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黑猫白猫 住老鼠 就是好猫)"는 말이 덩샤오핑의 어록에 없었다면 고승이나 구루의 말씀으로도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깨달음이라 불리는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한 정신의 노선은 크게 두 갈래였다. 진리를 향해 영혼과 육체를 특정한 방향으로 조직하고 정보를 축적하며 무리를 지어 문화와 종교를 이룩해 가는 방향이 그 하나다. 다른 하나는 간단히 말해서 '개인플레이' 그리고 때때로 대세를 거스르는 반역이다. 그런데 전자든 후자든 평론가의 눈에 거기가 거기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예수나 부처와 같은 세계 교사(world teacher)의 길을 마다하고 자신은 물론이고 어떠한 종교나 스승도 따르지 말고 오로지 마음속에 있는 빛을 찾으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돌아선 순간 어떤 유서 깊은 교단이나 유구한 전승을 지닌 종교 안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것과 맞먹는 깨달음이란 쥐를 잡은 것인가. 그는 전보다 훨씬 많은 열렬한 청중과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였다.
이 잘생긴 철학자는 서구인들에게는 부처로까지 비쳐졌다. 영화배우 존 배리모어는 크리슈나무르티에게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깨달음을 계몽하기 위해 영화에 부처로 출연해 줄 것을 부탁했지만 정중하게 거절당했다. 아마 그가 출연을 허락했더라도 그렇게 그럴 듯하고 썩 괜찮은 그림이 나왔을 것 같지는 않다. 키아누 리브스도 마찬가지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서양인들이 원하는 부처의 이미지였을 것이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이미 동서양의 오랜 신비적 전통을 되살려서 인류에게 새로운 정신적 비전을 보여 주고자 만들어진 신지학회에 의해 새로운 영적 지도자로 낙점되어 있었다. 신지학회의 리더인 리드비터는 크리슈나무르티의 오라(aura)를 보고 "거듭된 환생을 통해 완벽해진 고대 현인의 영혼"을 느꼈다고 했다.
영국 국교회에 식상하여 동서양 신비주의는 물론이거니와 전통적 메시아가 기가 막히게 결합된 새로운 인류의 스승을 간절히 바라던 신지학회는 그 현신을 크리슈나무르티에게서 찾으려 했고, 또 그렇게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들어 가려고 했다.
하지만 '크사모'는 곧 그가 자신들이 원하는 리더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블라바츠키도 베산트도 끝끝내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한 아가페를 저버리지 않았지만 크리슈나무르티는 신지학회 안에서 자기만의 개혁을 추구하려고 했다. 사람들은 그로부터 "지도자 못해먹겠다"는 말도 들어야 했다.("그들은 왜 하필 나를 선택했을까요?")
그는 고상하게 빛나는 단 하나의 진리를 설파하는 플라톤이 아니라 궤변론자, 인식론적 상대주의자, 풍기 문란자 등 욕이란 욕은 다 얻어먹었던 소피스트들처럼 진리는 여러 개이고, 도처에 흩어져 있다는 주장을 폈다. 모든 것을 회의하고 어떤 권위와 속박도 거부하고 자유의 길을 가라고 말했다.
마침내 1929년 크리슈나무르티는 '별의 교단'이라는 단체를 스스로 해산한다. 그가 한 선언의 요지는 첫째, 진리를 추구하는 조직이라는 것은 오히려 사람들을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이라는 것, 둘째, 자신은 추종자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 셋째 저 유명한 "모든 새장, 공포, 종교로부터의 자유"이다.
사실 크리슈나무르티를 알기 위해서 우리가 너무 멀리 갈 필요는 없다. 똑같은 뜻의 메시지가 가수 김광석이 남긴 <나의 노래> 노랫말 속에 담겨져 있다. "수많은 진리와 양심의 금문자, 그 찬란한 금빛에 물들지 않으리……."
크리슈나무르티는 주요 저작 <자기로부터의 혁명>과 <크리슈나무르티의 명상>, 대중 강연집 <지구별 어디로 가고 있는가> 등을 통해 깨달음이란 스스로 단번에 이룰 수 있는 것이며 유일신이나 대우주의 영, 영혼의 차원과 등급 같은 것은 없다고 거듭 역설했다.
그리고 그는 먼저 내 자신의 구석구석을 탐조등으로 비추어 보고 인간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무엇이려고' 하기 때문에 수많은 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이기심과 광기의 원인도 바로 거기에 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깨닫는 데 있어 종교, 전통, 문화 등은 모두 헛것에 불과하다. 한 자락 바람에 자기 속을 홀연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누구나, 지금, 여기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밖에 있는 빛은 아무리 번쩍인다 해도 빛이 아니다. 오로지 내 마음 안에 있는 빛을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여행이라면 모를까, 참으로 깨달으려는 자는 인도에 가지 않으며 티베트에 가지 않는다. 무슨 교단은 물론이고 어떤 커뮤니티나 끼리끼리를 만들지 않고 속하지도 않는다. 지금 컴퓨터 모니터에 떠 있는 아무렇지도 않은 사진 한 장에도,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가는 취객의 상소리 한마디에도 깨닫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한겨레의 개인 블로그에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