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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11월 24일 열린 오마이뉴스 평양-남포 통일마라손대회에 참가한 박복진씨가 당시 인연을 맺은 북측 민족화해협의회 안내원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편집자주>
리 선생, 나는 말이요, 지금...

우리가 평양에서 만났다가 헤어져서 벌써 세 번의 주말이 지나갔습니다. 내가 왜 세 번의 주말이라고 그러냐 하면 말이요, 리 선생, 내가 리 선생 생각을 가장 많이 하는 날이 주말이기 때문이랍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서울에서의 주중은 항상 쫒기는 일상생활이라 잠깐, 잠깐 생각은 나지만 그래도 이렇게 오랫동안 리 선생을, 리 선생과 같이 보냈던 시간을, 리 선생이 살고 계시는 평양에 대해 넋 나간 것처럼 오래, 오래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주로 주말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말 중에서도 지금 내가 보내고 있는 이 시간, 나의 새벽 뜀박질 이 시간입니다.

리 선생,

그 때도 말씀드렸다시피 나는 매일 새벽에 한강변을 달립니다. 주중에는 약 15km, 주말에는 40여km를 달리지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더우나 추우나 달립니다. 왜 달리는지, 무엇 때문에 달리는지 묻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달립니다.

그리고 그 달리는 시간은 저에게 아주 소중합니다. 달리는 동안 저는 나만의 깊은 생각에 몰입을 할 수 있고, 대개의 경우 아주 중요한 생각이나 결단은 이렇게 새벽 나 홀로 강변을 달리면서 이루어집니다.

옛날에는 사업적 일이나 가족의 일 등 내 주변의 일이 내 생각의 주제가 되어왔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엉겁결에 홀연히 갔다 오게 된 평양이 자꾸만 내 머리를 온통 점령하고 있으며 내가 공식적으로 만났던 나의 맨 처음 평양 친구 리 선생의 얼굴이 잠시 잠깐도 내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 지난 11월 23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해 전세기에서 내린 필자.
ⓒ 박복진
난 잘못된 선입관의 꼼짝없는 포로였습니다

리 선생! 우선 죄송한 말씀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리 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 필요 이상으로 리 선생을 경계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나의 온 신경을 써서 리 선생을 꼼꼼히 챙겨보았습니다. 차고 있는 시계도 유심히 바라보고, 와이셔츠를 맨 목 깃 두 갈래가 한 점으로 만났는지, 그 간격이 떨어졌는지도 살폈습니다. 식탁에서 음식을 들 때 두 다리가 가지런히 탁자 밑으로 들어갔는지, 두 손이 모두 탁자 위로 올려져 식사를 하는지도 확인했습니다. 음식을 씹을 때 입속의 음식이 보이는지까지 표 안 나게 세세히 살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참 많이 우습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런 태도는 장사를 하면서 내가 처음 만난 외국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고 하던 버릇이었고, 내 가족이나 내 형제에게는 좀처럼 하지 않았던 습관이었는데, 내가 잘못한 것 같습니다. 말로만 겨레요 동포지, 실제 내 가슴은 아직 열려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평양을 향해 출발 하던 날, 인천국제공항에서 아시아나 전세기 출발을 국내선 출구로 했었던 걸 왜 눈여겨보지 않고 그 비행기를 몰고 가는 기장의 성함을 물어 혹시 내 친구가 몰고 가는지에만 정신이 팔렸는지 모르겠습니다.

탑승 안내원이 승객들은 공항 면세점을 이용할 수 없다는 설명의 배경을 왜 그냥 흘렸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겨레요, 내 동포, 내 형제를 만나러 간다는 엄연한 사실이 도처에 널브러져 있었지만 나는 내가 그동안 살며 듣고 배운 잘못된 선입관의 꼼짝없는 포로였습니다. 불쌍한 희생양이었다 그 말입니다.

"어떻게 동포끼리 돈을 받습네까?"

리 선생은 말했지요. 내가 묘향산 가면서, 이처럼 좋은 관광 자원이 있는데 관광객을 유치해서 입장료를 받고 그 입장료 수입으로 길도 닦고 나무도 심고 하면 좋을 것 같다고 하니, 리 선생은 말했지요. 아니, 어떻게 동포끼리 돈을 받습네까. 우린 그저 이렇게 좋은 걸 동포에게 보여주니 기쁘지요….

아마도 리 선생과 나와의 사이에 생각하는 방식이 다른 게 있다면 바로 이 부분도 그 중 하나가 될 것이라 생각했지요. 허나, 누가 리 선생보고 돈을 모르는 바보라고 하겠습니까. 아마 누구는, 동포에게 돈을 어떻게 받느냐고 반문하는 리 선생의 그 답변은 진실이 아닐 거라고 말을 하는 이도 있을 겁니다만 그래도 저는 그 말을 하는 리 선생의 얼굴에서 때 묻지 않은 순진함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뭐랄까? 대개 넉넉지 못한 사람은 자기 집을 찾은 친구를 대접할 때 가게에 나가 사정을 하고 외상이라도 해서 꽁치 한 마리를 들고 와 정성껏 대접하지만, 있는 사람은 그 친구가 예약도 없이 불쑥 왔다고 투덜대며 그냥 배달 음식으로 때우듯, 오히려 넉넉지 못한 사람의 순진이라고 할까요?

나는 이념을 모릅니다. 아니 여태껏 살아오며 나름으로 터득한 것은 있겠지만 이를 거론하고 싶지는 않겠습니다. 지금 그럴 기분도 아니고요. 그러나 묘향산으로 가면서 맑은 청천강 물을 나룻배로 건너고 있던 주민들의 모습을 보며 한 폭의 그림을 생각했습니다.

강을 좀 더 올라가자 어느 남정네가 여인인지 누군지는 분명치 않지만 자기 바지를 걷고 누군가를 등에 업어 강을 건네주는 장면에서는 아름다운 소설의 한 대목을 생각했습니다.

이념이 끼어들 틈이 없는 아주 소중한 장면들이었습니다. 교량이 없어서 혹은 그 교량을 건설할 사회의 여건이 안 되어서 그럴 수도 있었겠지요. 그런 나를 보고 사람들은 배부른 소리 하고 있다고 하며, 울고 있는 망아지 귀머거리는 하품하는 줄 알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네, 잘 알고 있습니다.

난 북녘에서 옛 고향을 보았습니다

리 선생, 나는 말이지요. 북에서 보았습니다.

산하는 헐벗었지만 거기에는 우리들 선조 조상들이 대대로 삶을 이어온 질박한 땀과 숨소리가 있었습니다. 어느 곳을 지날 때는 마땅한 도로가 없는지 동네 주민들이 일렬로 철도 길을 따라 걷고 있는 기다란 줄을 보며 그 길을 같이 걷고 있는 주민들의 도란도란 이야기도 상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고개를 뒤로 돌려 보면 너무나도 쉽게 기억해 낼 수 있는 장면들, 조그만 동내 뒷동산 산마루 황톳길을 걸어 돌아 동구 밖 어딘가로 마실 나가던 동네 사람들의 모습, 아! 바로 내 어릴 적 삼촌들 사촌들 모습이었습니다.

비유가 틀렸는지 모르지만 남녘에선 산업화가 맨 먼저 이루어진 영남의 어느 도시보다, 그래서 각종 산업화 공해 때문에 맑은 시내를 잃어버린, 지금은 그 당시 덜 산업화되었던 호남의 어느 고장, 그래서 아직은 냇가의 송사리를 볼 수 있는 곳에 대한 애정이 더 생기는, 그런 감정으로 나는 차창 밖의 헐벗은 산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리 선생. 나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위에 이야기한대로 한 때는 번성하던 영남의 공장들을 덜 산업화되었던 호남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공장 유치를 못한다고 아우성을 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 뿐 영남이나 호남이나 다 우리나라요, 우리 민족이기 때문에 그런 미움은 또 다른 더 중대한 문제에 묻혀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공장 유치가 덜 된 호남지역이 더 부러움을 사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제 이런 지엽적인 부러움, 안 부러움은 더 큰 세상을 살아야하는 우리들 앞에 문제 자체가 안 되었습니다. 왜, 우리는 한 나라, 한 민족, 같은 형제이기 때문이지요.

저는 이런 이 생각을 남과 북에 대비시켜 생각해 보았습니다. 산업화가 먼저 된 남쪽과 아직 산업화가 덜된 북쪽, 그래서 지금 우리가 지나가는 차창 밖 풍경이 다른 저 모습, 우리 둘 사이에 다른 것이 있다면 단지 이것들 뿐,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남과 북도 결국 이곳 남의 영남과 호남이듯 단지 지도상의 그런 조그마한 도의 경계 밖에 더 되겠습니까? 결국에는 통일이라는 큰 틀 속에 그것마저 없어질, 불어서 훅! 하고 날아갈 그런 약하기가 짝이 없는 선. 왜냐구요? 우리는 그 선보다 훨씬 더 오래 전 더 훨씬 진하게 피를 나눈 형제이기 때문이지요.

리 선생! 나는 말이오, 아버지가 충청도에서 낳고 자라고, 나는 전라도 전주에서 낳고 자랐고, 아내는 경상도 대구에서 낳고 자라 나에게 시집을 왔고, 내 아들은 부산에서 낳고 자라다가 지금은 모두 서울에서 모여 살고 있지요. 아내의 아버지는 일본에 건너가 공부하고 그 아버지의 누이동생은 미국으로 시집가서 지금 플로리다에서 살고 있으며, 내 조카는 프랑스로 시집가서 살고 있지요.

▲ 지난 11월 24일 열린 오마이뉴스 평양-남포 통일 마라손대회에 참가한 필자.
ⓒ 박복진
나는 일찍부터 무역을 한다하고 세계의 오 대양 육대주를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런 나이기에 영, 호남이나 남과 북 이런 개념은 상당히 곤혹스러운, 정말로 답답한 얼간이들 말장난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나는 이념을 모릅니다. 그저 생각이 굉장히 단순한, 많이 모자라는 사람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직선적으로 생각하는 단점 투성이 보통 평범한 서울 사람입니다. 여기에 더 보탠다면 일찍부터 넓혀놓은 집안과 내 직업상의 이유로 얻게 된 세계화의 안목 때문에 우리의 남과 북의 문제에 심한 가슴앓이를 하는 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 이유가 복잡한 이념 문제라기보다는, 내가 원할 때 가보고 싶은 데 못 가본다는 내 개인적 욕심과 내 동포 내 형제인데 다른 선진국 백성들처럼, 아니면 최소한 지금 현재 내가 먹고 입는 것처럼 만이라도 하지 못하는 북쪽 동포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깥에서 현지 외국인들이 우리의 북녘을 두고 무어라 쑥덕대는 게 이제 정말 넌더리가 나게 싫다는 것입니다. 못사는 동생이 하나 있는데 누가 그 애를 보고 못 산다고 자꾸 해대면 괜스레 그 사람한테 적개심이 생기는 뭐, 그런 이치지요.

편지 한 장 보낼 수 없는 현실을 증오하오

리 선생, 나는 말이요, 요즈음 정말로 리 선생 생각이 많이 나오. 얼떨결에 후딱 지나간 3박 4일의 짧은 평양 체류 기억이 그나마도 자꾸자꾸 희미해져 가 안타깝다는 말이오. 그보다도 더, 내가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내가 외국 출장에서 돌아오면 반드시 일주일이 다 가기 전에 내가 그곳에 갔을 때 신세를 졌던 그 분에게 감사의 편지를 써서 보내야 하는데, 나는 내가 이 감사의 편지를 이 선생에게 쓸 수가 없다는 사실이오. 아니, 써도 보낼 방법이 없다는 이 서글픈 사실이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이념은 모르오. 그렇지만 나에게 생애 처음으로 꿈과도 같은 대동강, 만 가지 경치가 있다는 만경대를 구경시켜주고, 무엇보다도 내가 몽매간에도 보고 싶어 하던 평양의 시민과 거리를 구경시켜준 리 선생에게 감사의 편지 한 장 보낼 수 없는 이 기막힌 현실은 증오하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도 리 선생을 서울의 나의 집으로 초청해서 저녁 식사를 같이 하고 싶은데 이게 가능한지, 가능치 않다면 왜 그런지 누구 붙잡고 속 시원히 물어볼 이 없는 그 사실이 나는 지독히도 싫다는 말이오.

리 선생, 나는 말이오. 나는 진정으로 원하고 있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서로 간 인간적인 감사의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날을 원하고 있소. 그리고 조금 더 욕심내자면 내가 신세진 리 선생을 우리 집에 초대해서 저녁 한 끼 따뜻이 대접하고 싶소.

그거요. 그것뿐이오. 리 선생, 날씨가 추워서 떡 쪼가리가 달달달 떨리던 오늘 새벽 내가 오늘 새벽 뜀질 동안 생각해낸 리 선생에게 보내고 싶었던 편지 내용은 그거요.

벌써부터 다시 보고 싶어진 리 선생,

잘 있으시오, 다음 만날 때까지….


남쪽의 뜀꾼 애호가

서울
고덕 달림이
춘포, 박 복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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