 그의 7주기다. 매년 이맘때면 그의 모교인 전북대학교에서는 '혼불'을 주제로 한 연구발표 모임이 있고, 최명희와 '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추모 행사를 갖는다.

이 소설의 무대가 1930년대 전북 남원인데다 작가는 전주에서 대학을 다니며 성장했다는 점에서 매년 그가 태어난 10월 10일과 또한 생을 마감한 12월 11일을 전후해서 양 지역에선 혼불기념사업이 다양하게 펼쳐진다.

몰락해 가는 한 양반가를 지키는 며느리 3대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힘겨웠던 삶과 인간의 보편적인 정신세계를 탁월하게 구현해 낸 이 작품은 어둡고 억눌린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꺼져가는 혼불을 환하게 지펴 올린 해원(解寃)의 한마당이었다는 점에서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우리가 인간의 본원적 고향으로 돌아갔으면 한다"는 그녀의 말은 인간의 각박한 세태를 일깨워 주는 듯 작품으로 표출되기도 했지만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우리 민족혼의 원형'이라 부르고 있지 않는가. 특히 호남 지방의 세시풍속 관혼상제 음식 노래 등을 결 고운 언어로 생생하게 복원해냄으로써 우리 풍속의 보고(寶庫), 모국어의 보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높푸른 하늘을 하얗게 쳐다보는 건지산 자락
높푸른 하늘을 하얗게 쳐다보는 건지산 자락 ⓒ 박주현
1996년 12월 드디어 2백자 원고지 1만2천 장 분량의 '혼불' 10권이 완간되어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17년에 걸친 대장정이 마무리되는 순간에 그녀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탈진과 혼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애절한 사연은 두고두고 가슴 아프게 한다.

이런 때문에 '혼불'을 읽고 기억하는 일은 주로 문단 밖에서도 펼쳐지고 있다. 지역 언론계에서도 그의 추억을 말하기 좋아하는 원로 언론인들과 현역 기자들이 이맘때 주로 찾는 곳이 바로 도심에 위치한 그의 묘소와 문학공원이다.

혼불문학사업 지역별 분산돼 산만한 느낌, 체계적 승화 아쉬움

고인의 살아 생전에 열렬한 팬이었다던 한 언론인 선배는 "최명희는 눈물 많고 웃음 많은 정한(情恨)의 여자였다"며 "늘 세상이 낯설어서 몸 둘 곳 없어 했는데 그 낯선 세상을 향하여 인간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무너지고 또 무너져도 마침내 남는 것이 무엇인지를 독백처럼 조용히 이야기했다"고 말하곤 한다. 그 역시 고향이 남원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마음과 일맥상통하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이여 아직은 돌아오지 말라..." 고인의 글귀가 새겨진 돌비석
"사랑하는 이여 아직은 돌아오지 말라..." 고인의 글귀가 새겨진 돌비석 ⓒ 박주현
그러나 아직도 혼불문학을 계승, 심화, 확산 시키기 위해서는 주관기관이나 단체들의 통합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지역 언론계 안팎에서 자주 제기되곤 한다. 혼불 소설의 주된 배경지인 남원 사매면에 혼불 문학마을이 조성되고 전주에는 그의 묘소와 문학공원이 조성 중이다. 하지만 관련 행사가 타계한 날인 12월 11일에서 이젠 그가 탄생한 10월 10일로 옮겨지는 등 다소 산만한 느낌을 안겨주고 있다.

첫 눈에 쏙 파묻힌 혼불을 뒤로한 채
첫 눈에 쏙 파묻힌 혼불을 뒤로한 채 ⓒ 박주현
혼불기념사업회와 전주시, 남원시 등 해당 자치단체들이 노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학계와 언론계에서도 많은 관심과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 팽배하다. '혼불'은 90년대 한국 문학의 최고 성과로 평가 받아왔기에 더욱 체계적인 승화, 확산 노력이 절실하다. 이런 저런 생각에 그녀의 공간에서 눈을 밟으며 서성이다 우리는 믿기지 않을 만큼의 엄청난 눈바람이 갑자기 몰아닥쳐 마치 혼불처럼 빠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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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패배하고,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빛과 공기가 존재하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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