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위조지폐 유통 혐의 및 이에 대한 금융제재와 관련해 초강경 입장을 고수하고, 이에 맞서 북한은 금융제재 문제를 협상할 양자 회담을 미국이 계속 거부할 경우 6자회담 거부도 고려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놓으면서 북미관계가 또 다시 악화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를 상징하듯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는 북한에 대한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그는 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북한이 위험한 무기를 수출하고 마약밀매를 하는 상황에서 정치 제스처로써 제재를 풀 수는 없다"고 말했다.
7일자 <연합뉴스>에 따르면, 버시바우 대사는 "마카오의 '방코 델타 아시아' 은행에 대한 조치를 통해 북한의 불법행위를 중단시키는 성과를 거뒀다"면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대목은 북한은 범죄정권(criminal regime)이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미국의 고위 관리가 공개적으로 북한에 대해 '범죄정권'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더구나 <아사히신문>의 6일자 보도에 따르면 지난달 16일에 열린 미일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여러 차례에 걸쳐 '폭군'이라고 지칭한 것으로 알려져 북한의 강력한 반발이 예상된다.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의 '폭정의 전초기지' 발언 및 북한의 핵보유 선언으로 악화일로를 걷던 북미관계는, 5월 들어 미국 정부가 한국과 중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을 자제하고, 북한이 이를 신뢰회복의 징조로 받아들이면서 6자회담이 재개될 수 있었다.
그러나 또 다시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범죄정권'을 몰아붙이고 금융제재에 대해 "협상은 없다"고 못박으면서 북미관계는 물론 6자회담도 안개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는 부시 행정부의 '진의'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키면서, 지난 9월 19일 6자회담 공동성명은 안팎으로 궁지에 몰린 부시 행정부가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는 '제스처'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을 낳고 있다.
더구나 부시 행정부는 공동성명에서 북한에 대한 핵무기 불사용을 약속해놓고, 지난달 초에 "핵과 미사일을 계속 개발하고 있는 동북아의 어떤 국가"를 상대로 가상 핵공격 훈련을 하기도 했다.
설명을 해줄 용의는 있지만, 협상은 없다?
미국의 금융제재 문제가 공개적으로 불거진 시점은 지난 9월 중순부터이다. 미국은 지난 9월 16일 북한이 위조지폐와 마약 밀매를 통해 대량살상무기 개발비용을 충당하고 있다고 보고, 마카오의 델타 은행과 북한과의 금융 거래를 중단시켰다. 또한 10월 7일에는 션 갈렌드 북아일랜드 노동당 당수가 북한과의 위조지폐 거래에 관여했다며 기소 조치를 취했다. 이와 함께 대량살상무기 확산 혐의가 있다며 북한의 8개 기업에 대해 제재 조치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지난 11월 초순에 열린 1단계 5차 6자회담에서 미국이 9.19 공동성명 정신을 저버리고 경제제재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반발하면서 이 문제가 북미관계는 물론, 6자회담에서도 핵심 쟁점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1단계 5차 회담에서 북미 양측이 이 문제에 대한 양자 회담을 갖기로 하면서 대화의 접점이 형성되는 듯 했다. 그러나 양자 회담 형식을 두고 양측이 충돌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북한은 6자회담 수석대표가 참석하는 고위급 회담이자 금융제재 해제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협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에, 미국은 위조지폐 유통 및 이에 대한 제재조치는 미국의 법 집행에 해당되며 이에 따라 6자회담과는 무관할 뿐만 아니라 '협상'은 불가하다고 밝혔다.
"범죄국가"를 상대로 협상을 할 수 없다는 초강경 자세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1기 부시 행정부 초기에 "악의 축" 국가를 상대로 "대화는 할 수 있지만, 협상은 없다"고 말한 것과 흡사한 측면을 띠고 있는 것이다.
금융제재는 미국 강경파의 '준비된 카드'
기실 부시 행정부의 대북 금융제제는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온 미국 강경파의 '카드'이다. 1기 부시 행정부는 태평양 사령부 소관의 이른바 '작전계획 5030'을 입안해 북한은 돈줄을 끊고 북한의 군사력을 소진시켜 내부 동요를 유발한다는 계획을 세운 바 있다. 이 계획은 콜린 파월 당시 국무장관의 반대에 막혀 유보되기도 했지만, 이러한 구상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도구 모음(tool kit)'으로 명명된 새로운 대북제재 방안이다. 2월 14일 <뉴욕타임즈>의 보도로 그 실체가 알려진 이 계획은 네오콘의 수장격인 딕 체니 부통령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새로운 대북제재 방안은 미국이 알-카에다에 사용한 방법과 흡사한 방식으로 북한의 돈줄을 끊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 마약, 위조지폐, 무기 수출 등을 통해 김정일 정권이 벌어들이고 있는 외화를 추적·동결해 북한의 경제적 동요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계획의 설계자가 로버트 조지프라는 점이다. 그는 1기 부시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대량살상무기 대확산(counter-proliferation) 담당관을 지냈고, 2기 들어서는 대북 초강경파인 존 볼튼의 뒤를 이어 국무부 국제안보 및 군비통제 담당 차관을 맡고 있다.
그를 주목해야 할 이유는 초강경 발언으로 물의를 빚어온 볼튼과는 달리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전략가'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인 셀리그 해리슨은 "볼튼처럼 대담하거나 공공연히 도발적이지 않은 '은밀한' 조정자로서 조지프는 강경정책을 밀어붙이는 데 있어 볼튼보다 더 효율적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하듯, 조지프 차관은 '상대적인 온건파'에 속하는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와 사사건건 마찰을 빚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네오콘의 복귀?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북한의 위조지폐 혐의를 근거로 한 금융제재는 네오콘 등 미국 강경파들이 6자회담 프로세스를 역전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준비된 카드'라고 할 수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 강경파들은 북한과의 협상을 꺼리면서 북한을 계속 '적'으로 남겨두거나 '정권교체(regime change)'를 선호해왔다.
이들은 당초 6자회담 공동성명에 미국이 합의하는 것을 반대했었다. 그러나 이라크 침공 여파와 허리케인 카트리나 참사 등 안팎의 '악재'(?)로 궁지에 몰린 부시 대통령이 공동성명에 서명하라고 지시하면서 이들의 요구는 묵살되었다.
그러나 네오콘 등 강경파의 반격은 계속되었다. 이들은 공동성명 채택과 관련해 미국이 지나치게 양보했다며, 공동성명 '폄하하기'에 나섰다. 아울러 지난 5월에 이어 최근 모색되었던 힐 차관보의 방북도 가로막았다. 특히 위조지폐, 마약, 무기 수출 '근절'을 명분으로 내세워 북한에 대한 강도 높은 경제제재를 주도함으로써, 북미간 신뢰회복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러한 흐름은 "2기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1기 때와는 달라졌다"라는 평가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부시 대통령의 대북 인식에 거의 변화가 없고, 체니 등 네오콘의 영향력이 여전하며, 미국 정부 내 강온파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은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한다.
이는 아울러 노무현 정부의 대외정책도 전면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는 6자회담 공동성명 채택 이후 마치 북핵 문제가 해결 국면에 접어든 것처럼 말해왔다. 이 과정에서 '중대제안'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면서 자화자찬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다. 지나친 비관론도 곤란하지만, 근거 없는 낙관론은 비관론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노무현 정부는 대외정책이 자기만족적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지금이야말로 국가와 민족의 미래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담긴 '전략'이 필요한 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