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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접역할연기를 하고 있는 모습
ⓒ 이명숙
20평이라는 공간 속에 다양한 삶들이 모였습니다. 대학 수시전형에 지원해 면접 볼 때 답변을 제대로 못해 떨어졌다며 시름에 빠져 있는 10대. 사고로 뇌를 다쳐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아직까지 후유증을 앓고 있는 20대. 교통사고로 남편을 먼 나라로 보낸 후 취업전선에 뛰어든 30대 주부. 취업이 하고 싶어 면접에 임하지만 막상 그 자리에 서면 말문이 열리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40대. "나이 많은 사람이 이런데 있어도 될란가 모르겠네요?"라며 연신 쑥스러워 하는 63세 참가자까지 11명의 각기 다른 삶들이 서로의 등을 다독여가며 5일을 보냈습니다.

수시전형에 불합격하고 수능에서도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했다며 상심해 있던 18세 참가자는 63세 참가자를 보고 기운을 냈습니다.

"예순 살이 넘었음에도 열심히 사시는 모습을 보면서 도전의식이 생깁니다. 할머니도 이렇게 배우시려고 최선을 다하시는데, 시험 좀 못 봤다고 좌절을 한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어떤 어려움이 와도 꿋꿋하게 이겨내겠습니다."

저희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준 이는 다름 아닌 올해 63세 참가자였습니다.

참가자 선정을 하면서 걱정을 했습니다. 하루 6시간씩 5일간 써야 될 것도 많고, 역할연기는 물론 토론과 대화형식으로 진행이 되기 때문에 혹시라도 부담을 갖지 않을까 우려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참가하고 싶다며 신청서를 냈는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제외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나이가 많긴 하지만, 직업훈련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정도였다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역시 예상이 적중했습니다.

오전 9시부터 교육이 시작된다고 하니까, 혹시라도 늦을까봐 30분 일찍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같이 나이 많은 사람이 와서 괜히 젊은 사람 자리 하나 축낸 것은 아닌지 모르것네요."

혹시라도 자신 때문에 젊은 사람 자리가 없어졌으면 어쩌나 걱정이었습니다.

"아니에요. 어머니, 어머니가 계셔서 얼마나 좋은데요. 걱정하지 마세요."

오전 시간을 같이 하는 중에도 어머니는 시종일관 넉넉한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여가며, 저희와 호흡을 같이 했습니다.

어머니는 20살 꽃 같은 나이에 육남매의 장남에게 시집을 가셨다고 합니다. 농촌에서 살면 아이들 교육을 시킬 수가 없을 것 같아 가진 것이라고는 달랑 몸뚱이뿐인 남편을 따라 무작정 도시로 이사를 갔다고. 없는 살림에 시동생 다섯과 아들 넷, 뒷바라지는 치열한 전쟁과도 같았다고 합니다.

다행히 시동생도 아이들도 어디에 내 놓아도 남부럽지 않을 자리를 찾아 터전을 잡았다고 합니다. 이제는 숨 한번 크게 내쉬어도 되겠구나라는 여유도 잠시, 시어머니가 노환으로 누워버렸다고. 이것이 내 팔자려니 여기고 5년간 거동이 불편한 시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고 합니다. 유한한 것이 생명인지라 작년에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모두가 떠나버린 집, 어머니는 매일 알 수 없는 갈증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뒤돌아 볼 시간도 없이 달려온 인생길. 육십이 너머 새삼스럽게 살아온 흔적들을 되짚어가자니 그 세월들이 아득하기만 했다고 합니다. 이대로 자연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 프로그램내부 전경. 또 다른 참가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 이명숙
남은 인생 자신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 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간절하면 길이 보인다고 우연히 직업훈련기관을 알게 되었다고. 조경시공을 배워놓으면 시골에 있는 땅에 나무도 심고, 꽃도 가꿀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나이가 많아도 뽑아만 준다면 열심히 하리라 마음먹었는데 과정이 녹록치 않았다고. 캐드, 일러스트, 포토샵 등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생소한 것들을 대하며 괜히 시작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쉽게 포기할 수는 없어 날밤을 새워가며 매달렸다고 합니다. 모르는 것을 하나, 둘 알아갈수록 재미가 붙었고 일러스트, 포토샵, 캐드를 배우면서 어머니는 친정아버지가 사무치게 그리웠다고.

'가시나가 어떻게 남자들만 입는 바지를 입고 중학교를 다닐 수 있냐'며 동네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해도 아버지는 배워야 한다며 동네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중학교까지 보내주셨다고 합니다. 학교 가서 공부하는 것은 얼마든지 하겠는데, 교복바지를 입고 다니는 자신을 어찌나 동네어른들이 나무라던지 등하교길이 무서워 눈에 띄지 않는 길을 찾아다녔다고. 마음을 졸이며 다닌 탓에 비록 공부는 못했지만 그때 영어를 배웠기 때문에 인터넷을 할 수 있었고 포토샵, 일러스트도 가능했다고 합니다.

여자들은 겨우 초등학교만 다녔던 시절, 자신을 중학교까지 보내준 아버지가 새삼스럽게 고마워 공부를 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고. 동네 아주머니들끼리 모여서 10원짜리 내기 고스톱을 치는 것보다, 힘들고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공부하는 것이 좋았다고 합니다. 비록 뒤돌아서면 잊어버려서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깨알같이 적어가며 열 번, 스무 번 반복했지만 무엇인가를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이왕에 시작한 공부 자격증까지 따놓자는 마음으로 자격증시험에도 도전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필기시험을 준비할 때는 고3 수험생처럼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밤 잠 설쳐가며 노력한 덕분에 조경시공기능사 필기시험에 무난히 합격을 하고 2차 실기시험도 봤다고 합니다. 12월에 합격자 발표를 하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이렇게 맛있는 밥에 이렇게 좋은 교육을 나이든 나에게까지 시켜주니 고맙습니다"라며 연신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취업을 할 나이는 이미 지났지만, 이력서 쓰는 법, 자기소개서 쓰는 법, 면접 보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젊어서 못 배운 것, 늙어서라도 원 없이 배우다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고 아들도 며느리도 손자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는데 젊은 사람들이 노력을 하지 않고 있으면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깝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를 통해 저희들은 인생을 새롭게 배웠습니다. 어머니를 통해 게을러진 마음들을 추슬렀습니다. 18살 참가자에게도, 저에게도, 예순이 넘어 배움을 실천하는 어머니의 삶은, 도전이자 자극이었습니다.

자격증시험에도 꼭 합격하시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하시고 싶은 공부하시라며 참가자들 모두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육신의 나이는 63살이지만 제 눈에 보이는 당신은 23살보다도 더 아름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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