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저마다 겨울이 가까워오면 작은 약속을 하나쯤 만들고 있을 것이다. 바로 '첫눈이 오면 ~ 하자!' 이런 류의 약속일 것이다. 특히 여성들에게 이런 약속이 많지 않을까. 겨울이 오고 첫눈이 내리면 그야말로 난리들이다. 눈이란 사람들의 마음까지 순백으로 만들어주는 표백제라 표현하면 어떨까?
첫눈에 대한 갈망은 겨울이면 하루가 멀다 하고 지겹게 눈 구경을 할 수 있는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1월, 빠르면 10월에 시작해서 4, 5월까지 눈을 볼 수 있는 곳이 러시아인데도 첫눈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은 세계 공통인 모양이다.
어릴 적 시골에 살았을 때는 무던히도 눈이 많이 내렸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지구 온난화 때문인지 겨울에 눈 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나마 지난 겨울은 눈 내리는 것을 볼 기회가 제법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진으로 기록해 놓을 기회가 적어 안타까웠는데, 한참을 잊고 있다 슬라이드를 현상해보니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필름이 있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오래된 책 속에서 만원짜리 지폐를 발견했을 때의 기분이랄까? 여하튼 오랜만에 받아든 필름을 보고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릴 적 눈이 많이 내린 날 대나무에 눈이 앉으면 대나무는 그걸 견디지 못해 "딱~"하며 비명을 지르고 부러진다. 가끔씩 이 소리가 그리울 때가 있다. 비록 대나무는 고통스러울지라도…. 이런 날이면 길가에 있는 대나무는 길을 가로막고 곤히 잠을 자듯 누워 있다. 그럴 때면 누워 있는 대나무의 눈을 툴툴 털어준다. 그러면 녀석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서기도 했다.
2002년인가? 그해 늦겨울 친구와 며칠간 겨울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 당시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청송 주산지였다. 주산지는 약 270여 년 전 만들어졌는데 호수 속에 약 150년생 능수버들과 왕버들이 자생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2002년 당시만 해도 디지털 사진기 붐이 일기 전이라 주산지를 찾는 사람은 적었다. 하지만 지금은 봄, 가을이면 너나 할 것 없이 다녀가는 곳이 주산지다. 얼마나 심한 몸살을 앓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주산지의 봄, 가을도 좋지만 주산지의 백미는 겨울풍경이 아닌가 싶다. 겨울에는 이들과는 다른 별천지가 된다.
호수를 아주 두껍게 뒤덮은 얼음이며 그 차가운 얼음장 사이로 우뚝 솟아 있는 고목들 그리고 얼음 위에서 갓 태어나는 안개까지, 정말 우주가 생성되는 광경도 이렇게 황홀하지는 않을 것이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주산지를 더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지금 방영되고 있는 모 드라마에도 주산지가 등장하는 것을 보았다.
가끔씩 주변 사람들이 홍역을 치르고 있을 주산지에 간다고 하면 극구 말리곤 한다. 하지만, 겨울 주산지에 간다면 그 차분한 분위기를 넉넉히 즐기고 오라고 권한다. 이제 서서히 얼음이 두꺼워지고 있을 주산지가 문득 그리워진다.
내가 사는 진주는 남쪽지방이라 여간해서는 큰 눈이 내리지 않는다. 어쩌다 한 번 눈이라도 내리면 모두들 즐거운 환호성을 지른다. 아주 가끔씩이지만 큰 눈이 내리면 이른 아침 촉석루 맞은 편에는 아주 다양한 카메라들이 촉석루와 진주성 일대를 기록하기 위해 장사진을 친다. 1년에 한두 번 그런 장면을 볼 수 있기에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 또한 즐겁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눈이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눈 오는 날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면 '아~ 나도 어린 시절 저랬겠구나!'하는 생각으로 옛 추억을 더듬어 본다.
어린 시절 눈이 쌓이면 저마다 비료포대에 짚을 넣어서 뒷동산에 올라 눈썰매를 탔다. 특히 겨울방학이면 아침 먹고 나가 때를 넘기며 논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또 큰길가 도랑에서는 얼음썰매로 경주도 하고 아이스하키도 하면서 놀았다.
이제는 시골의 개울들도 예전처럼 얼지도 않을 뿐더러 아이들마저 없으니 얼음썰매 타는 모습을 이제 보기란 쉽지 않다. 해마다 겨울이면 내 것과 동생 것을 포함해 몇 개씩 썰매를 만들곤 했었다. 올 겨울은 옛 추억을 되새기며 우리 아이를 위해 썰매를 한 번 만들어 볼 요량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계신 시골에선 지금도 손에 잡힐 듯 지리산 천왕봉이 보인다. 그런 탓인지 지리산을 지척에 두고도 지리산을 다녀 온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겨울을 정말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겨울에 지리산 산행을 권한다. 처음으로 간 지리산에서 멋진 일출에 솜이불 같은 운해를 보았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겨울에 지리산을 오르는 내내 비가 내려서 힘들었는데 정상에 섰을 때는 같이 간 친구들은 여러 번 갔음에도 그런 광경은 처음이라 했다.
최근 눈에 대한 기억은 겨울이면 순백의 세계로 다시 태어나는 강원도에서였다. 연애시절 당시 경기도에 살았던 아내는 남쪽 지방에 사는 촌놈을 위해 오대산 월정사로 여행을 가자했다.
가는 길, 눈발이 제법 날리는 것이 심상치 않았는데 버스에 내려 걸어가는 길은 온통 눈 천지였다. 눈 덮인 오대산 자락이며 새하얀 월정사의 지붕이며 머리에 하얀 모자를 쓰고 가는 사람들은 지금도 기억의 저편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날은 어두워지고 절에서 걸어 내려오는 길에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는 즐거운 음악이었다. 오늘 아침 마침 라디오에서 겨울이면 들을 수 있는 유명한 왈츠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이 흘러 나왔다. 이 음악을 들으며 다시 한번 오대산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눈에 대한 기억들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최근의 뉴스에서 본 것처럼 때 아닌 폭설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 서해안 농가에 큰 피해가 난 모양인데 이젠 눈 피해가 더이상 없었으면 좋겠다. 모든 것이 그렇듯 적당히 와서 반가운 눈이 되었으면 하는데 이상기후 때문인지 마음같지 않아 안타깝다.
이제 막 겨울이 시작되었는데 농민들의 표정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눈 피해로 힘들어하는 농민들이 하루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섰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덧붙이는 글 | 1. 주산지 가는 길
도로안내 : 청송에서 포항쪽으로 가는 31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청운리에서 이전 방면 914번 지방도를 탄다. 상이전에서 주산지와 절골계곡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현지교통 : 청송읍에서 부동면행 버스를 타고 주왕산국립공원까지 간다. 공원 입구 버스터미널에서 주산지가 있는 이전리까지 가는 버스편이 있다.(1시간 간격 운행)
2. 월정사 가는 길
도로안내 : 영동고속도로 -> 진부 IC -> 6번 국도 -> 4km -> 월정 3거리 (월정주유소) -> 좌회전 -> 4km 북상 -> 간평교 -> 삼거리 -> 좌회전 -> 4km -> 월정사 앞 주차장 -> 8.3km 북상 -> 상원사 앞 주차장
현지교통 : 진부-월정사 경유 상원사행 시내버스이용/ < 12회 운행>/ 20분소요
3. 진주 촉석루 가는 길
서울에서 고속버스 터미널이나 남부 터미널에서 매 30분여마다 진주행 버스를 탈 수 있다.
승용차로는 경부고속도로에서 대전-진주간 고속도로로 접어들어 서진주 나들목이나 진주나들목으로 오면 쉽게 찾을 수 있다.