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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기모 위문공연을 알리는 에덴요양병원 엘리베이터 안의 포스터 ⓒ 김선영
병원에서 팔걸이 보조기를 이제 빼내도 좋다는 진단을 받았다. 어깨뼈가 잘 붙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팔을 움직이기가 어렵고, 시리고 저리고 쑤시는 아픔은 여전히 남아 있다. 몸을 조금 움직이는 일조차 귀찮아진다. 그러나 귀찮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날씨도 추우니 먼 길 나가봐야 어깨 뼈와 살에 좋을 건 없다. 하지만 좋은 공기 쐬러 가는 일이라고 생각토록 하자. '귀찮음'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자. 배호가 노래 부르듯이 '집중'을 하자.
에덴요양병원 환우들의 건강증진을 위한 위문공연
11월 30일 저녁 7시 배기모(배호를 기념하는 전국모임)에서 배호의 노래로 '에덴요양병원 환우들의 건강증진을 위한 위문공연'을 한다는 데 취재를 놓칠 수는 없다. 팔이 뻣뻣하고 부자연스러워 그렇지 몸을 충분히 움직일 수 있지 않은가.
사실 <배호 평전> 작가가 배호 관련 소식을 취재하러 가는 건 특별할 게 없다. 몸이 아프다고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 된다. 오히려 내 눈에 특별한 건 평일에 위문공연 봉사를 하려고 먼 길 나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배호를 좋아하여 배호 노래를 부르지만, 시간만 있다면 무보수 위문공연에도 빠지지 않는다. 멀리 충남 예산에서, 충북 청주에서, 경북 김천에서 배호 홍보대사 가수들이 올라오는 중이란다. 멀리서 온다고 교통비가 지급되는 것도 아니다.
서교동에서 오후 4시경에 출발, 거의 도착 지점에 다다를 때쯤 내가 묻는다.
"환자들 중에 이런 사람은 없을까요? 위문공연이라니까 TV에 자주 출연하는 유명가수 한두 사람쯤 오는 줄 알았다가 '어! 유명한 가수 하나도 없네' 하고 실망하는 사람이 없을까 몰라요."
"있겠죠. 그러니까 그만큼 노래를 잘 불러야겠죠."
일행 중 한 사람이 그렇게 대답한다. 오후 6시를 넘어갈 때쯤 시설이 잘 된 대강당에 도착하니 현직 경찰관인 이욱용씨와 배호 홍보대사 가수 문처은씨가 먼저 와 있다. 리허설 중이다. 이욱용씨는 노래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모두 가져와 전자기타 반주를 하고 있고, 문처은씨는 '안개 낀 장충단공원'을 부르고 있다.
경북 김천에서 일부러 올라온 문처은씨, 뜻깊은 위문공연 일이라면 열일 젖혀두고 먼 길을 열차 타고 올라온다. 오로지 봉사활동일 뿐, 배기모에서 무보수의 직함을 가지고 있는 김영순, 정순덕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도착하여 배오(본명 윤동식, 50)씨가 참석치 못할 거라는 얘기를 듣는다. "많이 살면 6개월, 그렇지 못하면 2~3개월"이라는 사망 선고. 입원비가 떨어져 적외선 치료를 위해 황토방에 가 있는데, 현재 몸이 쇠약하여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
병원 식당에서 저녁식사 할 때쯤 석기영씨가 충북 청주에서 혼자 차를 몰고 올라왔고, 김기찬씨는 충남 예산에서 부인과 함께 올라왔다. 다시 대강당에 들어서니 황광흡씨와 부인 김보배씨, 하광성씨의 모습이 보인다. 이들은 서울에서 왔지만 서울에서도 결코 가까운 길을 온 게 아니다. 남양주시 수동 계곡의 맨 끝자락 불비고개 중턱(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내방리 산 44-1), 이곳까지 에덴요양병원 환우들의 건강 증진을 위한 공연을 하기 위해 자가운전으로 달려온 것이다.
유명가수는 없어도...
"'돌아가는 삼각지'를 녹음할 때 '삼각지 로타리에'에서 숨이 차니까 '삼각지 로 타리에' 하고 한 템포를 쉬었어요. 그런데 그게 오히려 인기를 끈 거죠. 아주 마음씨가 좋은 분이었습니다. 신세기레코드사에서 마주치면 밥 먹었느냐고 물으며 밥을 사줄 때가 자주 있었죠."
신세기레코드사에 근무하며 배호와 함께 생활하다시피했던 배기모 문화예술지도위원 여종구(62)씨의 말이다. 그가 사회를 맡았다. 배기모 위안공연에선 우스갯소리를 섞어가며 사회를 구수하게 보기로 정평이 나 있다.
'옛정'으로 충청도에서 인기를 끌며 서서히 중앙 진출을 해 올라오고 있는 석기영씨가 먼저 마이크를 잡았으며, 배호 노래가 아닌 밝은 노래를 불러 관객의 흥을 돋우었다. 이어서 문처은씨, 그녀는 에덴요양병원에 입원했던 배오씨가 잘 모창하는 배호의 '오늘은 고백한다'를 열창하여 큰 박수를 받았다.
▲충북 청주에서 혼자 승용차를 몰고 올라온 가수 석기영씨 ⓒ 김선영
▲멀리 경북 김천에서 열차를 타고 올라온 가수 문처은씨 ⓒ 김선영
▲한때 복수가 차는 중병을 앓았다가 말끔히 치유한 가수 김기찬씨 ⓒ 김선영
이어서 김기찬씨. '보고픈 사람' '사랑의 서울거리' 등의 대표곡을 갖고 있는 그는 간염으로 복수(腹水)가 차 32인치 허리가 38인치로 늘어난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저는 살아났습니다. 환자님들,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고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기운을 실어주었다.
▲배호와 비슷한 목소리로 감정을 잘 살려 노래하는 가수 하광성씨 ⓒ 김선영
▲산뜻한 율동으로 인기를 끈 여가수 김보배씨 ⓒ 김선영
▲세련된 기교를 살려 배호 노래를 부르는 황광흡씨 ⓒ 김선영
배호 라이브 카페에서 매월 30일에 벌이는 '배호 모창 대회'에 참가하여 1회와 2회 각각 대상을 받은 바 있는 황광흡씨와 하광성씨는 각각 기교와 굵은 음색을 뽐냈다. 황광흡씨의 부인 김보배씨는 산뜻하고 애교적인 율동을 섞어 불러 장내 분위기를 고취시켰다.
배호 홍보대사 가수가 아닌 대금 강사가 마지막을 장식했다. <데일리 줌> 11월 25일자에 나온 '암환자 돕기 자선공연과 배오씨 암 투병' 관련기사를 보고 전화를 해 말기암 환우들을 위한 위문공연에 참가하겠다고 했다는 것. 특히 마지막 곡으로 '돌아가는 삼각지'를 연주해 큰 박수를 받았다.
▲'배기모 자선공연과 배오씨' 관련기사를 보고 출연을 자청한 국악 강사가 '돌아가는 삼각지'를 대금으로 연주하고 있다 ⓒ 김선영
▲넓은 객석을 반쯤 메운 환자와 보호자들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고 박수를 보냈다 ⓒ 김선영
"유명가수가 없어서 어떨지 모르겠다"는 생각은 기우였다. 그 우려를 배호 홍보대사 가수들의 노래 실력이 해결해 주었다. 객석을 반쯤 메운 환자와 보호자들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비우지 않고 많은 박수를 보내며 좋아했다.
환자들이 기뻐한 위문공연
다음은 박종기(67) 병원장과 배기모 사람들과의 대화 몇 마디.
"사람들이 가끔은 귀양 오는 것 같다고 얘기합니다. 꾸불꾸불 들어가서요. 상당히 외진 곳을 찾아오셔서 좋은 공연을 해주셔서 환자들 마음도 기쁘고, 빨리 치유가 되도록 촉진이 될 것 같아요. 환자들의 마음이 기쁘면 확실히 좋아집니다, 건강이. 회복이 빨리 되고. 이런 기회를 만들어 위문을 해주시니까 참 고맙습니다."
"밝은 노래가 환자들의 치료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배호님 노래처럼 슬픈 노래가 환자들의 치유에 미치는 영향은 어떻게 다를까요?"
"둘 다 좋은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암 환자들이 많은데 그분들이 마음에 맺힌 것이 많거든요. 이 세상 많은 사람 가운데 왜 하필 내가 이런 병에 걸렸느냐? 원망하고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슬픈 노래와 함께 눈물도 흘리고 그러면 그것도 치료에 굉장히 도움이 되고요.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밝게, 다 잊어버리고 명랑하게 함박 웃고 그러면 엔돌핀이 나와서 좋습니다."
"슬픈 노래 중에 카타르시스 효과가 있는 게 있지요? 정화(淨化)라고 하면 될까요…"
"예, 카타르시스 맞아요. 정화시키고 맺힌 걸 풀어주고 후련해지고…"
"오늘 원장님도 더 건강해지신 것 같아요."(일동 웃음)
"하하, 같이 분위기에 동화되려고 애를 씁니다."
▲박종기 병원장과 배기모 참가자들이 함께 즐거운 노래를 합창하고 있다 ⓒ 김선영
박종기 병원장은 "정기적으로 와서 이렇게 공연을 해주었으면" 하고 병원측의 의견을 내놓았고, 유형재(60) 배기모 회장은 "의논해서 그렇게 하도록 하겠다"고 즉답.
배호 모창가수 배오씨에게도 기적이...
꾸불꾸불 돌아오는 밤길의 승용차 안에서 나는 마음으로 기도했다.
'에덴요양병원 치료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는 김정순 사회복지사의 말을 들어보면 "3개월에서 6개월, 6개월에서 1년, 1년에서 그 이상…" 이렇게 오래 살아나가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배호 모창가수 배오씨에게도 그런 기적이 꼭 생기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