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훈민정음(언문)은 조선시대 양반이나 지배층들은 철저히 무시하고, 여성이나 피지배 계층에 의해 발달해 왔다는 것이 통념이었다. 그리고 언문 완성 448년인 고종 31년 1894년에 '법률, 칙령은 모두 국문(國文)을 기본으로 하고 한문으로 번역을 붙이거나 혹은 국한문(國漢文)을 섞어 쓴다'고 한 것은 고종의 혁명적인 정책이라고 여겨져 왔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한국사>(1996)도 문자, 생활, 기술 분야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한글은 한자에 의한 문자 생활을 대신하지 못했다. 공적인 문자 생활은 여전히 한자로만 행해졌다. 공적이 아닌 문자 생활에 국한하여 한글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조선시대 한글 어문정책을 연구해 온 김슬옹(43) 목원대 겸임교수는 이에 대해 전혀 다른 주장을 펼쳤다. 최근 펴낸 <조선시대 언문의 제도적 사용 연구>(한국문화사, 2005)에서 김슬옹 교수는 '조선시대 언문 창제 이후 언문은 국가가 제정한 다중 공용문자 중의 하나'였다고 주장한다.
언문은 전체적으로 보면 한문에 비해 공용문자로서의 비중은 낮았지만 교화 정책과 실용 정책 측면에서는 한문과는 비교가 안 되는 비중을 지닌 공식 문자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는 언문이 단지 한문의 보조 차원의 문자라기보다는, 한문과는 역할이 다른 문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보면 한자가 주류 문자였지만 관점과 기준을 달리하면 주류, 비주류는 바뀔 수도 있다. 이를테면 백성 교화 측면에서는 언문이 주류 문자이고, 한문이 비주류 문자이다. 또한, 왕실 여성에게는 언문이 주류 문자이고, 한문이 비주류 문자"라고 주장했다.
그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한글(언문)과 관련된 947건 기사 기록을 대상으로 언문을 통한 문자 생활의 사용 양상과 그에 따르는 의의를 연구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언문이 조선 왕조의 제도적 공식 문자였다는 것. 1894년 고종이 언문을 공문의 기본 글자로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언문 창제 이후에 제도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사용해 왔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았다.
1967권 948책 분량의 조선왕조실록 시디본뿐만 아니라 실제 문서본을 철저히 비교 검증하여 조선시대 언문에 대하여 양반 지배층이 배척했다는 일반 통념이 잘못되었음을 입증했다. 그는 언문이 주로 왕조의 정통성, 정체성 홍보와 유지 차원에서 제도적으로 사용했고, 그밖에 왕실의 행정 문서나 외교 문서로도 쓰였다고 주장했다.
특히 왕실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공식 문서에서는 언문이 주된 글자였다는 것과 조선 후기로 오면서 언문은 일반 백성들에게 한문 이상으로 공적으로 사용됐다는 것을 밝혔다. 이로써 언문은 한문이라는 공식 문자에 대한 부차적 쓰임새라기보다는 또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공식 문자라는 것이다.
이 책은 '언문 관련 용어로 본 언문 사용 양상과 의의'(2장), '언문의 제도적 사용과 의의'(3장)를 살폈으며 4장에서는 시기별 또는 임금별로 나누어 언문 사용과 의의를 분석했다. 그리고 부록으로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언문 관련 기사 제목과 사건 요약, 서지 정보와 세기별 언문사건 연표도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세종의 치밀한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 그리고 제도적 장치 마련에 대한 부분이다. 김 교수는 세종 때 언문 사용의 기록을 '창제(1443)-운회 번역(1444)-필요성 논쟁(1444)-해외학자 자문(1445)-용비어천가 실험(1445)-완성(1446)-시험제도 시행(1446, 1447)-사서 번역(1448)'으로 정리하고 있다.
또 반포한 지 3년밖에 안 된 세종 31년(1449)의 기록을 보면 "어떤 사람이 하정승을 비난하는 언문 글을 벽 위에 쓰다"는 내용이 보인다. 3년 만에 백성들 중에서 익명서를 쓸 정도로 언문이 상당히 퍼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세종은 명분만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사전 준비와 연구, 실험, 완성, 반포, 실천, 시행 따위의 과정을 거치며, 사대부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는 슬기로움을 발휘한 끝에 제도적으로 정착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세종뿐 아니라 훈민정음 창제를 거들었던 세종의 아들인 세조도 훈민정음의 정착에 대단한 의지가 있었다고 김 교수는 주장한다. 세조는 수양대군 시절 권력 싸움의 와중에서 스스로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되는데 중국에 가서도 본국에 있는 측근에게 언문 번역 사업을 지시했다. 또, 임금이 된 뒤에는 '간경도감'을 설치해 적극성을 띠었다고 한다.
그리고 왕실의 어른인 여성들이 벼슬아치들을 상대로 언문을 통해 소통한 것은 벼슬아치들이 어쩔 수 없이 언문을 배우고 쓸 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의도했든 안 했든 왕실 여성들은 언문 정착에 큰 역할을 한 것이다.
또 한 가지 눈길을 끄는 것은 외국에 사신으로 간 신하들이 본국에 보고를 하면서 썼던 문서들이 상당수 언문으로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또 중국인에게 언문을 가르친 사람을 처벌한 일도 기록이 되었다. 이를 김 교수는 외교 문서이기에 기밀 보호라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며, 조선 글자로서의 실질적 자부심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런데 글쓴이는 어떻게 이런 연구를 하게 되었을까? 그는 초등학교 때 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우고, 한문을 많이 안다고 우쭐댈 정도였으며, '한자 박사'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 중학생이 된 뒤 고등학생들의 한자 이름표를 읽어 보는 게 취미였는데 모르는 글자가 많아 천자문을 뗐지만 사람 이름도 제대로 읽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고민했다고 한다.
그리고 들어간 국립철도고등학교에서 역시 천자문을 뗐는데도 그 당시 한자투성이였던 신문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고, 이에 한자의 모순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한자가 아닌 한글과 국어순화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1학년 때 우연히 한 학생잡지에서 '국어순화 관심학생 모집' 광고를 보게 되어 '국어운동고등학생연합회(한글나무)'에 가입하게 되었고, 이후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가 고등학교 시절 모두 한자 이름표를 달고 다니는데 일부러 한글 이름표를 달았다가 학생과장에게 들켜 벌을 받은 일은 유명하다. 고등학교 때 이미 그는 자기가 원하는 일, 한글에 관한 일이라면 아무도 못 말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후 외솔 최현배 선생의 학풍을 잇고자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해 대학과 대학원 과정을 마쳤다. 이 책의 원전이 된 박사논문 '조선왕조실록의 한글 관련 기사를 통해본 문자생활 연구'는 상명대학교에서 썼다.
물론 이 책에도 역시 옥에 티는 있다. 이 책이 박사 논문을 정리한 것이며, 전반적으로 논문이 그러한 성격을 띄기는 하지만 일반인이 읽기는 여전히 어려운 말들이 있고, 한글 이름의 저자가 쓴 글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한문투의 말이 많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도 원래 한문으로 기록된 조선왕조실록을 연구한 결과이고, 학계가 대체로 그런 논문을 원하는 것이기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는 엄청난 일을 해냈다. 해방 전후 가장 위대한 한글학자로 꼽는 외솔 최현배 선생마저도 조선시대의 언문이 푸대접 받았다고 알았는데 그것이 아님을 그는 조선왕조실록을 통한 연구로 실증해낸 것이다.
한때 한글날이 일반 기념일이 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이제 다시 한글날은 많은 사람이 노력한 끝에 자랑스럽게 국경일이 됐다. 그런 이때 이 책의 출간은 더욱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 | "조선왕조실록 남과 북 번역 비교본 책 낼 것" | | | [인터뷰] <조선시대 언문의 제도적 사용 연구> 쓴 김슬옹 교수 | | | |
| | | ▲ 김슬옹 교수 | ⓒ김영조 | - 한글 이름을 쓰고 있는데 호적에도 올렸는지, 한문을 가르쳐주셨던 아버지의 허락은 받았는지?
"물론 고등학교 1학년, 한글 이름을 지을 땐 아버지에게 비밀로 했었다. 그러다 대학 2학년 때인 1983년 수원지방법원에서 개명재판을 승소했는데 결국 아버지도 그를 아시고 허락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이후 호적을 고칠 수 있었다."
- 어떻게 이런 엄청난 작업을 하게 되었나?
"최기호 교수님의 지도로 폭넓게 국어사에 대해 공부를 하던 중 조선왕조실록에서 훈민정음 관련 기록을 찾다가 의의로 관련 기록이 많음을 발견하고, 논문 주제로 선정하게 되었다. 이 책은 박사학위 논문으로 쓴 것을 다시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을 내게 된 데는 최기호 교수님의 큰 가르침이 있었다."
- 국역본이 있다고는 하지만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을 자료로 한 연구는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어떻게 했으며, 연구결과에 대한 반론은 없었나?
"물론 나는 한문을 전공한 것이 아니어서 한문 해석에 한문학의 권위자인 명지대학교 안대희 교수님과 전 조선왕조실록 국역 연구위원인 박은희 선생님의 자문을 받았다.
그 밖에 논문을 쓰는 동안 여러 교수님의 많은 가르침을 받아가며 했기에 어려움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은 별말이 없다. 하지만 이 책이 완벽하다고 할 수 없기에 만족감은 있을 수 없으며, 더욱 연구에 정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직역 위주의 남한 국역본과 의역 위주의 북한 국역본이 많은 차이가 있는데 이에 대한 생각은?
"논문을 쓰면서 나는 조선왕조실록이 대단한 기록문화유산임을 확인했다. 두 가지가 종류의 책이 있는 것을 두고 혼란스러움과 중복 번역에 대한 폐단을 얘기하기도 하지만 의역과 직역본이 같이 있다는 것은 학문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어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다만, 연구 과정에서 오류를 발견하기도 했는데 이를 빨리 고쳐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한문과 언문으로 동시에 번역하여 반포하라'고 해야 할 것을 '한문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반포하라'로 풀이하여 전혀 다른 의미를 만들어낸 것 등이다."
-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지금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와있는데 조선왕조실록 주석 영인본으로 5천 쪽 분량(5백 쪽짜리 책 10권)이 될 남한과 북한 국역본의 비교본을 준비하고 있다. 겨울 동안 교정을 보고, 세종임금 탄생일인 5월 15일에 맞춰 책을 낼 예정이다.
이 책에는 한문으로 된 원문과 남한 직역본, 북한 의역본을 나란히 옮겨 비교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