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생존하는 일은 외롭긴 해도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먹을 물과 식량 그리고 누울 수 있는 잠자리만 있으면 혼자 살아가는데 큰 지장이 없다. 혼자 가는 길이 힘들면, 혼자 걷는 길이 너무 외로우면 그 외로움에 지치면, 더 이상 산길을 걸어서는 안 된다. 백두대간을 걸을 땐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라도 떠안아야 한다. 외로움을 받아낼 자신이 없으면 산을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지 않으면 위험하다. 외로움조차도 대간의 일부이기 때문에 산에서 외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산 아래의 즐겁고 화려한 세상으로 내려 가야한다.
외로움은 부정이 아니다. 외로움은 파괴가 아니다. 세상에서의 외로움은 단절이거나 고독 누군가로부터의 따돌림이겠지만 산에서의 외로움은 맞닥뜨림이다. 정면대결이다. 그래서 산에서 혼자 걷는 길은 외롭기 때문에 좋다.
산에 있는 동안은 배낭에 먹을 것과 잠자리를 만들 텐트와 침낭이 있는 한, 산 아래서 겪는 고민이나 어려움은 없다. 먹고 자고 살아남으면 된다. 산에서의 목표는 단순하다. 복잡할 필요가 없다. 얼마나 화려하게 잘 입고,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인맥으로 잘 짜여진 인간관계 그물망으로 조직되어있는지 필요 없다. 산에서는 단순해야한다. 그래서 산에서 만나는 사람은 다 친구가 될 수 있고 누구나가 마음 문을 열어 받아줄 수 있다.
산길을 걷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사히 걷고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이다. 산에서 로또 복권이 당첨 된다 해도 산에서는 사용할 일이 없다. 자랑할 그 누구도 없다. 칭찬해줄 사람도 없으며 부러워할 사람도 없다. 함께 나누어야 할 사람조차도 없다. 외로움은 나눔의 대상이 없는 데서 시작된다. 내가 아무리 좋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나눌 대상 없이 혼자만 가지고 있다면 그 좋은 것조차도 귀찮아진다. 정말 소중한 것은 나눌 때 더 소중해지고 가치가 불어난다. 산에서는 혼자 걷는 길에서는 나눌 대상이 없기 때문에 내게 가치 있는 것이란 없다.
산 아래서 가치 있다고 하는 물건들은 이미 무게 때문에 버린지 오래다. 그 물건을 버리면서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과 내가 가지고 있던 고집, 아집을 모두 모아 함께 버렸다. 버렸기 때문에 이만큼 왔다. 만약 버리지 않았으면 나는 30킬로그램도 넘는 짐의 무게 때문에 무릎의 관절이 내려앉았거나, 내리막에서 발목의 관절이 비틀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버렸고 버린만큼 걸을 수 있었다.
이제 내가 버려야할 것은 눈에 보이는 짐이 아니다. 내가 버려야할 것은 산 아래서부터 지고 올라온 나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할 때다. 다 버려야 텅 비게 되고 비워져야 다시 채울 수 있다. 아니, 채우지 않아도 좋다. 비워진 상태로 가벼이 걷는다면 그 자체가 더 할 나위 없는 기쁨이다.
나는 지금까지 엘리트 코스만 밟고 살았다. 좋은 부모님 만나 대학원까지 다녔고 30대 초반 젊은 나이에 이미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시인으로 등단을 했고 안정된 가정에서 휴일마다 자녀와 함께 나들이를 하는 안정된 사립대학교 교목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은 한 순간에 겹쳐서 온다.
이 모든 것을 기복 없이 찬찬히 밟아오는 데는 3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지만 무너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 순간 돌아보니 나는 장애인이 되어 있었다. 나는 외형상의 장애인이 아니라 내 속으로 키운 병이 어느덧 나를 삼키며 나를 지배하게 되었다. 나는 겉으로는 멀쩡하나 속으로는 장애인이었다. 나는 내가 나를 견디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를 부정하고 싶은 만큼 나를 포장하게 되었고 나를 버리고 싶은 만큼 내 껍데기에 기름칠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번들거리던 나를 보는 순간 나는 변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는 아니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나를 사랑했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일 거라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훌쩍 떠난 백두대간은 내적 장애인이었던 나를 받아주었다.
아무 말 없이 산은 자신의 잔등인 마루금을 내게 내어 주었고 나는 대간의 잔등을 밟으며 걷다가 백두대간의 품에서 잠을 자고 백두의 손바닥에 앉아 밥을 먹으며 산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나는 백두대간에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으며 처음 눈물이 마를 때 내 속의 눈물이 마른 눈물 위로 흘러 내렸고 두 번째 눈물이 마를 때 내 속의 장애가 눈물로 그 위에 겹쳐지기 시작했다. 대미산을 걸으며 나는 세 번째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차갓재를 지나 작은 차갓재에 이를 때 물은 떨어졌다. 작은 차갓재에서 우측으로 내려가니 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젠 마루금에서 물 찾는 일이 어렵지만은 않다. 마루금에 서서 물 냄새를 맡거나 물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내 옆에 누군가가 있었다면, 나는 아마 물 소리를 듣는데 더딘 학습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혼자 걸었고 혼자 누군가의 음성을 듣는 노력 대신 자연의 음성을 들으려 노력했다.
이제 나는 자연스럽게 자연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물을 채우고 작은 차갓재에서 올라서니 넓은 헬기장이 나타났다. 오늘 하루의 산행이 길었고 해도 한 시간 좀 넘으면 질 듯해서 여기서 막영을 할까하다 더 가기로 한다. 몸이 힘들지 않았고, 더 갈 수 있는 여력이 많이 남았기 때문에 진행하기로 한다.
솔밭 사이를 지나 황장산 능선에 올라서니 온통 칼 같은 바위길이다. 아슬아슬하게 바위를 껴안아 돌아야 하는 길도 있고, 심하게 경사진 바위를 오르내려야하기도 했다. 하지만 멀리 소리 없이 사그라들면서 오렌지 빛으로 세상을 물들이고 있는 태양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날카로운 바윗길도 두렵지 않았다. 해가 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황장산은 온통 바위투성이여서 텐트를 칠 만큼의 땅도 보이지 않는다. 마음이 다급해진다. 어둡기 전에 텐트 칠 장소를 찾아야 한다.
이젠 감상도 한낮 여유에 불과하다. 하루 몸을 누일 공간을 찾지 못하면 안 된다. 찾아야 한다. 마음을 다그쳐 몸을 움직인다. 가다 보니 직벽이 떡 버티고 있다. 높이는 족히 7미터 이상은 되어 보이는 듯하다. 바위에는 줄이 하나 걸려있다. 저걸 넘어야 다음을 갈 수 있는데, 난감하다. 시범적으로 줄에 매달려 본다. 줄은 단단하게 매어져 있었다. 손이 작은 내가 잡기에 버거울 만큼 줄은 두껍고 단단했지만 문제는 내 등의 배낭이었다. 내가 움직이는 만큼 힘을 쓰는 만큼 뒤뚱거렸다. 아래의 글은 일기에 적은 글이다. 인용한다.
"등에는 24킬로그램 짜리 배낭을 매고 밧줄에 매달려 10여분, 그냥 떨어져 버릴까?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데 어떻게 하지? 날아갈 수도 없고, 누가 옆에 있기라도 하면 도움을 받을텐데, 하늘은 맑고, 바람은 뜨겁고, 곧 어둠은 덮쳐올 것인데, 절벽을 디딘 발은 자꾸 미끄러지고 손에선 힘이 빠져 벌벌 떨려오고, 너무 땀을 많이 흘렸나. 자꾸 하늘이 노래지는 것처럼 어지러워지면서 살까 죽을까? 여기서 끝낼까? 더 갈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긴 생각으로 매달려있는 동안 별의 별 생각 다했습니다.
그러나 목적이 있고 신념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 살아 숨쉬는 동안 도저히 잊지 못할 일이 발생했습니다. 팔 힘과 왼쪽 발로만 간신히 버티고 있던 발판에서 한참을 버티고 있다 기도를 했습니다. 힘 달라고 올라갈 수 있게 해달라고 계속 가게 해달라고 순간 "주여"라는 외침과 함께 줄잡은 손을 당기며 점프를 했는데 일 미터도 훨씬 넘게 점프를 해서 보다 위에 있는 절벽의 돌출 부위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 오르는 길은 무릎으로 딛고, 팔꿈치로 받치고, 바람 불때마다 절벽에 찰싹 달라 붙어 흔들리지 않게 하면서 중심을 잡고, 온몸으로 네 발 짐승처럼 절벽에 붙어 기었습니다. 다 오르고 나자 눈물이 왈칵 솟구쳤습니다. 살았다는 안도와 함께 맥이 빠져 먼지처럼 펄썩 주저앉으며 눈물 흘렸습니다. 계속 갈 수 있다는 안도감으로 눈물 흘렸습니다."
나는 직벽을 오른 후 한동안 누워 하늘을 보았다. 하늘이 온통 오렌지 빛으로 반짝였다. 마냥 누워있을 수 없다. 텐트 칠 자리를 찾아야 한다. 다시 황장산 정상을 향한다. 가는 길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어둠이 내 발끝을 지워버리기 전에 나는 텐트를 쳐야한다. 더 이상 아무 생각이 없다. 걷다보니 정상에 도착했다. 아직 해가 남아있었고, 나는 정상 넓은 터에 텐트를 쳤다. 어둠이 내렸고 텐트 밖에서 한참 동안 반짝이는 별을 보았다.
덧붙이는 글 | 2004년 5월 16일 부터 7월 4일까지 걸었던 백두대간 연속종주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