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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과 제왕> 1권. 대륙의 별, 장군 고선지
<장군과 제왕> 1권. 대륙의 별, 장군 고선지 ⓒ 웅진 지식하우스
만주벌판을 말을 타고 누비며 대륙을 호령했던 우리의 선조 고구려. 그 후손들의 일생을 생생하게 되살린 작품이 나왔다. 저자는 '조선 왕 독살사건', '송시열의 나라' 등의 쟁쟁한 작품으로 역사서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지적 유희를 아낌없이 선사했던 이덕일.

조선사의 내밀한 부분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그곳에 처박혀 있던 비밀보따리를 유감없이 풀어헤쳤던 이야기꾼이 고구려로 눈길을 돌렸다. 이쯤 되면 역사를 쫓아가는 이들이라면 읽지 않고는 못 배길 작품이 된다.

두 권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당나라 때 실크로드 원정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고선지와 당나라 중기에 산동반도에서 크게 세력을 떨쳤던 치청왕국의 제왕 이정기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보통 주인공의 출생에서 시작해서 주인공의 주요 업적과 활동을 다루다가 그의 말로를 그려가는 전기와는 조금 다른 형식을 취하는 이 작품의 시작은 당 현종 전기 치세에 큰 역할을 했던 고구려 출신 재상 왕모중의 이야기이다.

첫 단락에서 고선지의 이름이 조금 나오다가 사라지고 이어 당 황실의 이야기가 펼쳐지더니 초점이 왕모중에게로 모아지는 것. 약간 의아해하며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당 황실의 역사, 측천무후부터 그의 아들, 손자가 어떻게 권력을 이어갔는지, 전설처럼 아련하게 어디선가 몇 번 들어본 적이 있는 중국의 머나먼 역사와 만나게 된다.

측천무후를 지나 현종을 지나면 티베트와 중앙아시아의 역사와 만나게 되고 조금 더 나아가면 현종이 천하를 들어 사랑했다는 여인, 양귀비와도 만나게 된다. 현종이 양귀비와 세기의 사랑을 나누고 있을 때 중국의 북쪽을 장악했던 유명한 풍운아 안녹산도 출현하여 그가 난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전후 상황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 안녹산이 등장할 무렵에서야 비로소 고선지 장군이 주인공으로 전면 등장하여 후세에 전설처럼 기록될 많은 전투의 승리를 이끌어낸다. 아 맞다, 고선지가 주인공이었지. 새삼스레 이 사실을 깨달을 때쯤이면 책은 이미 반 권을 넘어가 있다.

현종과 양귀비라는 드라마틱한 소재와 서역의 역사라는 생소한 분야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이 맛깔스러운 소재를 매끄럽게 이야기로 구성해내는 작가의 능력이 맞물려 책장이 순식간에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고구려의 후예를 다루고는 있지만 실제로 이 이야기는 당나라 시대에 대한 벽화이다. 고구려라는 나라 자체는 거의 출현하지 않는다. 독자가 책을 읽고 나면 품고 가게 되는 영상도 당나라와 중앙아시아라는 거대한 대륙이다.

...탈라스 회전은 서역의 지배권을 둘러싼 당과 압바스 왕조의 다툼이 압바스 왕조의 승리로 끝났음을 뜻한다. 이로써 서역의 종주권이 당에서 아랍으로 옮겨갔던 것이다. 그러나 탈라스 회전은 단순히 당조와 압바스 왕조라는 두 왕조의 싸움만이 아니었다. 두 문명의 충돌이었던 것이다. 당조로 대표되는 불교, 도교 문명과 압바스 왕조로 대표되는 이슬람 문명 사이의 충돌이었다.

탈라스 회전이 당조의 승리로 끝났으면, 즉 고선지 장군이 승리했으면 오늘날 중앙아시아는 현재의 동아시아와 비슷한 상태로 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불교나 유교가 지배 문명인 지역으로 남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탈라스 회전이 압바스 왕조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중앙아시아의 지배적 문명은 무슬림이 되었던 것이다. 이는 탈라스 회전이 1200여 년 전에 끝난 사건이 아니라 현재까지도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사건임을 말해준다...


이 장면에 이르면 독자들은 움찔한다. 당나라와 중앙아시아. 지금은 서로 아무런 연계가 없는 이질적인 관계로만 보이는 이 두 문화권이 먼먼 옛날에는 이렇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니. 그때 고선지 장군이 회전에서 승리했다면 오늘날 이란과 이라크는 불교와 유교를 믿는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라니.

고종에서 시작하여 측천무후, 중종, 예종, 현종, 덕종, 헌종에 이르기까지의 당나라 황제들 치세를 샅샅이 훑고 가는 이 작품의 매력은 주인공만 중요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고선지와 이정기의 일생을 그려내기 위해 등장하는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그저 잠깐 인용되는 배경으로 설정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타당한 역사적 개연성 하에 모습을 드러내어 각자의 개성을 매력적으로 뽐내다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수많은 등장인물들은 모두 고선지와 이정기의 삶에 다양한 형태로 영향을 끼친다. 이들의 개성을 살리면서도 결국 초점을 주인공쪽으로 몰아가는 작가의 기나긴 서사는 가히 탁월하다. 초반에 고선지가 얼른 나타나지 않아 어리둥절했던 마음이 책이 끝나갈 때쯤이면 감탄으로 가득 차게 된다.

<장군과 제왕> 2권. 중원의 고구려, 제왕 이정기
<장군과 제왕> 2권. 중원의 고구려, 제왕 이정기 ⓒ 웅진 지식하우스
고구려라는 나라의 모습은 만날 수 없지만 독자들은 고구려의 후예들이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 개개인의 면모와 만날 수 있다. 나라가 무너진 뒤 고구려인들은 당나라 내의 소수민족이 되어 계속 삶을 유지해갔다. 당 황제가 몇 번 바뀌도록 고구려인들은 옛 나라를 잊지 못했고 결국 독립국가를 향한 그들의 바람은 제왕 이정기에 이르러 실현된다.

우리의 선조는 통일국가 신라인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발해는 물론이거니와 산둥반도에서 크게 세력을 잡았던 치청왕국도 우리의 옛 선조들의 나라였던 것이다. 고려 시대 이후로 활동범위가 한반도 내로 한정되었던 우리, 특히 그 한반도 중에서도 남쪽으로 고립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작가가 불어넣는 메시지는 광활한 만주 벌판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된다.

'조선 왕 독살 사건'이나 '송시열의 나라'같은 이덕일의 작품들이 그동안 우리가 당연시 여겼던 역사적 사건의 내면을 파헤쳐 기존의 고정관념에 일격을 가하는 쪽이었다면 이 작품은 우리가 막연히 알고는 있었지만 자세히 알지 못했던 중국의 오랜 옛날이야기를 세세히 보여주는 쪽이다.

그 자세한 풍경화 속에 고구려의 후예로서 당당한 기상을 중국역사에 선명히 새겼던 고선지와 이정기가 주인공으로 서 있다. 오히려 중국인에게 더 잘 알려졌던 이들이 천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지나 한 역사학도 후손에 의해 아름답게 형상화된 것이다.

접할 수 있었던 대부분 자료들이 한족 외의 민족을 모두 오랑캐로 보고 부정적으로 묘사했던 중국의 정사서들이란 점을 고려해보면 그 행간을 읽어내며 고선지와 이정기라는 인물을 공정한 시선으로 복원해낸 작가의 작업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역사서를 읽을 때 가장 맹점이 되는 것이 너무 많은 인물이 등장해서 누가 누군지 일일이 암기해가며 읽어야하는 번거로움일 것이다. 이덕일의 책은 그런 수고를 덜어준다. 이야기를 매끄럽고 재미있게 이끌어가기 때문에 그 많은 인물들을 자연스럽게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역사서를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특별히 역사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권하고 싶은 책이다. 많은 역사적인 사실들을 재미와 함께 접할 수 있는데다, 권력관계에서 팽팽하게 맞서게 되는 권력자들의 생각의 흐름은 심리학적인 재미도 제공한다. 현종과 양귀비라는 세기의 사랑도 예기치 않게 만나게 되는 매혹적인 부록이다.

장군과 제왕 1 - 대륙의 별, 장군 고선지

이덕일 지음, 웅진지식하우스(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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