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눈이 푸짐하게 내렸습니다. 이제 가을에 대한 미련을 남길 여지도 없어졌습니다. 벽에 걸린 달력도 달랑 한 장만 남아 있으니 온전한 겨울이지요. 누구는 지나간 가을을 그리워하고 더러는 다가올 봄을 기다리기도 하지만 지금은 겨울입니다.
4일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해발 고도 419m의 배부른산을 올랐습니다. 저것도 산이냐고 웃을 이도 없지는 않겠지만 산은 산입니다. 제대로 단련된 체력을 바탕으로 날렵하게 오르면 두 시간도 안 걸리지만, 가쁜 숨 몰아쉬며 '이렇게 힘든 걸 왜 왔지?' 후회하며 오르다 보면 세 시간 훌쩍 넘기기 일쑤입니다.
눈 쌓여 미끄러운 산길은 오르기도 내려가기도 힘듭니다. 제 세상 만났다고 천방지축 불어오는 바람은 사정없이 겨울 숲을 헤집고 날아다닙니다. 나무 위에 쌓였던 눈도 안개처럼 하얗게 쏟아집니다.
칼바람 눈보라가 맨 얼굴에 부딪칠 때면 처마 끝 고드름처럼 섬뜩하게 겨울이 느껴집니다. 그래도 칼바람 눈보라는 누굴 겨냥하고 날아들진 않습니다. 추운 겨울 쌀 수입 반대를 외치던 농민들을 향해 쏘아대던 물대포처럼 비정하진 않습니다.
거북바위에 다다를 무렵 누군가 눈 위에 글씨를 써 놓았습니다.
평소보다 갑절은 더 걸려서 눈 덮인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그 위로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